숯을 굽다

9. 새로운 시작

by 이세벽

“저는 반군에게 독립자금을 보내온 장사꾼입니다. 제 동료들은 모두 잡혀서 처형되었지만 저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이렇게 살아났습니다. 그러나 저는 바로 이 창고에서 중요한 장부를 잃어버렸습니다. 저는 그걸 찾고 있습니다. 그것이 있어야, 다시 장삿길에 오를 수 있고 유대의 해방을 위해 싸우는 반군을 도울 수 있으니까요.”


요셉은 마을 주민들에게 하소연했다.


요셉을 숨겨주었던 부인과 처녀 라합은 자진해서 그가 혁명군이 확실하다고 증인이 되어주었다.


덕택에 요셉을 미친 사람 취급이던 주민들의 마음이 연민으로 바뀌었다.


마을 주민들은 요셉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가져다주었다.


몇몇 남자들은 요셉을 돕겠다고 나섰다. 그들은 늙고 병들었던 덕에 살아남은 노인들이었다.


“이만큼 찾아도 안 나왔다는 건 여기에 그 장부가 없는 거네. 창고에 숨긴 게 확실하다면 창고에 대해 잘 아는 우리가 못 찾을 리 없지. 그리 넓지도 않은데.”


한 노인이 말했다.


“여기 아니면 숨길 데가 없습니다. 아시다시피 잡혀온 뒤로 창고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했으니까요. 내 장부를 맡아 가지고 있던 사람이 끌려나갈 땐 이미 알몸이었고요.”


요셉이 말했다.


“날도 어두워지고 하니 오늘은 그만하는 게 좋겠네.”


노인이 위로하듯 요셉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요셉은 기약도 없이 노인 집에 머물며 숯 굽는 일을 도왔다. 그러나 암몬의 장부를 찾는 걸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틈만 나면 창고를 드나들었고 공연히 마을을 샅샅이 뒤지고 다녔다.


그렇지만 차츰 요셉의 야망은 시들어갔다. 어쩌면 생명의 은인이기도 한 라합의 사랑이 요셉의 마음을 붙잡아 둔 것이었는지 모른다.


라합은 자신과 어머니의 목숨을 걸고 살려놓은 요셉에게 깊은 애정을 느꼈다. 하지만 요셉이 장부를 찾으면 떠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마음을 드러내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감추어지지 않는 게 사람의 마음속에서 피는 꽃이다. 사랑의 꽃이든 미움의 꽃이든 절망의 꽃이든 한 번 피어나면 눈에 띄기 마련이었다. 사랑의 꽃에서 내뿜는 향기는 또 얼마나 고혹한가. 그 자태는 또 얼마나 유혹적인가.


애써 피하는 라합의 눈길에서도 무심한 듯 챙겨다 주는 음식에서도 요셉은 향기를 맡았고 거부할 수 없는 아름다운 유혹을 느꼈다.


라합은 숨기고 싶어 했던 사랑이었지만 사랑은 스치는 바람을 통해서도 요셉의 마음에 가 닿았다.


천성이 장사꾼인 요셉은 한 곳에 발이 묶이는 걸 지독히도 못 견뎌했다. 하지만 어쩐지 라합의 사랑 앞에서는 마음이 바뀌었다.


요셉은 어느덧 마을에 정착해서 살아가는 꿈을 꾸곤 했던 것이다.


그렇게 요셉은 하루하루 자신의 꿈과 야망을 연기하면서 노인의 집에서 숯 굽는 일을 도우며 마을 정착민으로 살았다. 그리고 장사수완을 발휘하여 숯을 도시의 부자들에게 팔러 다녔다.


요셉이 돌아올 때마다 그가 언젠가 떠나리라는 노인의 불안은 점점 믿음으로 바뀌었다.


가슴에 꽁꽁 싸매고 감추던 라합의 사랑도 자꾸 밖으로 새어 나왔다.


"요셉, 당신이 숯을 팔러 갈 때마다 다시는 못 볼 것 같은 생각이 들곤 했어요. 그런데 당신이 돌아오니 너무 기쁘고 행복해요."


라합은 눈시울 가득 차오르는 물기 때문에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라합은 요셉이 숯을 팔아서 다시 마을로 돌아오곤 하는 것은 그가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피곤할 텐데 어서 들어가 좀 쉬고 계세요. 제가 당신을 위해 음식을 준비할게요."


라합의 가슴속에 사랑만 있었는데 어느덧 믿음이 자랐다.


"라합, 고맙습니다."


그러면서도 요셉은 선뜻 떠나지 않을 거라는 약속을 하지 못했다. 역마살을 가지고 태어난 자신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듬해, 요셉은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처녀 라합과 결혼했다.


마을 사람들은 요셉과 라합을 위해 새집을 지어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요셉의 아내 라합이 잉태를 했다. 그리고 달이 차자 딸을 낳았다. 그 후 라합은 갓난아기가 돌도 되기 전에 또다시 잉태했다.




그즈음 노인이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려는 요셉을 자신의 집으로 데려갔다.


“자네가 찾던 게 이건가?”


노인이 어두워지기 시작한 방안을 밝히려고 등잔불을 켜더니 작정하고 있었던 듯 깊숙한 곳에서 뭔가를 꺼내 요셉에게 건넸다.


“어르신, 이게 어떻게.......”


요셉은 한눈에 봐도 그게 암몬의 장부인 것을 알 수 있었다.


“이건 자네 것이 아니라 내 것일세. 자네는 이것이 자네 거라고 했지만 이것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 내게 주었고, 나는 그 사람이 장부의 본래 주인이라 확신하고 있으니 하는 말이네. 물론 그 사람이 내게 주지 않았다면, 자네 장부가 될 수 있었겠지만.”


노인이 말했다.


“암몬이 주었다고요!”


“내가 그 사람에게 물을 조금 더 나눠줬더니 품에서 이걸 꺼내 나에게 주더군. 자기가 풀려나면 돌려달라면서. 그러나 만약 자기가 죽는다면 가지라고, 그걸 가지고 가면 소금과 몰약과 유향을 내어줄 거라고 하더군. 하지만 난 글을 모르기도 하고 또 모험을 하기보다는 숯을 구워 사는 게 좋았네. 가끔 믿을 만한 사람에게 보여주고 함께 모험을 떠나볼까 꿈을 꾼 적도 있긴 하지만 그러다 목숨을 잃기 십상이라는 생각이 들었지. 이 장부가 큰돈이 된다면 나 같은 노인 목숨이야 거침없이 앗아갈 수도 있지 않겠나. 누구든 말이야. 강도와 살인이 들끓는 이 거칠고 황량한 세상에서 나 같은 노인이 살아남는 것은 고향에서 조용히 사는 것 밖에 없지.”


노인이 말했다.


“물 한 잔에 그걸 내 줄 암몬이 아닌데....”


요셉이 중얼거렸다.


그게 아니라면 내가 무슨 수로 이 장부를 손에 넣었겠나?"


당시 노인은 창고에 잡혀 온 사람들에게 물과 약간의 먹을 것을 나눠주는 일을 맡았다고 했다.


"로마군이 시켜서 한 일이었지만 마을 젊은이들도 상당수 있었고 해서 안타깝고 두려운 마음으로 물과 음식을 가져다주었네. 그런데 보니까 특히 그 암몬이라는 사람이 몹시 갈증에 시달린 듯 보이더군. 아마도 소갈증이 있었던 것 같아. 그래서 물을 좀 넉넉하게 마시게 해 주고 꿀을 숨겨가지고 가서 먹였었지.”


노인이 말했다.


“아, 그런 일이 있었군요. 그런데 왜 이걸 이제껏 감춰두었다가 저에게 주십니까?”


요셉이 말했다.


“감춰 둔 건 아니네. 그가 죽었으니 내 것이라고 생각했지."


노인의 말에 요셉은 고개를 끄덕일 뿐 흔들리거나 흥분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미안하게 됐네만, 나는 자네가 창고에서 찾고 있는 장부가 이것이라는 걸 알았네. 하지만 자네에게 보여줄 수 없었지. 자네가 나를 죽이고서라도 빼앗아 달아날 것 같았거든. 나중엔 자네에게 보여줘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쩐지 자네가 이걸 가지고 마을을 떠날까 봐 겁났지. 우리 마을 남자들은 유독 애국심이 많았네. 그래서 많은 남자들이 반군이 되어 마을을 떠났지. 그나마 남아 있던 마을 남자들은 죄다 로마군들에게 잡혀 죽었고. 그러다 보니 자네가 우리 마을의 유일한 남자였네. 사무엘은 젊지만 앞을 못 보고, 요나단은 절름발이가 아닌가. 그러니 자넨 우리 마을에서 꼭 필요한 사람이었거든. 자네가 우리 마을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데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 말해 뭐 하겠나. 정신적으로도 큰 의지가 되었다네. 마을 사람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는 걸 자네도 알 걸세.”


노인이 말했다.


“제가 이걸 들고 떠나버리면 어떡하시려고...... ”


요셉이 웃었다.


“이제 내가 이걸 준다고 해도 이 마을을 떠나지 않을 거란 확신이 들었네. 자네가 부자가 된다고 해도 다시 돌아올 거라는 확신이라고 해도 되고.”


노인이 말했다.




며칠 후 노인이 잠자리에서 고요히 죽음을 맞았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지만 언젠가 일어날 일이었다.


노인이 죽은 뒤에도 요셉은 숯 굽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하루하루 날이 갈수록 그의 마음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토록 고맙고 사랑스럽던 라합의 다정함도 태어난 자식도 요셉의 흔들리는 마음을 아주 붙들지는 못했다.


'지금이라도 장삿길에 오르기만 한다면 부자가 될 수 있을 텐데. 내가 포기해야 할 이유가 뭐지. 부자가 되어 다시 이 마을로 돌아오면 되지. 아니 큰 집을 사서 예루살렘으로 이사를 갈까. 그곳이 내 고향인데, 바라바와 라몬과 같은 그리운 친구들이 있는데.'


요셉은 밤낮없이 그런 생각에 시달렸다. 그동안은 어떻게 까맣게 잊고 살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동안은 라합의 사랑이 모든 것을 잊게 해 주었을지 몰랐다. 생명의 은인인 라합이 전부였고 라합이 삶의 이유였다.


하지만 라합의 사랑은 점점 무력해져 갔다. 대신 야망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거세게 자라서 요셉의 중심을 통째로 흔들어댔다. 마치 오랜 잠에서 깨어난 야수처럼 그의 야망은 굶주림으로 울부짖었다.


“여보, 내가 좀 다녀올 데가 있어. 당신이 아기를 낳기 전에는 꼭 돌아올게.”


요셉은 배부른 아내에게 차마 하지 못할 말을 하는 것 같아 라합을 쳐다볼 수가 없었다.


숯을 팔러 갈 때와 달리 마음이 아프고 괴로웠던 것이다. 라합이 안고 있는 젖먹이 아기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도 서러웠다. 하지만 그는 웃음 지으며 라합의 볼에 입을 맞추었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라합은 요셉의 얼굴에서 숯을 팔러 갈 때와는 아주 다른 결연하고도 외로운 결심을 읽었지만 애써 태연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아주 멀리 떠나서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예감과 동시에 어쩌면 영영 돌아오지 않을지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라합은 남편을 붙잡지 않았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고 믿었다.




요셉은 소금과 몰약과 유향을 돌려받아서 다시 장사를 시작할 꿈에 부풀어 먼 길을 쉬지 않고 걸었다.


밤낮없이 걸어 스무날만에 첫 번째 상인의 집에 도착했다. 그러나 그에게 돌아온 답변은 아무것도 내어줄 수 없다는 말뿐이었다.


"요셉, 자네의 말을 믿고 싶네. 하지만 누가 알겠는가? 자네가 암몬을 죽였을 수도 있고, 장부를 훔쳤을 수도 있지 않은가 말일세. 그게 아니라도 나중에 암몬이 돌아오면 나는 다시 또 유향을 내어줄 수밖에 없는데...... 몇 년이 더 흐른 뒤에도 암몸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때는 자네의 말을 믿겠네. 암몬이 죽으면서 자네에게 장부를 물려줬다고 말이야. 암몬이 다시 물건을 받으러 오지 않는다는 확신만 있으면 나야 누가 유향을 가져가든 아무 상관없어. 나는 단지 암몬이 다시 와서 물건을 내놓으라고 할까 봐 걱정이 되는 것이니 이해해 주게."


어느 상인이든 대답은 한결같았다.


요셉은 상인들에게 신뢰를 얻기 위해 어떤 힘든 심부름도 마다하지 않았다. 하인들과 함께 무거운 물건을 져 나르며 겨우 굶주린 배를 채우고 잠자리를 얻을 수 있었지만 요셉은 수년 동안을 굴하지 않고 버텼다.


그리고 해가 바뀔 때마다 상인에게 암몬의 죽음을 상기시키고 물건을 내어줄 것을 요구했다.


"내일이라도 암몬이 나타나서 물건을 내놓으라고 할지 누가 알겠는가. 아직 자네 말을 믿기엔 일러. 좀 더 기다려 봐야겠어."


상인의 태도는 좀처럼 변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것을 핑계로 영영 내어주지 않을 작정인지도 몰랐다.


요셉은 절망에 빠졌고 무엇보다 외로움을 견디기 힘들었다. 아내 라합이 그리웠고 젖먹이 아기와 태어났을 아기가 보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상인의 진심을 알 수가 없었다. 영영 물건을 내어주지 않는다고 해도 자신으로서는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요셉이 이제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가야 할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을 때였다.


"내가 졌네."


결국 상인은 요셉에게 항복을 선언했다.


"하지만 전부는 못 내어주네. 우선 삼 분의 일만 가져가고 나머지 삼 분의 일은 삼 년 후에 그리고 나머진 욕심내지 말게. 암몬이 죽었다면 내가 굳이 자네에게 내어주지 않아도 그만이지만......"




이전 08화요셉을 살린 라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