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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류아 Aug 25. 2020

수술, 인생, 그리고  어느 날의 산행

이젠 더 이상 주눅 들지 않아요.

꽃 피듯 살아 온 인생, 꽃 지듯 살다 갈 인생.
돌아보니 아름다웠던 인생,
이젠 미련이 없네.

- MC스나이퍼(Feat. 웅산), <인생>(2012)

2020년 라이브. 저 부분은 1분 35초에.


몇 달 전, 아킬레스건 연장 수술을 받았습니다.

 커다란 외고정장치를 박았다 떼야 하는. 최소 1년은 제대로 못 걷는, 아주 큰 수술. 평생에 걸쳐 응어리진 "원한" '살짝 불편한 다리'를 개선하기 위해, 큰 결단을 감행했던 거죠. 이에 이르기까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수술 여부 결정까지 몇 개월,
진료. 주치의 선생님과 상의하며 날짜를 헤아린 몇 개월.
수술동의서에 서명하던 전날 저녁,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아 끊임없이 뒤척였던 새벽.
수술실 앞에서 애써 마음을 추스르며 기다린 십여 분.
수술대. "심호흡하세요."하는 말을 마지막으로 끊어진 의식.
뿌옇고 흐릿한 천장만 기억나는, 병실로 돌아가는 침대.
수술 받은 날 새벽 내내 지속된, 끔찍한 고통.
퇴원하고도, 너무 아픈 탓에 자고 싶어도 못 잔 몇 주.
재활. 휠체어에 앉아 몇 달, 또 목발 생활 몇 달..

...

 이 모든 긴 기다림. 사이사이, 순간순간마다 느낀 온갖 복잡한 감정들. 아주 구체적인 통증 하나하나. 잘 익은 포도송이마냥 알알이 기억납니다. 심지어 일부는, 머리보다 몸이 더 잘 기억합니다. 어쨌든 다 통과했어요. 이젠 걸어다닙니다. 아직 온전하진 않지만요.



수술 정보와, 이에 얽힌 사연(원한)을 담은 편지를 썼었다.

 수술 몇 주 전, 친구들과 지인들 앞으로 편지를 한 통 썼었어요.

 언제 어떤 수술을 하며, 그 후엔 어떻게 좋아지고. 그런 정보를 서두에 배치. 뒤이어 수술 부위(다리)에 얽힌 사연(사실, '사연' 보다는 '원한'怨恨 [억울하고 원통한 일을 당하여 응어리진 마음] 이 좀 더 정확한 표현일듯.)을 쭉 풀어 전했죠. 어린시절부터 켜켜이 쌓여 온 상처, 좌절, 아픔, 슬픔, 고통..

 그러나 단순히 한풀이만 하진 않았어요. 수술을 통해 이 모든 짐과 작별했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소망을 구체적으로 담았던 글을 썼습니다. 편지 말미에 적은 한 문장 속에 응축했어요 :

이번 수술 그리고 재활이, 몸뿐만 아니라 마음과 영혼을 치유하는 큰 전환점, 나아가 시작점이 되기를 소망해봅니다.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진다'는 말을 믿으시나요? 저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습니다. '그렇대.', 참고 하는 정도입니다. 그런데 위의 문장을 쓰던 순간만큼은, 참고가 아닌 '진실'이길 바랐습니다. 수술 후 재활 가운데 저 소망을 계속 상기했습니다. 하지만..


'이전과 별 차이 없는 거 아닐까?'

최근에, 이런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어요. 아예 못 걸었을 땐 머릿속에 없었는데, 걷기 시작하니 불쑥 등장. 스멀스멀 자라더니 마음 한가운데 묵직하게 자리 잡았습니다. 그리고 얼마 전, 부모님께서도 같은 생각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신다는 걸 알았습니다.

 걱정으로 머리가 아팠습니다. '아.. 적잖은 시간과 비용은 물론이거니와, 큰 고통을 치렀고, 여전히 진행 중인데. 바로 곁에서 수발하며 지켜본 부모님의 고생 또한 나 못잖은데.. 이전과 다를 바 없다면?' 마음이 흉용하게 날뛰며, 힘겨웠던 지난 세월이 다시 짓쳐들어 왔습니다. 무척 괴로웠어요. 한동안 다소 우울하게 지냈습니다.



그리고 며칠 전부터, 에 가고 싶어졌어요. 불현 듯.

 산에 간다니? 평소엔 근처에도 안 가는데. 무슨 바람이 불었나 싶었습니다. 그러나 이내,

 '아, 그래. 머리 좀 식히자. 적당히 땀도 흘리고.'

 마음이 워낙 어수선한 까닭이리라 여기고, 집 근처 산을 알아봤습니다.


산 가는 날 아침, 갑자기 노래 가사가 맴돌다.
꽃 피듯 살아온 인생, 꽃 지듯 살다 갈 인생.
돌아보니 아름다웠던 인생, 이젠 미련이 없네.

신기하게도 산 가는 당일 아침, 노래 <인생>, 위의 가사가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습니다. 울림을 주는 노래라 평소에도 가끔 생각나긴 했는데, 이토록 선명히 떠오른 건 처음이었어요. 너무 당황스러워 피식 웃었습니다.

 갸우뚱 갸우뚱 하면서도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며 작게 흥얼흥얼. 차창 밖으로 흐르는 풍경에 얹어서 또 흥얼얼. 랩 부분은 어려워서 못하고, 딱 저 부분만 계속 웅얼웅얼. 머릿속 한 켠에선 '왜 이 구절이 계속 맴도는 거야?' 끊임없이 질문. '글쎄.. 왜지?' 풀리지 않는 난제.


참 좋았다. 천천히 거닐었다.

 도착한 산은, 기대 이상으로 수목이 우거졌습니다. 산책로도 잘 되어 있어 산림욕을 한껏 즐겼습니다. 외부연결을 잠시 끊은 채, 수목들이 힘껏 뿜어내는 향과 공기를 음미했어요. 마음이 이상하리만치 차분해졌습니다. 정신도 명징해지고. 잘 닦인 산책로를 천천히 거닐었습니다.

 제법 걸으니 수술부위에 뜨끈뜨끈, 열감이 생겼습니다. 의자에 앉아 다리를 물끄럼 쳐다봤습니다. 이윽고 지난 세월을 회상했어요.


나무의자에 앉아, 수술부위를 바라보며 지난 삶을 회상하다.

 남들과는 유별나게 다른 어린 시절. 악의 가득한 또래 아이들의 놀림. 번번이 좌절했던 체육시간과, 걸핏하면 넘어지던 일상. 쉽게 피로해지는 몸, 날 떠난 적이 없는 미세한 통증. 해방되고 싶어 맞춤신발도 신어보고, 재활치료도 받아보고.. 비용과 시간, 온갖 고생 고생, 고생.

 그러나 지난 세월 숱한 재활치료는 생각만큼 잘 되지 않았으며.. 이따금 눈물로 지샜던 낮과 밤. ‘도대체 왜?’ 하늘에 그리고 일기장에 숱하게 던진 질문들.. 나무의자에 걸터앉아 회상하며, 시선은 다리에 머물렀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마음 한가운데 맺힌 인생 파노라마를 직시했습니다. 아주 무겁게 재생되는..

 마음 어디선가 굉음과 함께, 미친 듯 소용돌이가 일었습니다. 분노, 슬픔, 좌절.. 아직까지도 해결되지 않은, 수용하지 못한, 지난 나의 삶. 그 속에서 여전히 살아 숨 쉬는 온갖 감정들. 머리가 너무 아팠습니다.


 잠시 심호흡했다가, 이번엔 수술 및 재활 기간을 다시 떠올렸습니다 : 수술대에 오른 순간. 마취 풀린 후 찾아온 통증. 잠드는 게 소원이었던 몇 주. 너무나 무거웠던 외고정장치. 화장실 문으로부터 변기가 그렇게 멀다는 걸 처음 알았고.. 부모님의 헌신적 간호. 연락 오거나 집으로 찾아와준 몇몇 친구들. 장치를 제거하러 다시 오른 수술대. 목발 짚고 다시 일어선 순간, 목발 없이 내딛은 첫발.. 시나브로 좋아지며, 지금.


 갑자기, 모든 순간이 물 밀듯 밀려들어왔습니다. 뒤이어 나도 모르게 흥얼거렸습니다.

 "꽃 피듯 살아 온 인생, 꽃 지듯 살다 갈 인생.
돌아보니 아름다웠던 인생, 이젠 미련이 없네."

 

순간 뭔가 기뻐서, 생긋 웃었어요. 아주 분명하게.

그리고 수술부위를 가만히, 여러 번, 쓸어주었습니다.

진심으로 격려하는 마음을 담아.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

 끊임없이 맴돌던 노랫말은 사라져 버렸습니다. 대신, 유쾌한 기분으로 한껏 웃었습니다.

 안 그래도 인생 자체가 쉽지 않은데, 저는 살짝 유별난 다리 때문에 더더욱 힘겨웠어요. 마침내 수술을 했어도 여전히, 인생은 쉽지 않겠죠. 하지만 괜찮아요. 저는 그리고 부모님은, 최선을 다했습니다. 이 선택을 후회하지 않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살아왔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살아갈 테니까.

 위에서 제가, 살아온 '사연' 보다 '원한'이라 표현했는데, 그런데 돌아보니 참 아름다웠어요. 원한으로 점철되지만은 않았습니다. 미련 없다고까진 고백 못하겠고, 그냥, 나름 괜찮았어요. 지금의 나는 그 모든 과정 끝에 빚어지기도 했구요.

 앞으로도 온갖 쓴뿌리와 고통이 여전히 저를 괴롭히겠지만, 네. 차츰 옅어질 거에요. 그리고 마침내 온전히, 괜찮아질 거에요.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그런 확신이 차올라서, 싱글벙글 웃었어요.


비록 여전히 다리는 뜨끈뜨끈 아프지만,

이젠 더 이상 주눅 들지 않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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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독자님께 열려 있습니다 ^^


사진 출처(이하 작가명):

http://pixabay.com  

표지 및 마지막 : "pexels"

1번 : "Pezib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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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번 : 김세환

4번 : 직접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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