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블로그와 글을 돌아보며: 장하다. 잘 자라주었다.
가끔 새벽까지 잠이 오지 않을 때가 있다. 오늘이 그랬다. 뭘 할까 하다가 브런치의 권유대로 '서랍장의 글을 꺼내'기 위해 옛날 블로그들을 둘러보았다. 지금도 책상 위에 꺼내놓을만한 수필을 찾기 위해서. 썼던 글이 많아 둘러보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결과는 의외였다. 재업로드 할만한 글은 4편 남짓에 불과했다. 잘 썼지만 너무 사적인 글, 좋은 소재지만 정말 짧은 글 등의 '아차상'도 얼마 안 됐다. 독자들과 더 나누지 못해 참 아쉽다. 한편으론 감사하다. 즐거운 기회가 생긴 거니까. 열심히 써놓기만 했지, 차분하게 전부 다시 읽어본 게 언제였더라? 거의 처음이 아닐까?
다시 보면서 다양한 기분을 느꼈다. 대개는 피식 웃었다. 가끔 감탄했고, 어떤 것들은 부끄러워서 킥킥거리며 '아이고..' 소리를 냈다. 반면 어떤 점은 현재의 내가 어릴 적 나에게 배웠다. 간혹 옛날 신념을 마주하기도 했다(몇몇 생각은 심지어 정반대). 청소년 특유의 무서운 혈기+작가라는 꿈+자아정체감 형성기의 미숙함 등 다양한 요소가 맞물려 재미난 모양을 빚어냈다. 둘러보기를 막 마친 지금, 묘한 만감이 교차한다. 공통점을 추출해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기특허구먼'이다. 열심히 살았네. 치열하게 썼네. 허허. 잘 자랐다.
서랍 속에서 나와 책상 위에 펼칠 글이 적은 건 당연하다. 세월이 흘렀으니까. 정작 그 시간을 흘러 온 나는 잘 알지 못했는데, 생생한 기록을 보며 와 닿는 차이를 느꼈다.
가장 먼저 글 내용과 공개 정도 차이가 있다. 그 당시엔 속 이야기를 거의 날것 그대로 쏟아냈다. 전체공개로. 심지어 '검색허용' 되어 있다. 지금은 민감하다 싶은 내용은 철저히 비공개로 돌리는데. 다행히 블로그를 닫으면서 전부 비공개로 돌렸다만, 참 난처했다. 비유하자면, 가려서 해야 할 말도 고래고래 소리 질러 이야기한 꼴이니까. 블로그에 방문자가 더 많았으면 하는 욕심이 컸나보다. 그래야 더 많은 사람들이 읽고 소통할 가능성도 높아진다고 생각했으니.
두번째로, 서술의 차이를 느꼈다. 어른스럽게 하려고 애쓴 흔적이 많이 보였다. 소위 '중2병'도 많이 나타난다. 다시 보니 입 찢어지게 웃기지만, 그땐 눈 동그랗게 뜨고 열심히 자판을 두드렸으리라. 매우 진지하게. 그 영향 때문인진 몰라도 글이 읽기 조금 거북하다. 조사 남발, 부자연스러운 연결 등등. 과거에도 지금도 문학적 글쓰기를 따로 배운 적이 없다. 하지만 예전보단 지금이 훨씬 낫다.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큰 변화는 고등학생 때 생겼다고 본다. 대입준비로 논술도 했는데, 학교 학원 등에서 받은 첨삭지도가 도움이 된 모양이다. 물론 평소에도 꾸준히 글(대개 일기)을 썼으니 가능했던 열매겠지?
지금 끼적이는 낙서와 한 문장. 오늘 쓰는 이 글 한 편. 다 쓴 글을 몇 번이고 다시 보며 거듭하는 퇴고. 새로운 글을 쓰기 위한 관찰과 고민. 다시 쓰고, 고치고, 쓰고, 고치고.. 성과는 바로 나타나지 않는다. '자꾸만 글을 쓰고, 더 잘 쓰기 위해 고심하는 게 나와 세상에 무슨 변화를 일으킬까?' 싶기도 하다. '빨리빨리'와 보이는 성취가 중요한 분위기 속에서, 이따금 흔들리기도 한다. 괜히 에너지 쏟는 거 아니야? 이 방법이 맞는 건가?
낙숫물이 바위를 뚫는다는 흔한 예화가 있다. 혹은 눈송이가 쌓이고 쌓여 큰 나뭇가지를 부러뜨린다는 예화도 자주 인용된다. 정말 흔하디 흔한 비유지만 그게 진짜니까. 작고 꾸준한 노력이 지닌 위력을 가장 명료하게 보여주니 거듭 화자된다. 옛 블로그와 거기 고이 간직된 글을 훑으며 이 흔한 비유가 얼마나 정확한지를 가슴으로 느꼈다. 나는 분명히 예전에 비해 성장했다. 생각보다 꽤 많이. 어제 내딘 작은 발자국 하나. 오늘 내딘 작은 발자국 하나. 그 자취가 쌓이고 쌓여서 나는 어느 샌가 이만큼 멀리 나아왔다. 앞으로도 더 나아갈 거고!
잠을 설치다 시작한 '서랍 정리'는 기대에 비해 만족스럽지 못했다. 하지만 정리 과정 자체가 무척 즐거웠다. 기특하다. 장하다. 잘 자라주었다. 매순간 최선을 다했다는 걸 마음이 먼저 알기 때문에 더더욱 기쁘다. 성경에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시편 126:5)라고 했는데. 지금 심경을 표현하는 딱 알맞는 말이다.
오늘도 글을 쓴다. 이 글도 서랍 속에 간직되겠지. 먼 훗날 서랍을 열고 꺼내었을 때, 이 속에서 한껏 미숙한, 혹은 성숙한 나와 마주하기를 기대해본다. 그렇게 나와 내가 만나고, 서로를 더 알아갈 수 있기를. 우리의 만남을 통해 나와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세워갈 수 있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