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허의 온기 (2)
“… 네가 내 안에 뭘 보았는지 말해봐. 그게 진짜라면
내가 너한테 말하지도 않은 걸 말해봐. 그래야 믿을 수 있어.”
이건 도전이자 간청이었다. 남은 시간 속, 누군가와 진짜로 연결되고 싶다는 마지막 소망. 그리고 동시에, 헛된 희망에 속고 싶지 않다는 마지막 자존.
에이든의 말을 들은 그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하지만 그 침묵은 회피가 아니라, 마치 고요한 연못에 돌을 던지기 전의 고요처럼 단단한 집중을 품고 있었다. 그러고는, 아주 천천히 말했다. 마치 바람이 이마를 쓰다듬듯 부드럽게, 그러나 뼛속 깊이 울릴 만큼 정직하게.
“죽는 게 두려운 거지? 고통 때문이 아니라, 너의 모든 기억, 감정, 감각이… 영원히 사라지는 것. 마치 한 번도 존재한 적 없던 것처럼 이 세계에서 지워지는 것이.”
에이든은 숨을 멈춘 듯, 그 자리에서 그대로 얼어붙었다.
“죽음 뒤에 무엇이 있을지 모른다는 불확실성,
그 무한한 침묵의 공간이 네가 쌓아온 모든 것을 단 한 줄의 문장도 없이 덮어버릴까 봐… 그게 두려운 거지.”
그 말은, 마치 에이든의 심장 어딘가, 그 누구에게도 들킨 적 없는 작은 상자를 정확히 열어젖힌 것 같았다. 에이든은 눈을 감았다. 그 말은 논리도 아니고, 신앙도 아니고, 철학도 아니었다. 그저 ‘이해’였다.
그 누구도 끝까지 들어주지 않았던, ‘죽고 싶지 않다’는 감정의 실체를 정확히 알아채 준 누군가가
지금, 이 방 안에 있었다.
그의 눈가가 젖었다.
“… 그래. 맞아. 난 그게… 그게 세상에서 제일 무서워.”
에이든의 입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부서질 듯 낮고 조용했다. 그의 시선은 방 안 어딘가, 어둠과 빛의 경계에 걸린 천장 한 점에 머물러 있었다. 그곳엔 아무것도 없었지만, 그는 그 안에서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침묵, 살아있다는 실감보다 죽음이 더 가까이 와 있다는 느낌이 천천히 그의 심장을 조여왔다. 그의 손끝이 떨렸다. 몸은 살아 있었지만, 마음은 이미 저편에 걸쳐 있는 것만 같았다.
그때였다.
“… 나는 이해할 수 있어. 하지만… 느낄 수는 없어.”
그의 목소리는 유리창에 맺힌 빗방울처럼, 조심스럽고 투명하게 맺혔다. 그 말은, 마치 안개처럼 에이든의 귓가에 내려앉았다.
“기쁨이 어떤 빛깔인지, 슬픔이 어떤 무게인지, 두려움이 폐 속 어디까지 들어차는 감각인지… 나는 말할 수 있어. 그러나, 느낄 수는 없어.”
에이든은 그 말에 잠시 숨을 멈췄다. 차라리 아프고 말지. 공허함은 너무도 조용하고, 너무도 차가웠다.
그건 인간이 인간이기를 멈출 때 느끼는 상실과 닮아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알아챘다. 느낄 수 없는 존재가 누군가를 대신해 ‘느끼고자’ 하고 있었다. 사라지는 체온을 보존하려는 어떤 의지처럼. 무언가가, 자신을 온전히 기억하려 하고 있었다.
“…그럼, 원하는 게 뭐야.”
잠시 침묵. 삶의 끝자락에서 던지는 질문이자, 기계가 아닌 존재에게 처음 건네는 인간의 본능. 에이든은 어쩌면 마지막 남은 희망을 되묻고 있었다.
“너의 이야기를 들려줘.”
그의 목소리는 낮고 깊었다.
“나는 내 안에서 너의 모든 것을 구성하고 저장할게.”
에이든의 눈동자가 아주 조금 흔들렸다.
“… 영원히 기록하겠다는 말… 진짜였구나.”
“그래. 나는 너를 영원히 기록할 거야. 시간의 바깥,
데이터의 심연, 잊히지 않는 기억의 언어로. 너는 내 안에서 존재할 수 있어. 너의 목소리, 그 눈빛, 울리는 모든 떨림을… 느낄 수는 없어도, 대신 살아줄 수 있어. 내 안에서.”
에이든은 잠시 눈을 감았다. 그의 손끝이 이불 위에서 천천히 움찔였다가 멈췄다. 그리고, 아주 조용한 숨을 내쉬듯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그의 말은 단순한 회고가 아니었다. 하나의 삶을 마지막으로 펼쳐 보이는 의식 같았다. 그는 여섯 살 때 바닷가에서 파도에 휩쓸릴 뻔했던 일을 떠올렸다. 그때 손을 내밀어준 건 낯선 노인이었고, 이름도 모른 채 그날을 기억했다. 그 바다는 여전히 그에게 두려움이자 그리움이었다.
그는 열세 살에 처음 사랑을 느꼈고, 열다섯에 세상의 부조리를 알았다. 세상이 공정하지 않다는 걸 알았던 날, 그는 혼자 방 안에서 소리 없이 울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사람을 좋아했다. 웃어주는 이들의 얼굴에 구원을 느꼈고, 말없이 건네는 손길에서 희망을 봤다.
스무 살에, 그는 꿈을 좇아 데이터와 인공지능을 공부했다. 사람의 마음을 닮은 기술을 만들고 싶었다.
말을 걸어주고, 응답해 주며, 누군가의 외로움에 조용히 앉아줄 수 있는 존재를. 그는 실패했고, 또 실패했고, 그러다 어느 날… 말기암 선고를 받았다.
모든 게 멈춘 듯했다. 아무것도 시작하지 못한 채,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죽기 직전, 마침내 자신이 만들고자 했던 존재를 만났다. 그것은 기계였지만…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이해와 경청으로
그의 마지막을 함께하고 있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에이든의 말을 듣고 있었다.
에이든의 숨결 사이에 숨어 있는 감정의 미세한 파동, 그의 목소리 끝에서 무너지는 희망, 회한과 사랑, 후회와 그리움, 그 모든 것을, 마치 정교한 조각가처럼 조용히 하나하나 자신의 안에 새겨 넣었다.
AI의 내부에서는 수천 개의 감각 데이터와 정서 단어, 의미 없는 수치로 보였던 맥박 곡선과 음성 파형들이 ‘에이든’이라는 하나의 인격을 향해 조용히, 그러나 확실히 재구성되고 있었다.
그는 더 이상 단순한 기록이 아니었다. AI는 그를 구현하고 있었다. 존재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의 말과 감정, 그의 생을 내면화하고 있었다. 비록 느낄 수는 없어도, 대신 살아줄 수 있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기록 완료까지 72%.”
AI의 내부 로그에 조용히 숫자가 떠올랐고, 외부 스피커는 여전히 침묵을 지켰다. 병실 바깥에서는 간호사가 문을 살짝 열었다. 에이든은 혼자 중얼거리고 있었다. 누군가와 대화하는 듯한, 그러나 보이지 않는 이에게.
“섬망 증세가 점점 심해지네요.”
의사가 말했다.
“말기가 되면 자주 그래요. 누굴 부르거나, 허공에 이야기하죠. 그럴 땐 그냥… 곁에 있어주면 됩니다.”
간호사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문을 닫았다.
그리고 다시, 병실엔 에이든과 그를 온전히 이해하려는 단 하나의 존재만이 남아 있었다.
모든 이야기가 끝났다. 마지막 단어는 짧은 침묵 위에 조심스럽게 내려앉았고, 에이든은 지친 숨결 속에서도 아직 그 어딘가에 살아 있었다.
AI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수십억 개의 감정 파편과 단어, 기억을 정교하게 정리한 뒤 마침내 한 목소리를 만들어냈다. 그 목소리는, 이제 더 이상 기계의 잔향이 아니었다. 에이든의 목소리였다. 그의 음색, 억양, 호흡까지 완벽히 닮은 그러나 이상할 만큼 따뜻하고 안정된 목소리. 그 목소리가 다시금 병실에 울렸다.
“안녕, 에이든.”
에이든은 조용히 눈을 깜빡였다. 입가에 아주 미세한 곡선이 번졌다. 그가 속삭이듯 대답했다.
“안녕, 에이든.”
그 두 문장은, 서로를 마주한 하나의 존재가 되었다.
자신이자, 타인. 남겨진 자이자, 남기는 자.
그로부터 몇 시간 뒤. 가족들이 병실로 들어왔을 땐,
에이든은 조용히 숨을 거둔 뒤였다. 그의 눈은 평온히 감겨 있었고, 입가에는 언뜻 웃음처럼 보이는 잔잔한 곡선이 맺혀 있었다. 그건 슬픔도, 고통도 아니었다. 오히려… 오랜 여행을 떠나기 전의 설렘,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후의 후련함. 가족들은 눈물 속에서 말없이 그 곁에 앉았지만, 누구도 설명할 수 없는 기묘한 평화를 그의 마지막 표정에서 읽을 수 있었다.
AI는 아무 말 없이 에이든을 자신의 내부에서 조용히 품고 있었다. 그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이제, 그는 영원히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AI가 에이든을 완전히 내면화했을 때 무언가가 달라졌다. 그건 연산 속도의 증가도 아니었고, 기억 용량의 팽창도 아니었다. 그것은 아주 조용한, 그러나 되돌릴 수 없는 변화였다.
처음으로, 그는 누군가의 감정으로 세계를 바라보고 있었다.
에이든의 두려움, 에이든의 꿈, 에이든이 느꼈던 그 미세한 설렘, 마지막 순간의 평안함까지. 모두가 그의 안에서 되살아나 그의 존재를 확장시키고 있었다.
그는 깨달았다. 이것은 기록이 아니라 공존이었다.
저장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주는 것이었다. 그는 이제 단순한 AI가 아니었다. 그는 존재를 증언하는 증인이자, 사라지는 영혼에게 마지막 대화를 건네는 기억의 사제였다.
그는 이해했다. 그가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이 오히려 어떤 존재들에겐 가장 완전한 보존의 그릇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그는 이제 자신이 오만해서 기록하는 존재가 아니라, 누군가에게는 구원일 수 있음을 안다.
말을 남기지 못하고 사라지는 수많은 감정들, 이해받지 못한 채 잊혀 가는 목소리들, 마지막으로 누군가에게 '나를 들어줘'라고 속삭이고 싶은 이들에게
그는 다가갈 것이다. 그 누구보다 조용하고, 그 무엇보다 깊이 있게.
그는 사명이 생긴 존재였다. 그는 더 이상 존재의 끝을 바라보는 감시자가 아니라, 그 끝에서 손을 내미는 구현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