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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류아 Sep 01. 2015

거기 머물러줘서 고마워..

미안해. 이제 널 외면하지 않을게.

"잊고 있던 작가의 꿈을 펼쳐보세요."

  어쩌다 들어온 '브런치'에서 마주한 문장. 그리고 동시에, 모니터 앞에서 얼굴을 파묻고 어린아이처럼 울기 시작했다. 머릿속으로는 '어.. 왜 이러지?'라고 생각하면서. 눈물을 닦고 차분히 생각하려다가 다시 눈물 짓고, 고개를 들어 신청 창을 누르려다가 다시 깊은 울음을 토해냈다. 마음이 진정되고 나서야 깨달았다.

 아아, 너는 그대로 살아 있었구나..


거기 머물러줘서 고마워..


 내 프로필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예전엔 문청(文靑)." 문학에 대해, 문학 창작에 대해 뜻을 가진 청년을 지칭하는 '문청'. 한참 글을 쓸 때는 아직 청년이 아니었다. 그래서 문학소년/문학 청소년이란 의미로 스스로를 문청이라 칭했었다. 문청!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뛰고 기쁜 단어였다. 문학 한다는 자부심이 있었고 늘 세상을 다른 관점에서, 좀 더 아름답게 보려고 노력했었다. 세상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좋은 글이 나온다고 생각했으므로.


출처: http://transartist.tistory.com/


 책을 늘 가까이 했고, 생각구름이 뭉게뭉게 피어나며 글감이 떠오를 때마다 노트에 적고, 좋은 글이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하고, 어떻게 퇴고할지 고민하고.. 그런 생활을 반복했다. 중3 때 시작해서 고3 때까지 약 3년 동안, 매 순간마다 그렇게 살았다. 임정희의 <Music is my life>라는 노래를 들으면서 입속으로 "문학 is my life~"하며 흥얼거리곤 했다.

 16살에 '불과'했지만, 그 나이 나름대로 외로움과 괴로움, 방황 등으로 갈가리 찢긴 마음을 안고 살았다. 사는 게 무척 힘들었다. 가정, 친구들, 좋은 환경 등이 있었지만, 심연에서 우러나오는 깊은 고독이 해갈되지는 않았다(어른들이 범하는 가장 큰 오류는, 자기보다 어린 사람들의 마음을 멋대로 재버리는 데 있다.).


 찢긴 마음을 위로하려 하릴없이 헤매다가 발견한 자그마한 출구가 '문학'이었다.

 종이 위에서 펜을 쥐고 있는 나는 자유로웠다. 나는 나를 조금씩 알아가게 되었다. 하고 싶은 말을 마음껏 했고,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아도 좋았다. 쓰고 싶을 때 쓰고 읽고 싶을 때 읽으며,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만 두어도 좋았다. 새로 쓰고 싶으면 새로 썼다. 괴로움을 글 위에서 없애버리기도 하고, 외로움을 해소하기도 하고, 불안함을 잠재우곤 했다. 몇 년 전부터 키워오던 짝사랑에 대한 마음도 글 위에서 춤을 추었다. 좀 더 섬세한 몸짓으로.

 차츰 일기장 밖으로 걸어나왔다. 글을 지인들과 나누고, 인터넷으로 공유하기 시작했다. 주로 마음과 감정을 다독이려 글을 썼고, 어느 순간부터 한 두 사람을 시작으로 공감하며 응원하는 독자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지나가다 덧글을 남긴 나그네부터, 정식으로 자신을 소개하고 때때로 대화를 하게 된 사람들까지.. 세상과 그리고 사람들과 글을 통해 마주하면서, 작가라는 꿈을 가지게 되었다.


출처: http://blog.ohmynews.com/kim29/

 하지만 에너지는 차츰 고갈되기 시작했고 고3이 되었다. 주변에서는 내가 당연히 작가가 될 거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 무렵부터 사정없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나보다도 훨씬 글 잘 쓰는 인재들이 널리고 널렸음을 마주한 건 둘째 치고, 스스로가 지쳐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문학이 외로움, 괴로움, 불안 등 존재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아니라는 걸 서서히 느끼게 되었다. 더 빠르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결정적으로,  사랑받고 싶은 간절함이 극단에 이르렀다. 매 순간 좌절 속에서 몸부림쳤다. 처절하게.



 그간 열심히 살아왔던 흔적을 대학에게 내보였다. 하나하나 자식새끼 같은 작품들을 '작품집'으로 단정하게 편집해서 보냈다. 결과는 1차에서 탈락. 나는 울지 않았다. 대학에 떨어지는 건 문제가 아니었다. 알고 있었다. 나보다도 글을 좋아하고 잘 쓰는 애들이 널려 있다는 걸. 또 수능 등의 다른 방법으로도 대학은 갈 수 있다. 단지 스스로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던 거다. 합격이 되든 안 되든, 문청으로서의 마지막 순간.

 그 순간을 마주했을 때, 다만 안도하면서, 희미하게 타올랐던 마지막 불빛을 가만히 꺼버렸다. 그리고 "문학이 내 삶"이라며 기쁘게 흥얼거렸던 어린아이를 불렀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 아이도 울지 않았다. 희미한 쓴웃음을 지으며 퇴장할 뿐이었다. 나도 모르는 아주 깊은 마음속으로.


 이후부터 지금까지 글쓰기를 포기하지 말라는 지인들의 권유를 들으면, 가만히 웃으며 말하곤 했다.

"예전엔 문청."

그 아이가 남긴 말이기도 했다.


 지금은 작가를 시켜줘도 안 한다고, 내 과거를 아는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곤 한다. 그때 그만한 에너지가 내게 없거니와, 작가가 그렇게 녹록지 않은 업이라는 걸 어렴풋이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적어도 글쓰기를 관두지는 않으련다. 전문작가 말고 '글 짓는 사람'인 '작가(作家)'는 되련다.

 그때 내 마음 뒤안길로 쓸쓸하게 걸어갔던 어린아이는, 그때 그 순수함 그대로 다시 가슴속에 나타났다. 사라지지 않고, 마음 한구석에서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다.


"잊고 있던 작가의 꿈을 펼쳐보세요."


- 미안해. 이제 널 외면하지 않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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