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글은, 삶을 조화롭게 재구성하여 특별하게 간직하는 훌륭한 방법이다. 완성된 글과 그 안에 담긴 이야기는, 앞으로 두고두고 다른 이들과 나눌 수 있다. 백 마디 말 보다 한 편의 글이, 나와 타인의 거리를 확 좁히기도 한다. 깊이 있는 대화를 가능케 한다. 혹시 아는가? 나중에 누군가와 이 글을 매개로 이야기하게 될지.
자. 선물이야.
서프라이즈!
외국물을 먹으며 전 세계를 누비는 친구와의 재회. 만나자마자 그가 비닐봉지째 건넨 것은, 미국산 프링글스였다. 이번엔 사달라고 따로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매니아인 내가 틀림없이 좋아하리라는 걸 알고 준비해주다니! 감개무량했다. 보자마자 싱글벙글, 나도 모르게 까르륵 즐거운 웃음이 터졌다.
‘감자칩 그거 짜고 건강에 하나도 안 좋으니 그만 좀 먹어.’라는 어머니 음성이 잠시 스쳤지만, 누가 막으랴. 게다가 어린시절 처음 경험한 맛과 가장 근접한, 미국산인데.
프링글스에 관한 최초 기억은 9살 즈음이다.
당시 아버지께서는 종종 퇴근길에 동네 슈퍼에 들러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과자(*치토스. 오리온에서 유통한 시절. 안에 든 따조.딱지 등을 수집하는 재미가 쏠쏠!)를 한 봉지씩 사오시곤 했다. 겨를이 없어 들르지 못했거나, 살 게 많거나, 산책을 함께 하고 싶으면, 집으로 와 나를 대동하여 함께 가셨다. 아빠 손 잡고 슈퍼 가는 날은, 이것저것 다른 과자를 샀다.
어느 날 눈에 띈, 빨간 원통 과자.
그리고 어느 날, 봉지과자가 아닌 큰 빨간 원통 과자가 문득 눈에 들어왔다. 덜컥 집어 사달라고 했다. 아버지는 단칼에 거절하셨다. “크고 비싸잖아. 다른 거 두 봉지 사줄게.” 당시 과자 한 봉지가 500~700원. 그런데 프링글스는 무려 2000원이었으니 비싼 과자가 맞았다. 꼬맹이가 먹기에 양이 많기도 했다. 두 봉지를 사주겠다는 말에 얼른 내려놓고 잊어버렸다.
프링글스 광고(1999)
얼마 후, 가까운 친구 생일파티가 열렸다. 거기서 처음으로 프링글스를 맛봤다. 오돌토돌한 표면. 은은하나 강렬한 감자향. 바사삭 하는 맛난 소리와 함께 퍼지는, 짭조름한 맛. 맛의 정수를 경험할 수 있는, 통 밑바닥 부스러기들. 글자 그대로 ‘신세계’.
상 위에 다른 과자도 많았으나, 오로지 프링글스만을 열심히 먹었다. 깊이 매료되는 바람에. 내게 ‘손이 가요 손이 가~’는 새우깡이 아닌 프링글스였다. 또한 ‘한 번 열면 멈출 수 없어!’라는 광고문구가 나오면, 끄덕였다. 진짜 그랬으니까.
그 생일파티 다음, 아버지와 함께 슈퍼를 간 날.
쪼르르 과자코너로 달려가 프링글스를 집고 놓지 않았다. 다른 과자를 두 개, 아니 세 개 사주겠다는 회유에도 힘차게 고개를 저었다. ‘애들이 먹기엔 짜다.’, ‘엄마가 싫어할 거다.’, ‘너무 비싸다.’.. 하지만 맛에 홀딱 반한 꼬맹이는, 당돌했다. 지켜보던 슈퍼 주인아저씨가 너털웃음을 터뜨린 기억이 난다. 어르고 달래고.. 지고지난한 설득이 이어졌다. 그러나 결국 아버지는, 사주셨다. “짜. 조금씩만 먹어.” 라며.
(아버지는 그날 어머니에게 잔소리를 엄청 들어야 했다.)
처음으로 산 프링글스를, 사흘에 걸쳐 나눠 먹었다. 너무너무너무 맛있고 행복했다. 이후 프링글스는 내게 ‘착한 어린이 상’ 같은 존재가 되어, 아주 가끔 맛보는 귀하신 몸이었다. 빨간색(오리지날)으로 시작하여 초록색(*사워크림&어니언. 어머니에게 '싸워 크림'이 싸울 때 쓰는 거냐고 물은 기억이 난다.)을 주로 찾았다. ‘맛있는 과자’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올랐으며, 꾸준히 애정을 이어나갔다. 중고등학생 시절 가장 많이 먹은 과자이기도 하다.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거나 자극(?)이 필요하면, 그 자리에서 프링글스 반 통 혹은 한 통을 먹어치우곤 했으니.. 야자시간에 특히 많이 먹었다. 수능 직전은 말할 것도 없고.
'소금맛'에 먹었던 건데. 잃어버리고 말았다. 맛도 없고, 양도 줄고, 가격도 오르고! 이젠 언제든 멈출 수 있다. 슬프게도.
하지만 대학교에 들어갈 무렵부터 프링글스를 거의 먹지 않았다. 내수품이 말레이시아 산으로 바뀌며 식물성기름 사용 및 소금함량 축소로 정말 맛이 없어진 까닭이다(건강을 고려하는 트렌드에 맞게 저염을 추진했다는데. 정말 건강 생각하면 아예 안 먹는 게 맞지.). 게다가 양도 110g으로 형편없이 줄었다. 그런 주제에 가격까지 올렸다(점차 올라 현재 3,300원). 반감이 심했으나 어린시절부터 깃든 진득한 정(情)에 이끌려 때때로 사먹었다. 그러나 먹을 때마다 ‘아으, 맛 없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차츰 끊었다.
그런데 4년 전, 미국 여행에서프링글스를 다시 마주했다. 중량과 지름을 보아하니 한국에서 파는 말레이시아 산은 아니다만.. '잃어버린 소금맛'을 비롯해 큰 배신감을 느낀 나에겐 본고장 생산품이라 해도 인식이 영 좋지 않았다. 순전히 가격 때문에 하나를 샀다. 개당 1$(당시 약 1,100원)에 불과했으니.
의구심을 가득 안고 한 조각 먹는데, ‘우오오오!’ 감탄이 터져나왔다. 쾌재를 불렀다.
‘YES! 이 맛이야!!!’
어린시절의 그 맛. 생일파티에서 먹었던 그 맛. 여기 있었구나! 잃어버린 첫사랑과 재회한 느낌이 이럴까?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다시 마트로 들어가 다섯 통을 한꺼번에 구입했다. 그리고 여행 틈틈이 계속 먹었다. 오죽하면 친구가 “너 프링글스 먹으러 왔냐?” 라고 농을 걸 만큼(‘그러게. 이번 여행의 가장 큰 소득이야.’라고 답했던 기억이 난다.). 여행이 끝난 뒤, 해외직구로 상자째 구입도 생각해봤으나 너무 미련한 처사다. 배보다 배꼽이 몇 배는 더 큰 까닭이다. 게다가 쌓아두고 먹으면 분명 물린다. 적절한 희소성이 필요하다. 이러한 이유로, 미국에 머무는 몇몇 친구가 한국에 온다고 하면, 조심스레 ‘프링글스 한 통만..’하고 부탁한다. 솔직히 한 통으론 모자라고 더 있으면 좋다. 그러나 은근히 자리차지하는 물건임을 알기에, 한 통만 사다 주어도 감지덕지하다.
프링글스는 흔하디 흔한 감자칩이다. 시중에 있는 수많은 과자 중 하나에 불과하다. 그러나 내겐, 사소하지만 소중한 순간들이 담겨 있다: 아버지와 종종 가던 동네 슈퍼. 9살의 친구 생일파티. 머리 싸매고 공부하다 과자를 꺼내던 야자 쉬는 시간. 4년 전 미국 여행등등.. 이젠 기억 속에나 살아있는 시간과 장소. 그에 얽힌, 수많은 이야기들. 나의 프링글스.
이야기는 곧 삶이며, 삶을 나누다보면 또 다른 이야기를 나눌 수밖에 없다. 그렇게 점차 서로를 알아가며, 조금씩 이해하여 간다. 돌이켜보면, 말도 없이 미국산 프링글스를 사다 준 이 친구와도 참 많은 이야기를, 삶을, 나누었다. 그 덕에 통했다. 마음이.
라는 제안으로 쓴 글입니다. 위에도 등장한, 프링글스를 사다 준 친구의 농담 반, 진담 반 발언이 시초. 제안을 듣고 '워낙 좋아하니 가능은 하겠지만, 읽을 만한 수준이 될지? 그리고 언제 완성 될지? 잘 모르겠다. 소재가 특이하잖아. 감이 안 와. 암튼 기다려 봐.' 라고 넘겼네요.
친구와 헤어지고 돌아와 잠 못 드는 밤, 허한 심사를 달래려 (미국산)프링글스를 먹었습니다. 그러다 문득 확신했습니다.
'쓸 수 있어! 내용도 생각보다 풍부하겠다!'
과자 소재로 글을 쓰다니. 저 스스로도 너무 신기합니다. 웃기기도 하여 킥킥 웃음이 나오네요. 즐거운 경험이었습니다. 독자님들은 어떠셨을는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