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 <마음>에 대하여
인간이 가진 가장 기본적인 감정 중의 하나가 공포다. 어렸을 때 <링>이라는 공포영화를 보다가 귀신이 TV 화면 밖으로 나오는 장면을 보고 공포를 느꼈던 기억이 난다. 낮잠을 자다가 깼는데 바퀴벌레가 내 머리 옆으로 지나가는 걸 봤던 기억도 꽤 선명하게 남은 공포다. 어릴 때는 귀신이나 바퀴벌레 따위가 무섭고 두려운 존재였는데, 나이가 들고나니 더 이상 그런 것이 대단한 공포심으로 느껴지지는 않는다. 다만, 삶의 좀 더 본질적인 문제로 인한 공포가 점점 더 커져가는 듯하다.
공포는 인류가 가진 가장 오래된 감정 중의 하나라고 한다. 사자처럼 날카로운 이빨도, 하마처럼 단단한 피부도 없는 인류가 맹수들에 둘러싸여 살아남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을 테다. 거대한 매머드 사냥을 위해 목숨 걸고 싸워야 했던 것도, 이 사냥에 실패하면 우리 가족이 굶어 죽을지 모른다는 것도 엄청난 공포로 다가왔으리라. 호랑이가 창궐하고 천연두가 수시로 유행했던 조선시대만 해도 호환마마가 가장 두려운 공포 중 하나였으니, 사람의 근본적인 공포심은 생존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공포(恐怖)는 '恐'(두려울 공)과 '怖'(두려울 포)로 구성된 한자어다. 恐은 '心'(마음 심)' 위에 '巩'(굳을 공)이 놓인 모습인데, 巩은 흙 다지는 도구인 달구를 들고 땅을 쿵쿵 내리치는 모습을 표현한다. 마치 극도의 공포심을 느낄 때 심장이 내려앉듯 쿵쿵 거리는 모습이 연상된다. 怖는 '忄'(마음 심)'과 '布'(베 포)가 결합된 한자다. 여기 쓰인 布는 단순히 한자음을 위한 용도이기 때문에 두려움이란 뜻과 바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다만 베 색깔이 흰색이라는 점을 연결 지어 내 맘대로 생각해 보면 연상되는 단어가 있다. 백수(白手)다. 어쩌면 이 怖라는 한자는 먹고사는 것을 걱정해야 하는 데서 오는 두려움을 표현한 한자는 아닐까.
20대 때는 아무런 가진 게 없어도 어쨌든 젊으니 뭐라도 할 수 있겠지 라는 희망이 있었고, 30대가 되어서는 회사에서 죽어라 일하느라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그렇게 어느새 나이가 마흔이 넘고 보니, 이전에는 잘 느끼지 못했던 공포심이 점차 자라나기 시작한다. 아직 갚을 빚도 많고 어린 아들 녀석이 대학 가려면 시간이 한참 남았는데 난 언제까지 회사를 다닐 수 있을까, 언제까지 돈을 벌 수 있을까, 언제까지 가족의 생계를 온전히 책임질 수 있을까, 그런 불안감이 점차 커지며 공포가 되어가는 듯하다. 사람의 근본적인 공포심은 생존 문제와 직결되어 있음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다만, 공포심이나 불안감에도 순기능은 있다. 공포를 느끼면 스트레스 호르몬인 아드레날린이 분비된다. 아드레날린은 심박수와 혈압을 증가시키고 근육을 긴장시키며, 호흡을 빨리 하도록 해서 감지된 위험에 대처할 수 있도록 돕는다. 생존본능이 극도로 발동된 인간은 순간적으로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공포심은 사실 절망에 빠지도록 만드는 감정이 아니라, 절망에서 벗어나도록 대처하려는 알람인 셈이다. 그리고 동시에 이 두려운 순간을 어떻게든 극복해 보겠다는 절박함이기도 하다.
절박함이나 공포심이 그리 유쾌하지 않은 감정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 사실도 인정하도록 하자. 절박함을 느낄 줄 아는 사람만이 성장할 수 있으며, 공포심을 극복해 내는 사람만이 더 단단한 내면을 갖게 된다는 사실을 말이다. 교감신경과 부교감신경이 균형을 유지할 때 건강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처럼, 내면에 있는 공포가 터져 나올 때마다 그로 인해 분출되는 아드레날린을 제대로 활용해 보도록 하자. 원래 인생 자체가 매일매일 살아가기 위한 사투의 연속 아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