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장은 언제나 남쪽 도자기 공방 윗길을 따라 쉰 살을 넘긴 상수리나무 아래에서 우측으로 돌아 마을을 빠져나간다. 그렇지만 마을로 돌아올 땐 그늘진 산 아랫길을 이용한다.
밤이나 낮이나 이장의 그런 습성은 한결 같다.
장모는 텃밭에 엎드려 잡초를 뽑고 있다. 천강이 고추며 상추 따위를 손수 키우고 싶다고 정원 가장자리에 일궈놓은 텃밭인데 이젠 장모 차지가 되었다.
농사일을 해 본 적이 없는 장모지만 동네 노인들 잔소리 듣기 싫다며 풀 한포기 나는 것을 두고 보지 않는다.
텃밭을 놀리면 놀린다고, 잡초가 많으면 많은 대로 동네 노인들은 장모에게 이런저런 잔소리를 늘어놓는 모양이다.
장모는 동네 노인들과 함께 어울리는 대가를 톡톡이 치르는 셈이다.
키가 훌쩍 자란 고추 이랑 사이에서 풀포기를 뽑아 내던지는 장모의 얼굴이 제법 그을려 보인다.
매번 머릿수건을 두르시라며 월인이 권해드리곤 한다. 하지만 장모는 아침에 잠깐 하는 건데 라며 건성으로 넘긴다.
오전이긴 해도 장모의 정수리로 쏟아지는 햇살은 제법 매서워 보인다. 그러나 장모는 햇볕 따위에는 신경도 안 쓰고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자동차를 힐끗 쳐다보더니 다시 호미질을 한다.
장모도 이장의 차라는 걸 아는 것이다.
이장의 자동차는 그냥 지나치지 않고 텃밭 가까이에서 멈춰 선다. 그리고 동시에 동승석 창문이 열린다.
이장이 고개를 빼고 뭐라 소리친다. 그냥 인사를 하는 것 같지는 않다.
장모는 잘 알아듣지 못했는지 자동차 쪽으로 한 걸음 다가간다. 그리고 허리를 숙여 자동차 안을 들여다본다.
이장이 무슨 말을 했는지 장모는 서재 쪽을 힐끗 쳐다본다. 그리고 들고 있던 호미를 땅바닥에 던져버리고 바삐 집으로 온다. 몹시 서두르고 있는 데다 언짢은 표정이다.
서재 창가에서 바라보고 있던 월인은 영문도 모르는 채 거실로 나간다. 장모는 현관문을 열자마자 다짜고짜 월인을 찾으며 들어온다.
- 자네, 어서 나가서 해주 좀 찾아보게.
장모는 앞뒤 없이 월인을 재촉한다.
- 해주, 학교 갔잖아요.
월인은 해주의 근심어린 얼굴이 떠올라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책가방을 메고 집을 나서면서 자꾸 뒤돌아보던 해주의 얼굴은 전에 없이 어두웠다. 그러나 월인은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없었다.
승용차로 해주를 학교에 데려다 줄 걸 하는 후회가 들었지만 늦은 감이 들었고 그리고 태워다 준다고 해도 한사코 버스를 타고 가는 아이였기 때문에 포기하고 말았다.
- 이장이 그러는데 마을버스 놓치고 걸어가고 있는 것 같다네. 햇볕이 뜨거운데 어린 것이.......
- 제가 얼른 가서 태워주고 올게요. 걱정 마세요.
해주에게 미안하면서도 사고가 아니어서 그나마 안심이 된다.
- 부모라고 정이 있어야 이럴 때 전화해서 태워달라고 어리광을 부리지. 어린 것이 버스 놓치고 혼자서 얼마나 고민했을꼬. 다시 고아원으로 데려다 줄 수도 없고.......
월인이 여분으로 가지고 있던 자동차 카드를 찾으려고 서재로 향하는데 속이 상한 장모가 한숨을 내쉰다
언제부턴가 승용차 카드는 안방에서 자고 있는 천강의 차지가 되었다.
윌인은 그걸 핑계로 안방문을 열고 들여다보고 싶다. 하지만 그러다 천강과 시비가 붙어 늦어질 수도 있을 것 같아 책상 서랍에 두었던 여분의 카드를 가지고 나온다.
- 이장도 그렇지. 어린 것이 걸어가는 걸 봤으면 차를 돌려서라도 좀 태워주든지 하지. 환갑이 넘어가지고 그만한 인정도 없이 무슨 이장을 한다고. 감투 뺏어 쓰고 원숭이 흉내밖에 못내는 위인일세.
마음이 안 좋은 장모는 집을 나서는 월인의 등에 대고 죄 없는 이장을 타박한다.
이장이 이장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면사무소 직원은 물론 마을주민에게 음식대접과 선물 공세를 펼친 걸 두고 장모는 늘 못마땅하게 여겨왔다.
마을에서 문의초등학교까지는 자동차로 10여분 남짓 거리지만어린아이가 걷기에는 꽤 먼 거리이다.
윌인의 걸음으로도 삼십분은 족히 걸리는 거리여서 일찍나섰다 해도 해주의 걸음으론 지각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마을을 빠져나온 월인은 호반로에서부터 속도를 낸다.
문의에서 시작하여 마을 앞을 지나 청남대 근처까지 이어지는 자전거 길은 거의 대부분 호수 가장자리를 끼고 호반로를 따라서 놓여 있다.
아마 해주는 자전거 길로 가고 있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경사로를 지나서 커브를 돌자 저만치 자전거 길 위로 해주가 달리다 걷다 하는 게 보인다.
해주를 보자 월인은 이유 없이 눈시울이 젖는다.
입양기관 담당자는 해주 아버지와 어머니가 새벽에 남해 바다 어딘가에 있는 어장에 나갔다가 그만 익사하고 말았다고만 알려줬다.
천강이 궁금증을 드러내자 실종된 지 사흘 만에 가두리 양식장에서 발견되었다고, 평소에 사이가 좋았던 부부가 사고를 당한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다고 덧붙였을 뿐이었다.
천강은 해주의 친부모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어 했다.
월인은 천강의 간청을 뿌리칠 수 없어서 지인에게 부탁해서 수사 기록을 열람해 보았다.
뜻밖에도 남편이 바람난 아내를 살해하고 자살한 것으로 드러났다.
여자의 목에 경부압박 흔적이 뚜렷하고
익사의 증거가 되는 폐부종이 남편에게서만 나타난 것으로 보아 아내를 배에서 살해하고 나서 바다로 던진 뒤에 남편이 물에 뛰어든 것 아니겠냐고,
월인을 현직 변호사로 착각한 담당수사관은 자신의 의견을 덧붙였다.
남편이 원양어선을 타고 몇 해 바다에 나가 있는 동안 아내가 이웃의 어린 남자와 바람이 났었다고, 그것을 어린 딸도 알고 있었고 어린 딸의 증언으로 모든 게 분명해졌다고.
치정에 빠진 어머니는 어린 딸이 지켜보는 것도 모르고 어린 그 남자와 뜨거운 정사를 벌이곤 했다는 것이다.
딸은 이웃집 남자를 삼촌이라고 부르며 따랐고 삼촌 또한 해주를 예뻐했다고.
아무튼 아내의 바람이 들통 나서 심심찮게 부부싸움이 벌어졌고 새벽 바다에서까지 다툼이 이어지다 참극으로 막을 내린 것 같다며 사건을 담당했던 수사관은 전했다.
다시 입양기관을 찾았을 때 입양기관 담당자는 변명 대신 아직은 해주가 어려서 누가 어떻게 키우느냐에 따라서 인성과 감성은 물론 지능 또한 크게 달라질 수 있다고 주장할 뿐이었다.
말이 없으나 사려 깊고, 지능이 높으며, 타인의 마음을 잘 헤아리고 배려할 줄 아는 이타심이 강한 아이. 잘 양육한다면 훌륭하게 성장할 수 있어 보임. 선량하고 해맑은 얼굴. 키가 조금 작은 편임.
그것이 해주의 신상 기록 끝에 적힌 평가였다.
월인은 수사관에게 들은 것을 천강에게 전해주지 않았다. 다만 해주의 신상 기록을 손가락으로 짚은 채 천강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었다.
해주의 신상 기록을 읽고 난 천강도 밝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월인은 호흡을 가다듬고 해주를 앞질러 가서 차를 세운다.
해주도 차를 알아보고 멈춰 선다. 그러나 철망으로 된 울타리가 해주 키만큼 높다. 해주는 어쩌지 못하고 쳐다만 보고 있다.
월인은 마치 해주가 몹쓸 곳에 갇힌 것 같아 마음이 쓰리다.
월인은 길을 건너가서 철망 울타리 너머로 해주를 안아서 들어올린다.
해주를 내려놓으려는데 떨어지지 않고 월인의 목에 매달려 숨죽여 운다.
- 버스를 놓쳤으면 아빠한테 전화를 하지 그랬니.
월인은 해주를 안은 채 길을 건넌다.
- 버스를 놓친 게 아니에요. 엄마에게 가야할지, 아빠 곁에 있어야 할지 몰라서 걸었어요. 하지만 이젠 결심했어요. 엄마를 지켜드리고 싶어요, 아빠. 저 엄마랑 함께 가도록 해주세요. 언젠가 엄마 기억이 돌아온다고 하셨잖아요. 그러면 제가 아빠에게 연락을 할게요.
울음이 잦아든 해주가 또박또박 자기 생각을 말한다.
- .......
- 제가 엄마를 보살펴 드릴게요.
월인이 자동차 문을 열어주는데도 해주는 타지 않는다.
- 고맙구나, 딸아. 하지만.......
- 전, 밥도 할 줄 알아요, 아빠.
해주는 뒷자리에 타면서 월인을 바라본다.
- 방청소도 할 줄 알고, 빨래도 잘해요. 전에 엄마 아빠가 바다에서 늦게 돌아오시면 제가 하곤 했어요, 아빠.
월인은 뒷문을 닫고 운전석에 앉는다.
- 아빠만큼 엄마한테 잘 해드릴 수는 없어도, 엄마에게 도움이 될 거예요.
지나치게 어른스러운 해주의 말투가 월인을 안타깝게 한다.
- 딸아, 엄마가 원해서 집을 얻어 두긴 했지만 사실은 아빠도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고 있단다.
- 그러니까 제가 갈게요. 엄마가 나을 수만 있다면 전 뭐든 할 수 있어요.
- 고맙지만 엄마의 보호자가 되기엔 딸이 너무 어리구나.
- 엄마를 빌라에 혼자 계시게 할 수는 없잖아요?
- 그 문제는 아빠가 더 고민해 볼게.
해주는 우울하게 창밖을 내다본다. 그리고 생각에 잠긴 듯 말이 없다.
- 아빠, 만약에 엄마가 다른 남자를 사랑하면, 어쩌실 건가요?
학교 앞에 다다랐을 때다. 망설이던 해주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낸다.
- 글쎄다. 생각해보지 않았구나.
월인은 해주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고 있다. 불행하게도 해주는 친부모를 잃기 전과 비슷한 상황에 맞닥트린 것이다.
- 엄마는 아프시잖아요.
해주의 목소리가 떨린다.
- 그래, 아빠도 알아.
- 엄마가, 다른 남자를 사랑한다고 해도 죽이지 마세요, 아빠.
해주는 울음을 터트린다.
- 딸아, 절대로 그런 일은 없어. 아빠가 약속할게.
월인은 해주를 달래서 교실까지 데려다 준다. 다행히 아직 수업 시작 전이다.
집으로 돌아오니까 천강이 거실 소파에 앉아 훌쩍거리고 있다.
장모는 기다렸다는 듯이 월인에게 스마트폰을 건네준다. 천강의 전화기다.
- 자네, 은진이 데리고 먼 데로 가게. 아무도 모르는 데로 가서 살아. 호주나 미국으로 가든지. 기억이 돌아올 때까지는 그 수밖에 없을 것 같네.
- 무슨 일이 있었어요?
월인은 대강 짐작하면서도 짐짓 시치미를 떼고 물어본다.
- 세상에, 나는 은진이가 자네하고 통화하는 줄 알았네.
그러면서 장모는 그 사이 있었던 일을 숨기지 않고 털어놓는다.
- 자네가 해주를 데려다주러 나가고 나서 은진이 방문을 살짝 열고 들여다봤네. 그런데 어딜 가고 보이지 않기에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닌가, 실은 가출이라도 한 건 아닌가 싶어 덜컥 겁도 나고 그래서 주방과 서재를 다 찾아보다가 문득 짚이는 데가 있어서 이층으로 올라가 봤네.
층계참쯤 올라갔는데 이층 거실에서 은진이의 웃음소리가 들려와서 안심하고 내려오려다가 그 웃음이 하도 멀쩡하고 말투 또한 예전처럼 또렷해서 혹시라도 기억이 돌아온 것인가 하는 마음으로 엿듣게 되었네.
통화 내용이 사고 전에 자네한테 하는 것처럼 살가운데다, 투정도 부리고, 간간히 사랑해, 라는 말도 하고 해서 꼭 자네하고 통화하는 줄 알았지 뭔가. 그러니 나야 기억이 돌아온 줄 알고 기쁜 마음에 올라가 봤지 않았겠나.
그런데 나를 보더니 전화하다 말고 기겁을 하지 뭔가. 내참, 은진이가 알 건 다 알고 눈치는 뻔한 거지. 그러니까 나를 보고 그렇게 놀라지 않았겠나.
아무튼 은진이가 놀라는 게 하도 수상해서 누구랑 통화한 거냐고 캐물었네. 그런데 은진이가 뭐라고 대답했는지 아는가. 세상에, 애인이라지 뭔가.
장모는 한심한 듯 천강을 내려다본다.
- 애인이라는 작자가 그 기타 선생인지 뭔지 라는 사람이라네. 이게 말이나 될 법한 일인가.
짐작하고 있던 일이긴 하다. 하지만 막상 확인이 되고나니까 어디라고 말할 수 없게 아프다.
- 자네 어쩔 셈인가! 이대로 그냥 놔 둘 텐가? 하긴 자넨들 대책이 있겠나만, 자네가 은진이를 사랑한다면 기타학원이고 뭐고 내 보내지 말게.
아니 집 밖에도 못 나가게 해. 이러다가 큰일 나지 싶네. 그리고 내 말대로 몇 년 해외로 나가 있게.
좋은 게 좋은 것만은 아니야,
자네 사람이면 지킬 줄도 알아야지. 지키지 못하면 사랑이 다 무슨 소용인가.
장모는 숙희를 만나서 머리털을 다 뽑아놔야겠다며 집을 나선다. 월인이 그러지 말라고 말려도 막무가내다.
- 어쩌면 그렇게 처음이나 나중이나 한결 같이 애지중지 사랑하고 아껴줄 수 있을까 했더니, 부모 된 마음에도 시기가 다 날 지경이더니, 기어코 하늘이 질투했지.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꼬.
장모는 현관문을 나서며 장탄식이다.
월인은 장모 등 뒤에 대고 숙희 씨한테는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거듭 당부를 한다. 하지만 장모는 대꾸도 하지 않고 문을 닫아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