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신동욱 Sep 15. 2024

2-8. 처량(凄涼)한 마음

한자, <마음>에 대하여

처제가 집에 놀러 와서 아내와 둘러앉아 담소를 나누다가, 요즘도 작가 활동하고 있냐는 질문에 답했다.


"요새 회사 일이 너무 바쁘고 정신없어서 글은 잘 못 쓰고 있지만, 강의 들어오는 건 꾸준히 하고 있어. 이번에 강의료 얼마가 들어와서 YK(아내 이름)가 좋아하더라. YK는 내가 돈 벌어올 때만 나 좋아해 줘."


내가 농담을 하자 아내도 농담으로 받아친다.


"그럼, 당연하지. 돈 없으면 같이 살지 말자~"


즐거운 분위기 속에 아무런 악의 없이 장난스럽게 나눈 대화지만, 정말 내가 돈을 전혀 못 벌게 되는 상황을 잠깐 상상해 봤다. 세상이 많이 바뀌었다지만 그래도 '돈은 남자가 벌어와야지'라는 인식이 강하게 남아있는 대한민국 사회에서 가장의 역할을 맡은 남자가 경제력을 상실했을 때 느끼게 될 그 감정을 뭐라 표현할 수 있을까. 아마도 그것은 '처량함'이 아닐까. 공교롭게도 '처량'이라는 단어의 한자를 보면, 그런 감정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처량(凄涼)은 '凄'(쓸쓸할 처)와 '涼'(서늘할 량)으로 만들어진 단어다. 쓸쓸하다는 뜻의 凄는 '冫'(얼음 빙)과 '妻'(아내 처)가 결합된 한자다. 얼음처럼 차갑고 쌀쌀맞게 대하는 아내를 볼 때만큼 쓸쓸한 것이 또 있을까. 인터넷에서 본 블랙유머가 있다. 남자가 집에만 있으면서 밥 세끼를 다 먹으면 삼식이, 밥 세끼에다 간식까지 챙겨달라 하면 간나세끼, 거기다 야식까지 챙겨 먹으면 종간나세끼라 한다고. 정말 그런 눈초리로 보는 아내도 있을 수 있겠지만, 이 유머는 남편 스스로 그렇게 느끼는 마음을 표현한 것이리라. 회사에서는 이사님, 부장님 소리를 들으며 대접받던 남자가 어느 날 실직해서 집에만 있게 되고 아내를 볼 낯이 없게 되었을 때, 괜스레 凄라는 한자처럼 아내의 눈빛이 차가워진 듯하고 쓸쓸함을 느끼게 되는 것은 아닐까?


涼은 '氵'(물 수)와 '京'(서울 경)이 더해진 한자인데, 京은 본래 높은 정자의 모습을 본떴다. 더위를 피해 강물 옆에 지은 시원한 정자에 앉아 있는 모습에서 서늘하다는 뜻이 생겼다. 그렇지만 京이 서울이라는 뜻인 걸 연관 지어서 서울에 흐르는 큰 강인 한강 앞에 홀로 우두커니 앉아있는 모습을 떠올려 보자. 이 한자 역시 쓸쓸한 느낌을 준다.


어느 날 갑자기 명예퇴직 통보를 받은 사실을 차마 집에 말하지 못하고, 여느 날과 다름없이 양복을 입고 출근하듯 집을 나섰다가 딱히 갈 곳도 돈도 없어 홀로 한강 벤치 앞에 처량하게 앉아있다가 퇴근 시간에 맞춰 집에 들어가는 어느 한 가정의 가장인 아버지, 그리고 남편. 그들이 차마 실직 사실을 집에도 말하지 못한 이유는 凄처럼 차갑게 반응할지 모르는 아내를 볼 자신과 면목이 없었기 때문이리라. 이것이 어느 소설에서나 등장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사실이 무척 슬프게 다가온다. '처량'이라는 단어가 사실 알고 보면 이렇게 슬프게 다가온다.


처량한 마음이 드는 가장 큰 이유는 결국 사랑하는 가족의 지지를 잃게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온다. 그것이 돈 때문이 되었든, 또 다른 이유 때문이 되었든. 심리적으로나 물리적으로 가족과 떨어질 때 처량함을 느끼게 된다면, 그 처량한 마음을 이겨내는 힘도 결국 가족으로부터 온다. 혹시 아내의 눈빛이 정말 凄처럼 싸늘해졌다면, 그 이유가 반드시 경제적 이유 때문만은 아닐 수 있다. 처량한 감정을 느끼기 싫다면, 妻에 冫이 더해져 凄로 돌변하기 전에 잘 살피도록 하자. 그것은 남편뿐만 아니라 아내에게도 마찬가지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