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의 법칙 #1: 인간은 기술 변화를 두려워한다

『위대한 착각, 올바른 미래』중에서... 04

by 박대성

“50대 A 씨는 선풍기를 틀어놓고 자다가 변을 당했습니다….”

“어젯밤 문을 닫은 채 선풍기를 켜놓고 자던 40대 B 씨가 숨진 채 발견됐습니다…. “

“49살 C씨도 선풍기를 켜놓고 잠들었다가 사망했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 봤더니 D 씨가 쓰러져 있었고 선풍기가 바로 앞에서 계속 돌고 있었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황당하기 짝이 없지만, 그 시절 여름철만 되면 한국인들은 특정 괴담으로 공포에 떨었다. 잘 때 선풍기를 오래 틀어놓으면 죽을 수도 있다는 ‘선풍기 사망설’이 원인이었다. 이 거짓 상식의 포인트는 크게 두 가지다. 선풍기 바람을 오래 쐬면 체온이 떨어져 저체온증에 걸릴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밀폐된 공간에서 선풍기를 틀면 산소가 부족해져 저산소증으로 질식사할 수 있다는 거다.


선풍기 괴담이 장기간 널리 퍼진 데에는
더 간단한 비밀이 숨겨져 있다...
신기술에 대한 공포가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더 정확하게 얘기하면 기술 때문에
기존 생활 습관이 변하는 게 무서운 거다.

언뜻 보면 그럴싸해 보이는 이야기지만 선풍기 바람만으로 신체 온도를 10도 이상 내려 저체온증이 오게 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마찬가지로 일반 가정집은 저산소증을 유발할 수 있는 완벽한 밀실이 아니다. 되레 선풍기 괴담과 관련하여 사망한 사람들은 평소에 지병을 앓고 있거나 과음을 했다는 경우가 대부분이라서 사망원인이 선풍기와는 무관하다.


그러나 한국인들의 선풍기 괴담 사랑(?)은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실제로 선풍기의 위험성을 알리는 언론 보도는 1920년대부터 나왔다. KBS의 뉴미디어 채널 ‘크랩(KLAB)’에 소개된 자료를 보면 1927년 7월 31일 중외일보는 〈신기하다는 전기부채의 해〉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선풍기가 ‘두통과 안면신경마비’ 등을 유발하며 생명의 위험을 불러올 수 있다고 경고했다. 1932년 7월 1일 동아일보의 〈선풍긔 때문에 죽엇다, 잘때에 주의〉라는 기사는 밤에 잘 때는 꼭 선풍기를 꺼야 한다고 당부했다.


이런 식의 보도는 한국경제의 발전과 함께 1970년대부터 급격히 늘어났다. 뉴스에선 ‘선풍기 죽음 현장’을 검증한다는 취지에 따라 선풍기가 산소포화도를 얼마나 떨어뜨리는지에 관한 실험을 진행했다. ‘죽은 사람 옆에는 항상 선풍기가 돌아가고 있었다’라는 식의 목격자 증언이 줄을 이었다. 그리고 산소 부족으로 인해서 호흡곤란 그리고 질식사할 수도 있다는 전문의들의 인터뷰는 화룡점정을 찍었다.


상식처럼 여겨진 이 도시 전설은 2000년대 중반에 들어 시들해졌는데 미국 작가 켄 제닝스(Ken Jennings)는 그 원인을 인터넷으로 지목했다. 어린 시절 한국에서 자란 제닝스는 미국 잡지 슬레이트에 기고한 글에서 ‘지난 10년간, 인터넷상의 회의론’이 75년간 지속된 한국의 선풍기 괴담을 이겼다고 주장했다. 그럼 선풍기 사망설이 1920년대부터 약 80년에 걸쳐 롱런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이윤성 서울대 법의학과 교수는 이를 일종의 군중심리로 설명한다. 이 교수는 “외국 사례에도 선풍기 때문에 질식 사망을 했다는 사례는 하나도 없다”면서 “다른 사람들이 인용하고, 언론에서도 인용하다 보니 확립된 속설처럼 퍼진 게 아닌가”라고 지적했다.


처음부터 사랑받는 기술은 없다. 오히려 그 반대다.
신기술이 헌기술이 되어야 지탄의 대상에서 벗어날 수 있다.
TV의 등장으로 라디오는 뉴스를 상업화하고
음악인과 예술가를 착취한다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비디오게임 덕에 텔레비전은 아이들 교육을 방해하는
주범이라는 오명을 벗을 수 있었다.

하지만 필자가 볼 때 선풍기 괴담이 장기간 널리 퍼진 데에는 더 간단한 비밀이 숨겨져 있다. 1927년 중도일보의 〈신기하다는 전기부채의 해〉라는 기사의 헤드라인을 보면 알 수 있다. 신기술에 대한 공포가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더 정확하게 얘기하면 기술 때문에 기존 생활 습관이 변하는 게 무서운 거다. 기술은 인간을 변화시킨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변화를 두려워한다. 이것이 기술의 첫 번째 법칙이다.


처음부터 사랑받는 기술은 없다. 오히려 그 반대다. 신기술이 헌기술이 되어야 지탄의 대상에서 벗어날 수 있다. TV의 등장으로 라디오는 뉴스를 상업화하고 음악인과 예술가를 착취한다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비디오게임 덕에 텔레비전은 아이들 교육을 방해하는 주범이라는 오명을 벗을 수 있었다. 인터넷, 스마트폰, 모바일 게임 등 더 강력한 새 기술이 출현할 때마다 사람들은 공격의 표적을 옮겼다.


그런 의미에서 현재의 우리가 보기에는 전혀 문제가 없어 보이는 기술도 과거에는 논란거리였을 수 있다. 원반에 홈을 파서 소리를 기록하고 재생할 수 있는 축음기 역시 오랫동안 미움을 샀다. 1877년 에디슨은 축음기를 발명하면서 이 기술이 시각장애인을 위해 편지를 받아쓰거나 기록을 남기는 데 쓰일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축음기를 주로 음악을 듣는 데 활용했다.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실제 연주자 없이도 음악을 즐길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이 이 변화를 환영한 것은 아니었다. 1890년 뉴욕 메디컬 저널에 따르면 필라델피아시는 축음기가 귀에 상처를 입히는 등 질병을 전파할 수 있다는 이유로 공원에서 축음기 사용을 금지했다. 미국에서 ‘행진곡의 왕’으로 불리는 존 필립 수자(John Philip Sousa)는 1906년 애플톤 잡지에 기고한 글에서 이렇게 물었다. “아기가 달콤한 자장가를 들으며 잠들게 할 것인가, 아니면 기계에 의해 아기가 잠들게 할 것인가?” 미국 해병대의 악장이자 작곡가이기도 했던 수자는 “다음 세대는 영혼도 표정도 없는 인간 축음기로 진화할 것이다”라고 한탄했다고 한다.


사람들은 혁신이 장기적으로
세상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거의 알지 못하며,
그 영향은 대체로 예측한 것만큼 나쁘지 않다...
새로운 기술은 인간을 변화시키고,
변화는 인간을 두렵게 만든다.
원래부터 인간은 새로운 것과 변화를
선호하지 않는 동물이니,
이 두 가지가 합쳐진 걸 좋아할 리 없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의 눈으로 보면 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일인가? 하지만 ‘축음기가 뭐 그리 문제가 된다고 호들갑인지’라며 과거의 사람들을 우둔하다고 매도하기 전에 오늘날 우리의 모습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미래의 눈으로 볼 때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과연 현명한가? 인터넷, 스마트폰, SNS, 비디오게임 등을 둘러싼 우리의 태도가 너무 감정적이진 않은가?


겁에 질린 부모가 자녀를 ‘나쁜 기술’로부터 보호하는 프레임은 언론 보도의 단골 소재다. 수많은 작가와 학자, 정치인들이 인터넷과 소셜미디어의 해로운 영향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 이러한 두려움이 정당한 것으로 판명될 때도 있지만, 대부분 흐지부지 사라진다. 실제로 축음기가 아기에게 해를 끼칠 수 있다고 경고했던

수자조차도 결국 자신의 음악을 녹음하는 것을 허용했다.


여기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이 있다. 사람들은 혁신이 장기적으로 세상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거의 알지 못하며, 그 영향은 대체로 예측한 것만큼 나쁘지 않다는 점이다. 그래서 시간의 흐름만큼 기술에 대한 확실한 검증도 없을 것이다. 새로운 기술은 인간을 변화시키고, 변화는 인간을 두렵게 만든다. 원래부터 인간은 새로운 것과 변화를 선호하지 않는 동물이니, 이 두 가지가 합쳐진 걸 좋아할 리 없다.


새로운 혁신이 등장할 때마다 위협을 느낀 것은 기득권층이었다. 18세기 중반 영국에서 우산이 등장하기 시작했을 때, 비가 오는 날씨에 사업을 번창시켰던 마차 운전사들은 이 발명품이 여성스럽고 사회에 적합하지 않다고 비난했다. SNS가 흥행하면서 광고주들을 뺏어가자 신문사들은 일제히 알파벳(구글)과 메타(페이스북)를 탓했다. 넷플릭스, 유튜브 같은 온라인 동영상 플랫폼들이 흥행하자 한국 통신사들은 일제히 망 사용료를 내라고 압박했다. 타다의 등장에 택시 운전사들은 분노했고, 대형마트(SSM)는 전통시장으로선 눈엣가시 같은 존재다.


그러나 수 세기에 걸친 기술 비관론에도 불구하고, 혁신은 항상 반대에 부딪히지만 거의 멈추지 않는다는 진리를 역사가 제공한다. 그러니 무의미한 걱정에 시간을 낭비하는 대신 기술에 대한 합리적인 대화에 집중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