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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동욱 Dec 17. 2023

너만의 롤모델을 찾거라.

아들이랑 읽고 싶어서 쓰는 한국사 (9) - 삼국시대를 연 건국 신화 1

한반도와 만주 일대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였던 고조선이 멸망할 즈음, 새로운 나라들이 일어났어. 수많은 소국들은 서로 정복전쟁을 벌이다 하나둘 사라지고, 마지막에 남은 나라들이 바로 고구려, 백제, 신라. 그리고 신라에 멸망당한 가야까지, 이른바 삼국시대의 주역이야. 이 나라들의 공통점은 뭘까? 자신만의 건국신화가 있었다는 점이야. 건국신화는 말 그대로 신화여서 문자 그대로 믿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그 당시 역사를 간접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단서들을 많이 제공해 주기 때문에 잘 들여다볼 필요가 있어. 지난번 얘기를 나눴던 단군신화처럼 말야. 그럼 그중에서도 가장 강성했던 고구려 건국신화부터 살펴보도록 하자.


고구려를 세운 주몽의 아버지는 북부여의 왕이자, 스스로 천제*의 아들이라 주장하는 해모수라는 사람이었어. 어머니는 강을 다스리는 신인 하백의 딸 유화였지. '나쁜 남자' 해모수는 유화를 유혹해 놓고는, 그녀를 홀로 두고 떠나가 버려. 화가 난 하백은 유화를 집에서 내쫓았단다. 버림받은 건 자기 딸인데, 아버지라는 사람이 참... 어쨌든 갈 곳 없는 유화를 데려온 사람이 동부여의 금와왕이었는데, 그녀를 별도로 마련한 궁전에 머무르도록 했지. 그런데 신기한 일이 일어나. 유화에게 햇빛이 몸을 비추더니 임신을 하게 되고 왼쪽 겨드랑이에서 큰 알을 낳은 거야. 이것을 괴이하게 여긴 금와왕이 알을 내다 버렸지만 개나 돼지들은 먹지 않았고 소와 말들은 피해 갔대. 게다가 새들이 날아와서 깃털로 품어주기까지 했다네? 내려쳐서 깨뜨리는 것도 실패하니 어쩔 수 없이 유화에게 다시 돌려줬지. 결국 한 남자아이가 알을 깨고 나왔는데 그가 바로 고구려의 시조 주몽이야. 주몽은 원래 활을 무척 잘 쏘는 사람을 부여에서 부르던 명칭인데, 활을 너무 잘 쏘아서 이름도 주몽이 되었다고 하네. 주몽이 워낙 무예도 출중하고 실력이 뛰어나니, 금와왕의 아들들은 무척 질투했대. 


결국 주몽이 목숨을 위협받는 상황까지 이르자, 유화는 주몽에게 동부여를 떠나라고 해. 주몽은 오이, 마리, 협부라는 세 친구와 함께 남쪽으로 내려가다가 엄호수라는 물 앞에서 가로막혔는데 뒤늦게 따라온 동부여 군사들에게 잡혀갈 위기에 처해. 이때 주몽이 물 앞에서 “나는 천자의 손자, 하백의 외손인데, 목숨을 위협받고 있습니다. 이를 어쩌면 좋을까요!”라고 말하니까 물속에서 물고기와 자라들이 나와서 다리를 만들어 주었다는구나. 그 덕분에 무사히 도망쳐서 졸본이라는 곳에 정착한 주몽이 나라를 세우니, 바로 고구려야.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이 있어. 고구려 건국에 얽힌 이 이야기가 부여의 건국신화와 쌍둥이처럼 닮았다는 거야. 북쪽에 탁리국이라는 나라의 왕을 모시는 시녀가 있었는데, 어느 날 임신한 것을 알게 되어 화가 난 왕이 죽이려 했대. 시녀는 달걀만 한 기운이 하늘에서 내려와 자기에게 오더니 임신하게 된 것이라 말하지. 일단 살려주지만 그녀가 아들을 낳자 그 아이를 돼지우리에, 마구간에 던져 넣어서 죽도록 내버려 둬. 그런데 오히려 돼지와 말이 그 아이에게 입김을 불어주며 보호해 주었다는 거야. 그 광경을 본 왕은 정말 하늘의 아들인가 싶어서 그 시녀에게 기르도록 허락하는데, 그가 훗날 부여의 건국시조가 되는 동명이야.


이렇게 성장한 동명도 주몽처럼 활을 무척 잘 쏘았대. 동명이 출중한 실력을 갖춘 청년으로 어엿이 성장하자, 왕은 동명에게 나라를 뺏길 수도 있겠다는 위기감을 느껴 죽이려고 하지. 이를 눈치챈 동명이 남쪽으로 도망치다가 엄호수라는 강 앞에 가로막혔는데, 활로 물을 치니까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만들어주어서 무사히 도망칠 수 있었다는구나. 그리고 부여를 세운 뒤 왕이 되었대.


어때? 고구려 건국신화와 부여 건국신화를 보니, 무슨 리메이크 영화처럼 거의 똑같아 보이지 않니? 심지어 주몽을 동명과 같은 이름인 동명왕이라는 시호*로 기록한 것을 보면 둘을 동급 인물로 숭상한 것으로 보이기도 해. 건국신화는 역사적 사실 그대로 전해진 것이라기보다 후대 사람들이 가공해서 만들어낸 이야기라 할 수 있어. 고구려 사람들은 왜 부여 건국신화를 가져와서는 자신들의 건국신화인 것 마냥 지어낸 것일까? 고구려 사람들은 그저 따라쟁이였던 걸까?


아빠 생각에는 고구려 사람들이 부여를 무척 동경*했기 때문이라 생각해. 쉽게 말해 고구려의 롤모델*이었던거지. 고구려가 이제 막 신생국가여서 국력이 약했지만, 부여는 당시 그 주변에서는 최고로 힘이 센 나라였어. 고구려는 하루빨리 힘을 키워서 부여처럼 강력한 나라를 만들고 싶었을 거야. 게다가 자신들의 뿌리가 부여에서 왔으니 더더욱 부여를 닮고 싶은 마음이 있었겠지. 고구려의 건국신화가 부여의 그것과 무척 닮은 배경에는 그런 고구려 사람들의 바람이 담긴 것은 아니었을까? 한 가지 흥미로운 건 이처럼 고구려 건국신화가 부여 건국신화와 매우 닮았지만, 해모수의 아들이라든지, 하백의 딸 유화부인 이야기라든지, 주몽이 알에서 태어났다든지 하는 부여 건국신화에는 없는 새로운 이야깃거리들도 여기저기 더해졌다는 사실이야. 아주 똑같이 베끼기만 한 것은 아니고, 나름 자신들만의 색채를 덧입혔다는 뜻이야.


너도 알다시피 나중에 고구려는 부여조차 뛰어넘어 동아시아 최강대국으로 성장하게 된단다. 만약 고구려 사람들이 주몽이 부여에서 핍박받았던 역사만 생각하며 "우리는 부여랑 무조건 반대로만 할 거야!" 이랬다면 어땠을까? 혹은 "우리는 뭐든지 다 부여랑 완전히 똑같이 할 거야!" 이랬다면? 부여와 반대로만 했다면 그들의 장점은 배우지 못해서 성장에 한계가 있었을 것이고, 부여랑 똑같이 따라 하기만 했다면 부여에서 갈라져 나온 아류* 국가로 그저 그렇게 명맥을 이어가다 멸망하지 않았을까 싶어. 고구려는 부여의 좋은 점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동시에, 그대로 답습하는데 그치지 않고 자신들만의 고유문화를 함께 채워나간 거야. 부여를 자신들의 뿌리로 여기면서도 그것을 뛰어넘고자 했던 진취적인 기상이 있었기 때문에, 고구려는 엄청난 성장을 거듭할 수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


고구려의 건국신화를 보며 아빠는 그런 생각을 해봤어.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은 나무가 빽빽이 들어찬 깊은 숲과 같아서 때로는 어디로 가야 할지 길을 잃고 헤맬 때가 있거든. 그때 누군가가 먼저 지나가면서 만들어놓은 길이 나있다면, 그 길을 따라가 보면 헤쳐 나오는데 도움이 된단다. 그 사람의 삶과 행동에서 배울 점이 있다면 그걸 내 것으로 만들어 보는 거야. 그러면 너 혼자 이리저리 헤매면서 낭비할 수 있는 시간과 노력을 훨씬 아낄 수 있는 거지.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이 살았던 삶을 무작정 그대로 똑같이 베끼면서 살아가는 게 꼭 정답은 아냐. 그렇다면 그 사람의 아바타처럼 살아가는 것일 뿐 너의 인생은 아닌 게 될 테니까.


지환아, 너만의 롤모델을 찾아 적극 배우거라. 롤모델은 꼭 한 사람일 필요는 없고, 꼭 네 주변 사람이 아니어도 좋아. 수 백 년 전에 살았던 이순신 장군이 너의 롤모델이 될 수도 있고, 세계 최고의 축구 선수가 너의 롤모델이 될 수도 있어. 그에게서 네가 닮고 싶은 점들을 찾고, 너만의 꿈을 만들어가는데 도움을 얻길 바라. 물론 그들도 사람이기에 모든 면에서 완벽한 사람은 아닐 수 있어. 혹시 부족한 점이 있더라도, 너의 성장에 도움이 될 만한 좋은 점만 보고 배우면 되는 거야. 그렇게 하나씩 배워나간다면 언젠가 그 롤모델마저 뛰어넘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거라고 믿어. 아빠도 너에게 그런 롤모델 중의 한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단다. 아빠가 적어도 네 앞에서만큼은 부끄럽지 않게, 당당하게 살아가려고 애쓰는 이유이기도 해. 아빠를 보고 자란 네가 아빠보다 더 훌륭하고 씩씩하게 잘 자라준다면, 아빠로서 그것보다 더 기쁘고, 감사하고, 보람 있는 일이 또 있을까?




* 천제(天帝) : 하늘의 지배자.  우주를 창조하고 주재한다고 믿어지는 초자연적인 절대자.

* 시호(諡號) : 제왕이나 재상, 유현(儒賢) 들이 죽은 뒤에, 그들의 공덕을 칭송하여 붙인 이름.

* 동경(憬) : 어떤 것을 간절히 그리워하여 그것만을 생각함.

* 롤모델(role model) : 자기가 해야  일이나 임무 따위에서 본받을 만하거나 모범이 되는 대상.

* 아류(流) : 독창성이 없이 모방하는 일이나 그렇게  . 또는 그런 사람.


#아들이랑읽고싶어서쓰는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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