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스토이 이반일리치의 죽음

평론 및 독후감

by 서도운

그와 나는, 죽음 위에서 대화했다

죽음은 누구의 것인가.


타인의 죽음 앞에서는 우리는 담담해 보인다. 그러나 자기 자신의 죽음을 마주하는 순간, 우리는 극단적인 공포와 절망에 휩싸인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바로 이 질문에서 시작한다. 나는 이 질문이 단지 소설 속 주인공 이반의 것이 아니라, 톨스토이 자신이 던진 실존적 고백이었다고 느낀다. 실제로 노년의 톨스토이는 신앙과 죽음 앞에서 깊은 혼란과 고뇌를 겪었고, 그 흔적이 이 작품 곳곳에 스며 있다.


이반 일리치는 '정상적인 삶'을 살아온 인물이다.


좋은 가문, 안정적인 직업, 체면 있는 인간관계. 사회적으로는 모범적인 생애였다. 그러나 죽음이 다가왔을 때, 그 모든 것은 그에게 아무 위로도 해답도 주지 못했다.


그가 평생을 쌓아온 것들은 죽음 앞에서 덧없고 공허한 껍데기로 변했다.


이반은 신에게 묻고, 자신에게 묻는다.


“왜 나인가?”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끝없는 침묵뿐이다.


육체의 고통은 점점 심해지고, 절망은 깊어진다. 그의 고통은 단순한 육체적 고통을 넘어선다.


삶 전체가 무의미했다는 인식.


그리고 그 인식을 더 이상 되돌릴 수 없다는 절망.


그것은 감각의 고통이 아니라, 해석되지 않는 사유의 고통이었다.


바로 이 대목에서 나는 톨스토이 자신의 두려움을 본다.


이반이 죽음을 ‘공허’로 인식하며 공황에 빠지는 장면은 너무도 생생하고 강렬하다.


그는 숨이 막히고, 의식이 사라지는 어둠을 상상하며 죽음의 ‘무(無)’를 직면한다.


그것은 단순한 문학적 상상이 아니다.


그것은 톨스토이가 노년에 겪었던 실존적 공황과 공백의 감각이 고스란히 투영된 순간이다.


그가 마주한 죽음은 단순한 '끝'이 아니라, 감각과 기억, 존재 자체가 완전히 사라지는 절대적 무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반은 고통 속에서 살아 있음을 느낀다.


그에게 고통은 더 이상 단순한 육체적 감각이 아닌, 존재의 마지막 흔적이었다.


그는 고통을 통해 '아직 살아 있다'는 실존적 실감을 붙잡았고, 역설적으로 고통이야말로 자신이 세계에 남아 있다는 가장 선명한 증거가 되었다.


그러나 작품의 마지막, 이반은 고통과 죽음을 분리한다.


그 순간, 죽음은 더 이상 공포도 끝도 아닌, 조용한 침묵으로 다가온다.


죽음을 해석하려는 시도를 멈춘 그때, 죽음은 해석 불가능한 공백이 아닌, 존재의 마지막 문턱을 넘어서는 과정으로 변모한다.


그리고 마치 플라톤이 말한 '선의 이데아'처럼, 죽음을 수용한 자만이 볼 수 있는 빛이 조용히 그를 감싼다.


많은 사람들은 이반이 마지막에 가족을 이해하고 용서를 구했기에 구원받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그저 자기 자신을 가식 없이 마주했을 뿐이다.


타인의 시선도, 도덕적 위안도 의식하지 않은 채, 죽음을 타인의 해석에서 벗어나 철저히 자기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을 뿐이다.


그는 더 이상 죽음을 의미로 포장하지 않았다.


그저 있는 그대로, 해석 없는 침묵 속으로 수용했을 뿐이다.


특히 마지막 장면에서, 이반이 내면적으로 죽음을 초월하며 '빛'을 보는 순간, 가족들은 여전히 “그가 두 시간 동안 끓는 소리를 내며 죽어갔다”고 회상한다. 이 대비는 분명히 말한다.


죽음은 철저히 주관적 사건이다.


타인은 오로지 외형만을 목격할 뿐, 죽음의 진실은 결코 외부의 언어로 포착되지 않는다.


그것은 각자의 내면에서만 경험되는, 침묵 속의 단독 여행이다.


이 소설은 철학적 선언이자, 동시에 톨스토이 자신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에 대한 사유 실험이다.


그는 이반을 통해 죽음의 공포를 마주하고, 그 공포를 극복할 길을 상상하며 이 글을 써내려갔다.


죽음은 논리로 증명되는 것이 아니고, 신학으로 위로되는 것도 아니다.


죽음은 해석되지 않는 공허함 앞에서 무릎 꿇는 감각의 사건이다.


그것이 내가 읽은 『이반 일리치의 죽음』의 본질이다.


죽음은 철학적으로 종말이고, 생리학적으로는 감각의 소멸이며, 윤리적으로는 책임 없는 순간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떤 식으로든 의미를 부여하든 말든, 죽음은 언젠가 도래하며, 그 누구도 예외가 없다.


결국 중요한 것은 '내가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일 뿐이다.


나는 오래도록 삶과 죽음에 대해 고민해왔다.


죽음은 끝이 아닌 존재의 침묵이며, 삶은 그 침묵에 이르기 전 감각과 의미를 붙잡고 고뇌하는 시간이라 믿어왔다.


삶은 예측할 수 없고, 때로는 극도로 부조리하며, 죽음은 그 모든 혼란을 강제로 멈추게 만드는 어떤 궁극의 정지점이다.


그렇기에 나는 죽음을 두려워했고, 살아 있는 동안에도 죽음의 그림자를 상상하며, 그 안에서 내 존재 이유를 찾으려 했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나에게 또 다른 방향을 일러주었다.


죽음을 이겨내는 방식은 그것을 논리로 정복하거나 의미로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태도에서 비롯된다는 것.


고통은 삶을 증명하는 가장 날것의 감각이며, 그 감각이 사라진 순간 비로소 우리는 죽음의 경계에 이른다.


나는 그 고통마저도 존재의 필연으로 수용하며, 삶을 해석이 아닌 감각으로 살아낼 것이다.


무엇보다 나는 이 작품을 읽으며, 죽은 톨스토이와 대화를 나누는 감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의 문장 곳곳에 스며 있는 죽음에 대한 인식과 공포는, 놀라울 만큼 나의 그것과 닮아 있었다.


죽음을 어른의 목소리로 들려주는 듯한 이 작품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그 물음은 단순한 상상이 아닌, 사유를 매개로 이어지는 교류의 경험이 된다.


톨스토이는 죽었지만, 그의 죽음은 문학이 되었고, 그 문학은 지금 살아 있는 독자인 나에게 삶을 건넸다.


나는 이제 이 작품을 단순히 감상한 것이 아니라, 그의 유언에 응답하며, 살아 있는 존재로서 내 문장을 건네고 있다.


삶의 진실은 타인의 시선이 아니라, 나 자신의 선택에 달려 있다.


죽음 앞에서는 모든 껍질이 무너지고, 나라는 존재만 남는다.


나는 가식과 체면의 껍질을 벗고, 내가 사랑하고 진심을 나누는 사람들과 정직하고 단단한 관계 속에서 살아갈 것이다.


때로는 흔들릴지라도, 나는 진심을 외면하지 않고, 살아 있는 채로 존재하겠다.


죽음을 두려워하되, 죽음에 끌려다니지 않으며.


삶을 붙잡되, 삶에 쫓기지 않으며.


빛은 어쩌면,


그 수용의 끝에서,


또한 삶의 가장 조용한 곳에서,


언제나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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