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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세벽 Oct 02. 2022

[그림이야기] 씨앗의 꿈

 


바람과 햇볕은 어느 누구보다 나를 예뻐했다.    

  

어쩌면 내가 그들을 더 좋아했던 건지 모른다. 


심지어 나는 변덕스럽게 내리는 비도 사랑했다.



날이 갈수록 나는 과육 속에서 여물어갔다.  

   

나를 감싸고 있는 과육에는 달콤한 향기가 났다.  

     

누구든 반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나는 훌륭한 존재였다. 


나는 그것이 자랑스러웠다.      



저 애는 곧 팔려갈 거야.  

형제들이 수군거렸다. 


나는 형제들의 말을 무시했다. 그들이 나를 시기한다고 생각했다.  


나도 팔려가고 싶다.

형제 중 누군가 말했다. 


만약 네가 예뻐지지 않는다면 팔려 가는 일은 절대 없을 거야.


그럼 어떻게 돼.


그냥 버려질 뿐이야. 


순간 나는 팔려가는 게 좋은 것이라고 착각할 뻔했다. 



사실 우리가 아는 것은 팔려가는 것과 버려지는 것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바람이 알려주기 전까지 팔려가고 싶어서 뽐을 내기도 했다. 


팔려가느니 차라리 버려지는 게 나을 수도 있어. 

마침 지나가던 바람이 말했다. 


왜!

내가 가장 먼저 나서서 바람을 붙들고 물었다. 


팔려 가는 순간 괴물들이 너희를 먹어치울 거야. 

어떤 괴물은 너희를 씨째 먹어치운다고.  

바람은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예쁜 나를!

바람의 말이 내겐 너무 터무니없이 들렸다. 



하지만 햇볕까지 나서서 말하는데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바람의 말이 맞아. 그들은 너희들뿐만 아니라 무엇이든 먹어치우는 괴물이야. 

씨째 먹는다는 것도 사실이고. 

괴물들은 과육보다는 씨를 더 좋아하기도 해. 

아마 머지않아 지구도 삼켜버릴 걸.    


형제들 대부분은 바람과 햇볕의 충고를 금방 잊어버리고 말았지만 나는 두려움에 떨었다.  


내 운명은 정해져 있었어. 고작 버려지거나 팔려가는 것이 내게 주어진 운명이지. 버려지든 팔려가든 결과도 크게 다르지 않아. 짐승의 먹이가 되든 괴물의 먹이가 되든 그게 무슨 차이야. 


나는 죄없는 바람과 햇볕을 원망했다. 



네 운명을 네가 어떻게 할 수는 없지만 삶이 두렵지 않다면 운명에 도전해 볼 수는 있어.

갑자기 다가온 비가 말했다. 


어떻게!

나는 귀를 쫑긋 세웠다.


삶이 두렵지 않아?

 

어차피 죽을 건데.


아니 죽음 말고 삶 말이야.


삶이 왜 두려워. 걱정마 난 하나도 안 두려워.


어쩌면 죽음보다 열 배, 아니 백 배 더 고통스러울 수 있어.


그래도 난 삶을 택할래. 내 운명을 개척할 수 있게 해줘.


누가 해줄 수 있는 건 아냐. 하지만 넌 네가 가지고 있는 향기롭고 맛 있는 과육을 이용해 어디로든 갈 수 있을 지도 몰라. 


거기가 어딘데?

나는 비의 말을 알아듣지도 못하고 그곳이 어딘지 부터 물었다.


그건 나도 모르지. 하지만 분명한 것은 네가 운 좋게 그곳에 도착하기만 하면 넌 나무가 될 수도 있을 거야. 


그러니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냐고. 난 이렇게 꼼짝없이 매달려 있는데. 


내가 알려줄 수 있는 건 팔려가기 전에 이 나무에서 떨어지는 거야. 그게 네 운명의 또다른 시작이 될 수도 있어. 



나무에서 떨어지면 죽잖아!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난 곧 떠나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럼 제발 나를 떨어트려 줘, 비야.   

나는 쏟아지는 비에게 사정했다. 


하지만 비가 애쓴 보람도 없이 나는 나무에서 떨어지지 못했다.  



내가 가장 아름답게 빛나던 어느 날이었다. 

나는 거친 손아귀에 붙잡혀 나무와 떨어졌다. 

나는 그대로 괴물들의 먹이가 될 운명이었다.



하지만 운명은 내 편이었다. 

나는 상자로 옮겨 담는 과정에서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다행인 것은 괴물들이 내가 떨어진 것조차 몰랐다.  


막막한 시작이었다.



마침 벌레가 다가왔다. 


어쩔 수 없기도 했지만 나는 눈을 질끈 감고 내 예쁜 살을 벌레가 조금 떼어먹도록 내버려 두었다.      


내가 살 수 있는 곳으로 나를 데려다줘.

나는 벌레에게 부탁했다.


난 지금 배가 너무 고파서 기운이 없어. 우선 배를 좀 채우고 나서 데려다줄게.

벌레는 먹느라 웅얼웅얼 대답했지만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런데 넌 어디로 갈 건데?

허겁지겁 먹던 벌레가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몰라. 어디로 가야 하지? 내가 살 수 있는 곳이 어디지?

나는 벌레에게 물었다. 

하지만 벌레는 먹느라 바빠서 대답하지 않았다. 



그냥 가면 어떻게. 나를 데려다줘야지.


난 벌레야. 내가 어떻게 너를 데려다 주니. 넌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르잖아. 

벌레는 배만 채우고 달아났다. 

 

벌레 말이 맞았다. 나는 어디로 가야하는지조차 몰랐다. 

그러나 어쩐지 예쁜 내 몸에 상처가 난 게 억울했고, 마음이 아팠다. 


이 근처에 다람쥐가 살아. 그 다람쥐는 너를 어디로든 데려다줄 수 있을 거야. 

벌레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렇게 말했다. 


그 다람쥐를 만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데.


그건 나도 몰라. 어차피 넌 아무것도 할 수 없잖아. 그냥 기다려. 

운이 좋으면 다람쥐가 너를 찾아올 거야. 그 다람쥐는 영리하니까. 

너에게 행운이 빨리 찾아와 주길 빌게. 



벌레가 빌어준 덕이었는지 모른다. 

슬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다람쥐가 찾아왔다. 

나는 다람쥐를 보는 순간 전율했다.


이젠 살았다.

금방 슬픔을 잊고 나도 모르게 외쳤다.    

다람쥐는 사방을 힐끔거리며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슬그머니 두려움이 몰려왔다. 나는 용기를 냈다. 


달콤한 내 살을 드릴게요. 

대신 저를 안락한 곳으로 데려다주세요.


세상에 안락한 곳은 없단다. 

사방천지가 위험 투성이지. 


그래도 조금 나은 곳이 있을 거 아니에요. 

저에게 어울리는 그런 곳이면 더 좋겠지만.


아저씨는 지금 배가 몹시 고파서 생각할 겨를이 없구나. 

우선 네 살을 조금 먹을게. 


다람쥐는 내 살을 허겁지겁 갉아먹었다. 


거의 절반쯤 먹었을 때였다. 

다람쥐 아저씨가 갑자기 달아나버렸다. 

무엇엔가 놀란 것 같았다. 


아저씨 왜 그러세요. 


나에게 위험이 닥쳤단다. 


저를 어디로든 데려다주셔야죠.


나는 안락한 곳을 몰라. 

아니 세상 어디에도 안락한 곳은 없어. 

위험은 늘 도사리고 있거든. 


다람쥐는 잽싸게 어디론가 몸을 숨겼다. 



나는 그제야 커다란 새 한 마리가  낮게 날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새는 나에게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다. 


독수리 아주머니, 내 살을 드시고 나를 어디로든 데려가 주세요. 

나는 용기를 내어 외쳤다. 


독수리 아주머니는 내가 하는 말을 못 들었는지 공중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머물러 있었다. 


독수리 아주머니, 여기 좀 보세요. 

나는 다시 있는 힘을 다해 소리쳤다.     


그때였다. 공중에 정지해 있던 독수리가 쏜살같이 내려와 한쪽 발로 나를 낚아챘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하늘로 솟구쳐 올라갔다. 

그 속도가 너무 빠르고 또 너무 높이 올라가서 무섭고 어지러웠다. 



독수리는 순식간에 산을 넘고 강을 건넜다. 

넓은 평지를 지나서 또다시 산을 넘었다. 


데려다 달라고 해놓고 왜 말을 안 하니?


모르겠어요. 세상은 처음이거든요. 


그럴 줄 알았다. 

자신이 어디로 갈지 알고 있는 것들이 몇이나 되겠니. 

분명한 것은 누구나 다 처음이고 시작이라는 것이다. 


독수리는 공중에서 나를 놓아버리고 멀리 날아가버렸다.  


 


독수리 아주머니가 나를 너무 꽉 움켜쥐어서 간신히 붙어 있던 살들이 으스러진 데다 

그나마 땅에 부딪치면서 내 예쁜 살들이, 아니 상처투성이던 살들이 산산조각 흩어져버렸다. 


나는 이제 아무것도 내어줄 것 없는 초라한 알몸이 되었다. 

어딘지 알 수 없는 풀숲에서 나는 며칠 동안 나뒹굴었다. 

내 꿈은 사라지고 실낱같은 희망조차 없는 날이 이어졌다. 

  


폭우가 쏟아졌다. 

나는 불어난 흙탕물에 휩쓸려 어디론가 떠내려갔다. 

밤낮이 여러 번 바뀌는 동안 나는 풀과 나무에 걸려 머물기도 했다. 

마구 흔들리는 물결에 휩쓸려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난 적도 여러 차례였다. 

그럴 땐 또 얼마나 많은 날이 흘러갔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언제부턴가 점점 물이 얕아지고 있어서 나는 마음이 놓였다. 

하지만 갑자기 소용돌이가 나를 덮쳐 정신을 잃고 말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 없다. 

의식을 되찾았을 때 사방은 어둠뿐이었고 축축한 그 무엇이 나를 짓누르고 있었다. 

나는 살을 에이는 추위 속에서 이를 부딪혀 가며 떨다가 기절했다. 

다시 깨어나면 쪄 죽을 것 같은 열기가 엄습해 왔다.  

대지의 학대는 그칠 줄 몰랐고     

고통스럽고 불행한 날들은 오랜 세월 반복되었다.

내 몸은 점점 부서져내렸지만 나는 정신을 잃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죽지 않기 위해 무엇이든 하려고 애썼다.  

   


     


죽어서 천당에 온 줄로 착각했다. 

하지만 이곳은 천당이 아니었다. 

다시 내가 살아가야 할 세상이었다.      


내 꿈을 잘 부탁해.

나는 햇볕과 바람에게 인사를 건넸다.

뒤늦게 찾아온 비와도 깊은 포옹을 나눴다.   


그러나 반가운 인사는 잠시였다. 

친구들은 내 꿈을 시기라도 하는 것인지 

냉혹하게 몰아부쳤다.  



나는 바람이 흔들면 바람에 몸을 맡겼다.

때로 꺾여서 넘어졌지만 안간 힘을 다해 일어났다.



햇볕은 나를 죽음 직전까지 몰고갔지만 

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포기하지 않고 버텼다.  



내 사랑하는 친구 비가 나를 뿌리째 휩쓸어버리려고 했을 때만큼은 

정말 견디기 힘들어 죽을까도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대지를 움켜잡고 버텼다. 

어쩌면 대지가 나를 붙들어 주었는지 모른다.    


그제야 나를 어둠속에 가두고 학대를 일삼던 대지가 친구였다는 걸 깨달았다. 


대지야, 네가 나를 싫어하는 줄 알았어.


그런 말 마. 난 아무 것도 한 게 없어. 너를 살린 건 햇볕과 바람과 비란다.




고마워 친구들아. 난 너희들이 나를 못 살게 구는 줄 알았어.

나를 찾아온 햇볕과 바람에게 말했다.  


네가 자라고자 했기 때문에 자란거야. 우린 그저 네 곁에 있었을 뿐이야. 


고마워 비야. 

난 네가 나를 죽이려고 하는 줄 알았어.

언제나 한발 늦게 찾아오는 비에게 말했다. 


아니야. 네가 꿈을 가졌기 때문에 살아 있는 거야. 

만약 너에게 꿈이 없었다면 난 너를 죽게 내버려 둘 수 밖에 없었단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외롭고 아프고 슬펐던 모든 순간이, 

고통스럽고 외로웠던 그 많은 날들이, 

선물이었다.


그토록 원망하고 미워했던 친구들이 내게 준 선물.


친구들아, 너희가 있어서 내 꿈이 이루어졌어.

그 후 나무는 고통과 불행과 역경이 꿈을 꾸게 하고, 꿈을 성장시키고, 꿈을 이루어주는 친구라는 걸 믿어 의심치 않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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