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신동욱 Sep 02. 2024

2-2. 수치(羞恥)를 아는 마음

한자, <마음>에 대하여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끼는 감정을 수치심이라 한다. 심리학적으로는 '자신에게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과 가치가 없다는 것이 바깥에 드러날 것 같은 감정'을 일컫는다고 한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인정욕구가 있고, 그것이 어느 정도 충족될 때 삶의 보람과 기쁨을 느낀다. 회사에서 일 잘한다고 인정받을 때, 가정에서 사랑받는 남편이나 아내 또는 든든한 아빠 엄마로 존중받을 때, 친구들 사이에서 좋은 평판과 관계를 유지할 때 등등. 반대로 회사에서도, 가정에서도, 친구들 사이에서도 더 이상 내가 무가치하다고 느껴질 때 자존감이 무너지며, 삶도 무너져 내릴 수 있다. 


이러한 수치심이 지나치게 커지면, 급기야 삶의 의욕을 잃어버리는데 까지 나아간다. OECD 국가들 중 자살률이 가장 높은 나라는 다름 아닌 대한민국이다. 남성이 여성보다, 연령이 높을수록, 그리고 IMF 같은 경제위기 때 자살률이 높다는 통계는, 수치심이 경제력 또는 경제력에 대한 기대감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보여준다. 어찌 보면 우리 사회는 수치심을 권하는 사회다. 누구는 어떤 아파트에 산다더라, 누구는 어떤 자동차를 샀다더라, 누구는 연봉이 얼마라더라, 끊임없이 물질적인 잣대를 들이대고 서로를 비교하고 판단하는데 여념이 없다. 돈이 없으면 어딜 가든 제대로 대우받지 못한다는 두려움이 팽배해 있고, 그렇게 느끼는 수치심을 당연하듯 받아들인다. '돈 없으면 죽어야지'라는 한탄이 자연스럽다.


수치라는 단어의 한자를 살펴보면, 이런 수치심이 과연 정당한 것인가 라는 의문이 든다. '羞'(부끄러울 수)와 '恥'(부끄러울 치)는 모두 부끄럽다는 뜻을 가진다. 羞는 '羊'(양 양)과 '丑'(소 축)이 더해진 모양인데, 丑은 원래 손을 뜻하는 '又'(또 우)에서 왔다. 손에 양고기를 들고 있는 모양이 羞인 셈이다. 이것이 어쩌다 부끄럽다는 뜻을 갖게 되었는지는 명확히 알기 어렵지만, 양고기 하니 떠오르는 사자성어가 있다. '겉과 속이 다르다', 혹은 '비열한 행동을 한다' 등의 뜻을 가진 양두구육(羊頭狗肉)이 그것이다. 양고기를 파는 척하면서 개고기를 파는 모습이 손에 양고기를 들고 있는 척하는 듯한 羞를 연상시킨다. 스스로 부끄러운 행동을 하는 것, 그것이 羞의 의미가 아닐까 싶다.


恥는 '耳'(귀 이)와 '心'(마음 심)이 합해진 모양이다. 마음에 부끄러움을 느끼면, 귀가 빨개지는 모습을 표현한 한자라 볼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는 그 부끄러움이 겉으로 드러난다는 데 있다. 부끄러운 일을 하고도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면 귀가 빨개질 일이 없다. 이렇게 羞와 恥를 연결해 생각해 보면, 스스로 부끄러운 행동에 대한 자각이 바로 수치심이라 할 수 있다. 부끄러운 일이 부끄러운 일임을 스스로 깨달을 줄 아는 마음이 수치심이며, 이것은 사람이라면 당연히 가져야 할 마음가짐이다. 이것이 없는 사람을 일컬어 뻔뻔한 사람, 혹은 얼굴에 철판을 깐 철면피라고 부른다.


어느 시대든 뻔뻔한 사람들은 많았지만, 오늘날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진다는 느낌이 든다. 돈이 없는 건 부끄러워하면서도, 정말 부끄러워해야 할 행동과 잘못에 대한 수치심은 침묵하고 모르쇠로 일관하는 사람들 말이다. 뭐가 진짜 부끄러운 일일까. 돈 없는 게 부끄러운 일일까, 잘못을 하고도 끝까지 당당한 것이 부끄러운 일일까. 누구나 사람인 이상 부끄러운 일을 할 수는 있지만, 그 부끄러움을 자각하고 귀가 빨개진 사람을 찾는 것은 어려워진 세상. 그런 세상이야말로 진정 부끄러운 자화상이 아닐까.

매거진의 이전글 2-1. 존중(尊重)하는 마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