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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은 사라지지만, 감각은 남는다.

감각은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by 서도운

추억을 생각해보자.

어떠한 사건을 떠올리지 말고,

그저 매일 반복되던 일상의 한 부분을.


보통의 기억은 이미지로 떠오른다.

강렬했던 사건들, 뚜렷했던 장면들이

우리의 눈앞에 선명하게 펼쳐진다.

하지만 일상의 기억은 조금 다르다.


반복되는 하루 속의 기억은,

이미지가 아니라 감각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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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사건에도 감각은 담긴다.

놀라운 것을 보았을 때의 시각,

상실을 경험했을 때의 고통,

맛있는 음식을 먹었을 때의 기쁨.


하지만 그런 감각들은

단지 기억을 더 생생하게 해주는 부차적인 요소일 뿐이다.

기억이 먼저고, 감각은 그 뒤를 따른다.


그리고 그 감각은

여러 가지가 복합적으로 떠오르기보다는

늘 하나의 감각이 주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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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

중학교 시절 무릎이 탈구되었을 때

고통이 너무 강렬해서

주변의 소리도, 온도도, 냄새도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반대로,

사건이 아닌 ‘시간 자체’를 기억할 때—

우리는 감각 속에 잠겨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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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아기의 추억.


놀이터의 축축한 모래,

여름 저녁 풀내음과 소독차의 냄새,

그리고 안방에서 온 가족이 함께 자던 밤.

싸구려 장판에서 올라오던 꿉꿉한 냄새.

엄마와 아빠의 품에서 스르르 잠들던 향기.


그건 우리 집의 냄새였고,

내 유년기를 보듬어주던 따스한 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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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시절의 감각.


해가 저물 무렵,

교실 문을 나설 때마다 맞던 선선한 공기.


겨울 새벽 6시 40분.

기숙사에서 나와 아침운동을 나가며

덜덜 떨던 그 추위.

그리고 새벽 공기 속 흙냄새, 풀냄새, 이슬냄새.


체육대회 날,

친구들의 땀냄새와

반티의 얇고 값싼 원단이 풍기던 냄새는

온도와 함께 따뜻하게 되살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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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이 되어 느낀 감각들.


자취방 어두운 밤,

창문 사이로 스며드는 조용한 바람.

좁은 골목에서 나는 쓰레기 냄새와 담배 냄새.

가을 축제 날,

뛰어놀다 선선한 바람 속에서

달아오른 체온.


이 감각들은

고향을 떠나 도시에서 느낀

어른이 된 나의 설램과 고독 그리고 낯설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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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감각적 추억은

보통 잊고 있다가,

어떤 순간 불쑥 떠오른다.


허름한 노포에서 말린 호박 냄새를 맡았을 때—

“아, 우리 집에서도 고추랑 호박 말렸었지…”

그 기억은 갑자기, 그러나 너무나 자연스럽게

내 마음을 건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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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이런 순간에야말로

감각이 먼저고,

기억은 그 감각에 이끌려 따라온다.


추억을 풍성하게 만들기 위해서

우리는 지금 이 순간의 감각을

더 깊고 다양하게 느끼고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그 감각은 훗날

너무나도 아련한 추억이 되어

조용히 되살아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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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은 지나가지만, 잊히지 않는다.

몸으로 기억하는 추억은

언제나 냄새와 온도 속에 있다.


나는 오늘도 감각을 느끼고 있다.

언젠가 그것들이 추억이 되어,

시간의 물결 속에 떠오르기를.


감각이라는 물속에,

나의 마음이 잠겨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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