『위대한 착각, 올바른 미래』중에서... 03
2019년 11월 중국 우한에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진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전 세계 약 695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한국에서만 3만 5천여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사태가 장기화되면서 사람들은 ‘위드 코로나’ 생활에 적응해야 했다. 팔뚝 인사, 마스크 착용, 국외 여행 불가, 재택근무, 원격수업, 화상회의. 사회적 거리 두기와 비대면의 흐름은 우리 생활 속으로 빠르게 파고들어 경제·사회·일상을 변화시켰다. 누가 이런 끔찍한 상황을 상상이나 했을까.
사람들은 대체로 코로나19와 같이 큰 사건이 일어날 거라 생각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진 않는다. 그래서 다가올 미래에 관해 전문가들이 이야기하면 흥밋거리로 듣거나, 먼 훗날에 혹시 일어날지도 모르는 소설 정도로 무시하곤 한다. 그뿐인가. 사람들은 미래를 불확실하다 여긴다. 막연히 불안해한다. 알 수 없는 미래보다는 지금 현재가 그나마 낫다고 여긴다. 그러면서 스스로에게 ‘지금 당장은 아무것도 안 해도 돼,’ ‘아니 아무것도 할 수 없어’라고 말한다. 자가발전적인 착각이다.
사람들은... 알 수 없는 미래보다는
지금 현재가 그나마 낫다고 여긴다.
그러면서 스스로에게
‘지금 당장은 아무것도 안 해도 돼,’
‘아니 아무것도 할 수 없어’라고 말한다.
자가발전적인 착각이다.
그래서 흔히들 미래는 예측할 수 없다고 쉽게 말한다. 지금은 ‘뉴노멀(New Normal)’의 시대여서 예측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보는 전문가도 많다. 이와는 별개로 ‘미래는 창조하는 거지 예측하는 게 아니다’라고 지적하는 학자들도 수두룩하다. 오죽하면 현대 경영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세계적인 석학 피터 드러커도 “미래를 예측하려는 것은 자신의 신용을 떨어뜨리는 일이다”라고 경고했을까. ‘인간이 예측할 수 있는 한 가지는 미래가 예측 불가능 하다는 것이다’란 우스갯소리가 나오는 배경이다.
그렇다고 미래를 불확실한 것으로만 치부하는 건 너무 손쉬운, 아니 게으른 해석이다. 예측할 수 있는 미래도 분명히 존재한다. 챗GPT의 등장이 바로 그러하다. 분명 생성 AI의 한 종류인 챗GPT는 당연히 ‘알 수도 있는 미래’였다.
2016년에 등장한 알파고와 2023년에 출현한 챗GPT. 둘은 닮았다. 물론 존재 이유와 기능은 다르다. 하나는 바둑 AI 프로그램이고 나머지 하나는 언어 기반 AI 챗봇이다. 그러나 둘은 인공적인 개체라는 점이 동일하며, 지능을 습득하고 활용하게끔 설계되어 있다는 게 비슷하다. 또 ‘알파고는 바둑’, ‘챗GPT는 언어’라는 특정 분야에 집중된 것도 닮은 점이다.
알파고와 챗GPT.
뜬금없겠지만 나는 이 둘을 비교하면
머릿속에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가 떠오른다.
그럼에도 두 기술은 다른 점이 더 많다. 챗GPT의 미션은 언어로 구성된 수많은 텍스트를 통해 패턴을 찾아내는 것이다. 그 핵심에는 딥러닝(Deep Learning)이라는 인공 신경망 기술로 훈련받은 대형 언어모델이 자리 잡고 있다. 즉 뭔가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생성형 AI인 거다.
이에 반해 알파고의 미션은 좀 더 단순한 개인 맞춤형(?) 모델이었다. 수많은 기보를 학습하여 이세돌 9단이 놓을 수를 예측하고 이를 무력화시킬 만한 더 좋은 수를 찾아내는 게 인생 목표다. 마치 영화 〈주유소 습격사건〉에서 “나는 한 놈만 팬다”는 배우 유오성의 대사처럼 알파고는 이세돌 같은 천재 바둑기사를 이기기 위해 탄생한 존재다.
알파고와 챗GPT. 뜬금없겠지만 나는 이 둘을 비교하면 머릿속에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가 떠오른다. 자폐증으로 인해 법률 분야에선 천재라는 소리를 듣지만, 일상 속에선 보통 사람과 어울리는 게 힘든 우영우. 그런 주인공이 로펌에 취직하여 다양한 사건들을 다루면서 사랑과 우정, 동료애를 깨달아 가는 과정을 그린 스토리.
그렇게 성장해 가는 우영우를 보면 왠지 AI의 변천사가 느껴진다. 배우 박은빈이 연기한 우영우의 드라마 초반 모습을 보고 있자면, 바둑에 대한 데이터는 풍부하지만, 막상 그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알파고가 연상된다. 반대로 사람을 겪으면서 성숙해진 우영우는 타인과 교류할 수 있는 챗GPT와 닮아있다. 다시 말해 챗GPT가 극 후반의 우영우라면 알파고는 드라마 기획 의도에 맞춰 시놉시스에서 막 걸어 나온 우영우라는 뜻이다.
물론 100% 맞는 비유는 아니다. 우영우라는 인물은 아무리 픽션이어도 사람이니까. 하지만 사람이 달라지면 모든 게 새로워 보이듯, 알파고에서 챗GPT까지 온 인공지능 발전사는 놀라울 정도로 발전해 있다. 애플의 ‘시리’나 삼성의 ‘빅스비’를 써본 사람은 알 거다. 챗GPT가 이들보다 얼마나 더 정교하고 정확한지를. 결국 IBM의 딥 블루부터 알파고에 이르는 과정 등을 생각해 보면 챗GPT를 가능케 한 AI기술의 발전은 놀랍다. 하지만 챗GPT의 출현 자체는 그리 놀라울 만한 일이 아니다. 오히려 그 등장이 당연하다고 느껴진다.
IT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7년 전 알파고 뉴스를 본 사람이라면 ‘미래의 AI는 훨씬 더 똑똑해지겠구나’하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떠올리지 않았을까? 뉴스를 안 보는 사람이라도 시리, 빅스비 등을 써본 일반인이면 챗GPT 같은 서비스는 충분히 상상해 볼 수 있다. 마블 스튜디오가 제작한 영화 〈아이언맨〉만 시청했어도 대화로 모든 명령을 완벽하게 이해하는 AI 캐릭터 자비스에 익숙할 것이다. 그래서 챗GPT는 ‘알 수도 있는 미래’가 맞다.
하지만 남이 말해주는 미래를
의문 없이 받아들이는 것과
내가 스스로 관심을 가지고 관찰한 후에
내리는 예측은 질적으로 다르다.
그렇다면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왜 우리는 예측 가능한 범주 안에 있는 신기술이 나올 때마다 이리 호들갑을 떠는 것일까? 누군가는 이 야단법석을 언론이나 SNS의 탓으로 돌리겠지만, 문제의 본질은 따로 있다.
사람들은 생각보다 다가올 미래에 대해 충분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연말 연초마다 방송가는 미래에 대한 특집 좌담이 이어지고, 서점가는 미래 예측 서적들로 가득 찬다. 그리고 좀 용하다는 전국의 점집들은 인사 시즌을 앞두고 운세를 보려는 사람들로 온종일 붐빈다. 하다못해 주요 인터넷 포털과 은행까지도 무료로 온라인 토정비결을 제공한다. 이런데도 사람들이 미래에 관해 무관심하다니, 무슨 헛소리냐고?
하지만 남이 말해주는 미래를 의문 없이 받아들이는 것과 내가 스스로 관심을 가지고 관찰한 후에 내리는 예측은 질적으로 다르다. 대다수의 사람은 자신의 미래를 알기 위해 점이나 운세를 보는 걸 개의치 않는다. 그러나 정작 자신의 삶을 바꿀 수 있는, 미래를 주도할 기술이 바로 앞에 있는 건 알아보지 못한다.
이는 마치 구글의 지메일로 열심히
오늘의 띠별 운세는 받아 보지만,
구글 주식은 매입할 생각을
못 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기술’이라는 단어를 ‘땅’과 바꿔 생각해 보라. 1970년대 강남 압구정 배추 논밭 주인 중 몇 명이 지금도 그 땅을 소유하고 있을까? 그때 땅 팔은 걸로 현대아파트 작은 평수라도 하나 사둘 걸 하고 후회하는 사람들이 더 많지 않을까? 이는 마치 구글의 지메일로 열심히 오늘의 띠별 운세는 받아 보지만, 구글 주식은 매입할 생각을 못 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결국 인간이 기술을 대하는 태도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두 가지를 깨달을 수 있다. 첫째, 기술이라고 다 같은 기술이 아니라는 점. 둘째, 기술이 내 일상을 성공적으로 변화시킬 때까지 사람들은 기술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아, 그리고 한 가지가 더 있다. 기술이 성공적으로 정착하고 나면 당연하다고 여긴다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