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에서의 마지막 처소

4. 그들은 어디서 어떻게 살았을까.

by 이세벽

만신창이가 된 죄수가 안토니오 요새의 지하 감옥에 던져졌다.


그 방은 반역자들과 살인자들 그러니까 곧 십자가에 처형될 자들이 잠시 머물다 가는 곳이었다.


죄수들에게는 지상에서의 마지막 방이었다.


악취가 진동하는 더러운 곳으로 이미 지옥에 던져진 거나 마찬가지였다.


“라몬을 닮았어. 아니 라몬이야. 라몬이 틀림없어. 어떻게 이런 일이.......”


의식도 없이 간간이 괴롭고 고통스럽게 신음하고 있던 죄수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던 바라바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외쳤다.


절망에 빠진 목소리였다.


하지만 바라바는 이내 정신을 가다듬더니 자신이 입고 있던 옷가지를 벗어 죄수를 덮어 주었다.


“그런 끔찍한 소리 하지 마라. 닮은 사람이겠지. 라몬은 지금 고향에서 양 떼와 함께 푸른 초장을 거닐고 있을 거다. 평생을 양치기로 살아온 라몬이 왜 여기로 잡혀 왔겠어. 그럴 이유가 없잖아.”


구석에 비스듬히 누워있던 요셉이 코웃음을 쳤다.


“그렇긴 한데, 너무 닮았어. 만신창이가 되었는데도 라몬의 옛 얼굴이 남아 있어. 가까이 와서 봐. 개자식들 사람을 이 모양으로 만들어 놓다니. 얼마나 가혹하게 채찍을 휘둘렀으면……. 어차피 죽을 사람한테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잖아.”


바라바는 분노에 가득 차서 욕설을 내뱉었다.


“닮긴 닮았는데, 라몬일 리 없어.”


귀찮아하면서도 마지못해 다가와 죄수의 얼굴을 들여다본 요셉이 중얼거렸다.


“확인해 보면 돼.”


바라바가 생각난 듯 피로 범벅이 된 라몬의 겉옷을 걷어 올리고 양쪽 허벅지를 번갈아 살폈다.


“만약 이 사람이 라몬이라면, 우리는 저주받은 거야. 이미 오래전에....,.”


요셉은 시큰둥하게 죄수의 허벅지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바라바와 요셉, 두 사람은 같은 기억을 떠올리고 있었다.



바라바와 요셉 그리고 라몬 이렇게 셋이서 광야를 지나다가 늑대 무리를 만났었다.


라몬은 무리와 떨어져서 놀고 있는 새끼 늑대를 발견하고 성큼성큼 다가갔다.


어미 늑대가 이빨을 드러내며 다가오고 있었지만 라몬은 미처 알아채지 못했다.


어미 늑대가 쏜살같이 달려와 라몬의 허벅지를 깨물었다.


라몬의 비명을 들은 바라바가 어미 늑대를 향해 투봉을 던졌다.


투봉이 어미 늑대의 옆구리를 가격했다. 어머 늑대는 외마디 신음을 내지르며 나가떨어졌다.


바라바 덕문에 라몬은 가까스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하지만 허벅지에 깊숙이 박혔던 어미 늑대의 이빨 자국은 깊은 상흔을 남겼다.




“만약 이놈의 허벅지에 늑대 이빨 자국이 있다면, 우리는 저주받은 게 분명하다.”


요셉이 못 믿겠다는 듯 다시 코웃음 쳤다.


“이 사람은 라몬이 맞아. 틀림없어.”


바라바가 라몬의 허벅지를 내려다보며 절망스럽게 내뱉었다.


“말도 안 되는 멍청한 소리 작작해.”


요셉이 허리를 굽히더니 거칠게 죄수의 다리를 뒤틀었다.


“아,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지. 우리가 모두 사형수가 되다니....... 이건 말도 안 돼.”


라몬의 허벅지에 남아 있는 늑대 이빨 자국을 확인한 요셉이 신음처럼 내뱉었다.


바라바는 죄수로, 그것도 사형수로 확정되어 감옥에 던져진 라몬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왜 우리 셋 모두 이렇게 갇히게 되었을까! 우리에겐 공통점이라고는 하나도 없는데. 딱 한 가지 있다면 어렸을 때 양치기 목동이었다는 것, 양치기 목동이었을 때 천사의 음성을 듣고 구유에 누운 아기를 영접했다는 것뿐인데. 그것은 저주받을 일이 아니지 않은가.


두려워 마라. 보아라. 모든 백성을 위한 큰 기쁨의 소식을 가지고 왔다. 오늘 다윗의 마을에 너희를 위하여 구세주께서 태어나셨다. 그는 곧 그리스도 주님이시다.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있는 아기를 너희가 볼 것인데, 이것이 너희에게 주는 증거이다.’


아직도 기억이 생생한 천사의 음성인데. 그 음성 어디에 저주의 냄새가 난다는 말인가. 아니 그날의 일은 오히려 축복이어야 했다.


그 아기는 어디로 갔는가! 하나님은 실패하고 만 것인가? 아기를 영접한 우리 셋 모두가 이렇게 된 것은 하나님이 실패한 증거일까! 정말 그런 것일까!


그 순간 의식을 잃은 라몬은 죽음과 삶의 갈림길에서 평화로운 꿈을 꾸고 있었다. 오래된 기억들이 마치 당시로 돌아간 것처럼 생생하게 재생되는 꿈이었다.




당시 미가의 예언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성서를 모르는 사람들이라고 해도 미가의 예언에 대해서는 한 마디쯤 하는 세상이었다. 유행처럼 미가의 예언이 떠돌고 있었던 시절이었다.


그만큼 메시아는 마을 사람들의 가장 큰 관심거리였다. 마을 정착민들 대부분이 다윗의 자손이어서 더욱 그랬겠지만 어른, 아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미가의 예언을 줄줄 외웠다. 마치 전통적으로 구전되어 온 잠언의 한 구절처럼. 라몬과 바라바 그리고 요셉도 예외는 아니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가운데서 가장 작지만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나올 것이라....... 그의 힘이 크고 왕성하게 번창하여 땅 끝까지 미치리라......’


미가의 예언을 알고 있는 마을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이 마을에서 태어난 아이들 가운데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 곧 왕이 나올지 모른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이 마을 어른들이 지혜가 뛰어나거나 재주가 있는 아이들에게 큰 기대를 거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내 마음속엔 꺼지지 않는 열망이 있어. 만약 아기 왕이 헤롯의 칼에 의해 죽었다고 해도 그분의 뜻은 좌절되지 않아. 난 그것을 믿어. 내가 베들레헴 구유에서 아기를 영접한 것은 그분의 뜻이야. 아기를 섬기라는 명령이었던 거지. 난 이제 그분을 찾아 나설 거야. 세상을 떠돌다 보면 언젠가 그분을 만나게 되겠지.”


어느 날 바라바는 자신의 결심을 라몬에게 털어놓았다.


“나도 양들을 버리고 우리가 영접했던 아기를 찾아 나서야 하는 거야?”


라몬이 반문했다.


“그분은 우리에게 서로 다른 임무를 주셨어. 그건 네 마음속에 있는 열망이 알려줄 거야. 그 열망은 아무도 거스를 수가 없어.”


바라바가 라몬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말했었다.


“.......”


라몬은 더 말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초장이 텅 빈 것처럼 허전했다. 라몬과 바라바는 말없이 앉아 구름 사이로 질주하는 달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넌, 틀림없이 해낼 거야. 너의 지혜와 부지런함, 그리고 다윗 같은 솜씨와 용맹함은 그분에게 큰 힘이 되실 거야.”


라몬이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고맙다. 넌 좋은 친구야. 너도 함께 천사들의 영광을 봤으니까 그분을 향한 열망이 느껴지는 날이 올 거야. 아니 이미 너는 그 열망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몰라.”


바라바가 말했다.


“양치기가 뭘 할 수 있겠어. 너희들은 다 고향을 버리고 떠나잖아. 요셉이 양을 버리고 예루살렘으로 가버린 지 몇 달이나 되었지! 가족이 없는 요셉이라면 그럴 수도 있어. 게다가 요셉은 가끔 만나서 얼굴이라도 볼 수 있잖아. 보고 싶으면 예루살렘으로 달려가도 되고.”


라몬이 말했다.


“나도 그럴 거야. 정처 없는 여행이긴 하지만 언젠가 돌아올 거고. 가족도 있고 너도 있는데 어떻게 안 돌아오겠어. 가끔은 여기 와서 너랑 이야기하다가 잠드는 날도 있겠지.”


바라바가 말했다.


“이제 너마저 가버리면 난 홀로 이 초장을 지키며 쓸쓸할 거야.”


라몬이 말했다.


“우리의 조상 다윗 왕도 양치기였다는 걸 잊지 마. 그것이 우리 양치기들의 자긍심이잖아. 오래전에 약속하신 것처럼 지금도 하나님은 우리 혈통에게서 다시 왕이 나시기를 원하셔. 그러니까 우리가 영접했던 그분도 다윗의 자손이 틀림없을 거야. 우리가 너무 어려서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거지.”


바라바가 말했다.


“.........”


“만약 그분이 헤롯의 칼을 피하지 못했다면……. 그래서 만약 라몬 너에게 기름 부으신다면....... 죽은 아기를 대신해서 양치기인 너에게 기름을 부으신다면 나와 요셉은 다시 돌아와 너를 위해 삶을 바치게 될 거야. 또 이 마을에서 어떤 소식이 들려와도 달려올 거야. 그러니까 넌 여기 머물러 있어야 하는 건지도 몰라.”


바라바가 말했다.


미가의 예언을 알고 있는 마을 사람들 대부분이 그러하듯이 바라바도 왕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 그 마을의 사람이라면 하잘것없는 가난뱅이라도 자기가 혹시 기름 부음을 받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은밀하게 품고 자기 위안으로 삼았다.


에브라다에서 태어난 사람이라면 거지라도 부자가 되는 꿈이나 왕이 되는 꿈으로 자기의 불행한 현실을 잠시라도 잊을 수 있었다. 누구든 예언을 자기 꿈으로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왜 그런 말을 해! 하나도 위로가 되지 않아. 용기도 없는 나 같은 목자가 어떻게 예언의 주인공이 될 수가 있겠어. 더구나 우리는 이미 아기 왕을 영접했잖아. 그분만이 왕이시라고.”


라몬이 말했다.


“만약이라고 했잖아. 헤롯의 칼이 얼마나 잔인하게 아기들을 쳤는지 너도 알잖아. 그래서인지 솔직히 가끔 불길한 생각이 들 때도 있다.”


바라바가 말했다.


“그래 모르지. 하지만 적어도 나는 아니야. 내가 기름 부음을 받았다면 아마 온 세상 사람들이 배꼽을 잡고 웃다가 미쳐버릴 거다.”


라몬이 못 참겠다는 듯 웃었다.


“네가 뭐 어때서. 누구든 기름 부음을 받으면 달라지는 거야.”


바라바도 소리 없이 웃었다.


“차라리 너라면 몰라. 넌 다윗 왕처럼 돌팔매도 잘 던지잖아. 날아가는 새도 떨어트리는데……. 로마군대쯤이야 못 해치우겠어.”


라몬이 말했다. 그러나 양치기가 로마군대를 이길 수 없다는 것쯤은 알 수 있는 나이였다.


잠시 후 바라바는 라몬의 어깨를 툭 치고 일어나 어둠 속으로 걸어갔다. 라몬이 그의 등 뒤에 대고 내일 아침에 다시 볼 수 있겠지,라고 물었지만 그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내일 아침에 너를 보러 갈 거야.”

라몬이 다시 어둠 속에 대고 소리쳤다.


바라바가 사라지고 나자 라몬은 갑자기 외톨이가 된 느낌이었다.




몇 달 전 라몬보다 두 살 많은 요셉이 장사를 배우겠다며 예루살렘으로 떠날 땐 아직 바라바가 있었기 때문에 크게 심란하게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그런데 유일하게 남은 친구 바라바까지 떠난다고 하자 마음이 아프고 허전했다. 그뿐만 아니었다. 수백 마리의 양 떼를 데리고 초장을 누비는 자신의 꿈이 부끄럽기까지 했다.


바라바가 뛰어들고 싶어 하는 미지의 세계에 비하면 양들은 보잘것없어 보였다. 자신의 꿈은 초라하게 느껴졌고 양 떼들은 아무런 위로가 되지 않았다.


라몬은 달빛을 올려다보며 구슬픈 곡조로 풀피리를 불었다. 라몬이 바라바보다 유일하게 잘하는 것이라면 풀피리로 연주하는 것이었다.


라몬이 아무 풀이나 뜯어 쓰윽 닦고 나서 입에 대고 불면 무슨 곡조든 흘러나왔다.


문득 라몬은 양 한 마리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새끼를 밴 뒤로 얕은 곳이든 깊은 곳이든 파인 곳에 발을 헛디딜라치면 뒤집혀서 바동거리던 녀석이었다.


라몬은 어미 양이 새끼를 낳으려고 혼자 조용한 곳으로 갔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곧장 어둠 속을 헤치고 어미 양을 찾아 나섰다.


예상대로 절벽의 한적한 곳에 따로 자리를 잡고 웅크리고 있었다. 어미 양은 벌써 앞발로 주변을 깨끗하게 정돈하고 새끼 낳을 채비를 마쳤다.


어미 양은 라몬이 다가가자 일어서려고 안간힘을 썼다. 뱃속의 새끼를 보호하려는 어미의 본성이 내심 서운하면서도 대견했다. 하지만 힘에 부쳤는지 어미 양은 다시 그대로 주저앉았다.


“걱정하지 마. 내가 지켜줄게.”


라몬은 첫 새끼를 낳는 어미 양을 안심시키려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어미 양의 엉덩이를 손으로 더듬었다.


경험이 많은 라몬의 손길은 자연스럽고 익숙했다. 그러나 정작 어미 양은 처음 겪는 일이어서 그런지 흥분한 듯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라몬의 손에 물컹한 게 잡혔다. 삐져나온 양수 막이 달빛에 비쳤다. 라몬은 조심스럽게 몸을 움직여 어미 양의 엉덩이 아래로 다가앉았다.


라몬이 짐작한 대로 이내 양수 주머니가 터지면서 땅을 흠뻑 적셨다. 어미 양이 흠칫 놀라 고개를 쳐들었다.

“괜찮아. 이제 곧 너를 닮은 새끼가 달빛을 받으며 나올 거야. 아기 양의 이름을 달빛이라고 지을까. 그게 좋겠다. 이제 너는 진짜 어미가 되는 거야. 자신 있지.”


라몬은 중얼거리며 엉덩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어미 양이 다시 한번 고개를 쳐들고 괴로운 듯 몸부림쳤다. 새끼를 세상으로 내보내려고 용을 쓰는 것이었다.


그러나 새끼는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어미 양이 두어 번 더 몸부림을 친 뒤에야 새끼의 발이 삐죽이 나왔다.


“아니야, 발부터 나오면 안 돼.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을 걸. 들어갔다가 머리부터 내밀어. 그래 착하지.”


라몬은 손으로 새끼의 발을 산도 깊숙이 밀어 넣었다. 그리고 더듬더듬 새끼의 머리를 찾았다.


“내가 세상으로 꺼내줄게. 난 양을 사랑하는 목자란다.”


라몬은 조심스럽고도 신중하게 새끼의 머리가 아래로 향하도록 돌렸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앉아서 어미가 힘을 주기를 기다렸다.


마침내 털로 뒤덮인 머리가 투명한 막에 둘러싸인 채 모습을 드러냈다.


혀는 늘어지고 귀는 머리에 바싹 들러붙어 있었다.


새끼의 목과 어깨가 보일 때쯤 어미가 다시 한번 몸부림쳤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또다시 양수가 흥건하게 쏟아졌다.


마침내 새끼 양이 달빛 아래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새끼는 끈적끈적한 액체로 뒤덮인 채 움직이지 않았다.

라몬은 어미 양이 새끼를 핥아주기를 기다렸다. 자기가 손으로 떼어내 주는 것보다 어미의 혀가 더 좋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놀란 어미 양은 새끼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종종 있는 일이었다.


라몬은 손으로 새끼 양의 코와 입을 덮고 있는 젖은 막을 걷어내면서 뿌듯한 보람을 느꼈다.


새 생명이 숨을 쉬도록 도와주는 것. 그리고 또 한 마리의 양이 생겼다는 것은 양치기에게 큰 기쁨이고 행복이었다.


마침내 숨을 내쉬기 시작한 새끼 양이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끈적끈적한 막을 빠져나오려고 애를 썼다.


그 모습이 안쓰러웠다. 하지만 라몬은 새끼양 스스로 벗어날 때까지 기다렸다.


바동거리는 새끼의 모습이 안타깝지만 도와줘서는 안 된다는 것을 라몬은 잘 알고 있었다.


처음 새끼 낳는 것을 보았을 때 그저 불쌍한 생각으로 막을 걷어주려다 주정뱅이 목자에게 혼난 기억이 떠올랐다.


‘이 멍청한 놈아, 자비를 베풀면 전부 다 좋은 줄 아느냐. 네가 만약 그 끈적거리는 껍데기를 벗겨준다면 그 양의 수명을 빼앗는 것이나 마찬가지야.

그런 양은 얼마 살지 못하고 병들어 죽기 십상이지. 네가 그렇게 만드는 거야.

그 껍데기를 스스로 벗어나는 것은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오는 것과 똑같아. 알을 깨는 동안 살아갈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거야. 그걸 생명력이라고 하지. 세파를 버티거나 견뎌내는 힘이기도 하다. 알겠냐. ’


주정뱅이 목자에게도 게으름과 술 취함과 노름을 빼고는 배울 것이 많이 있다는 것을 라몬은 그때 비로소 깨달았다.


주정뱅이 목자라도 자기 양을 아끼는 것이 틀림없었고 자기 양에게 언제 어떻게 꼴을 먹여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발버둥 치던 새끼가 드디어 끈적끈적한 막을 벗어던졌다.


새끼 양은 일어서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가는 다리가 사방으로 벌어지면서 휘청거리다 쓰러지고 다시 일어나기를 반복했다.


새끼 양이 고꾸라지는 걸 바라보던 어미 양이 안타까운 듯 눈길을 돌렸다.


새끼 양이 마침내 첫발을 떼는 데 성공했다. 새끼양이 비틀걸음으로 어미의 품에 다가와 젖을 찾았다.


라몬은 어미의 젖꼭지를 닦아내고 허우적대는 새끼 주둥이에 갖다 댔다. 이윽고 새끼가 콧김을 뿜으며 젖을 물고 빨기 시작했다.


그제야 라몬은 긴장을 내려놓고 풀썩 주저앉았다.


라몬이 삯꾼 목자를 청산하고 주인에게 받은 양은 두 살 전후의 암양 두 마리와 숫양 세 마리였다.


주인이 약속대로 라몬이 열여덟 살 되는 해에 양을 주었다. 처음엔 다섯 마리뿐이었지만 일 년이 채 지나기도 전에 벌써 양들이 여섯 마리로 늘었다. 아니 오늘 새벽 달빛이 태어났으니 이제 일곱 마리였다.


그것만으로 그는 세상에서 가장 큰 부자가 된 것 같았다. 하지만 바라바 때문에 이내 마음이 무거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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