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쨌거나 나중에 그 대학에 들어가긴 했지만 동철이 대학생이라는 건 당시로서는 터무니없는 거짓말이었다.
동철의 대학생 행세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동철은 여대생들과 함께 해변에 나가 술을 마시고 해변나이트클럽에까지 따라갔다가 새벽에야 돌아왔다.
어쩐 일인지 여대생들은 동철을 오빠처럼 따르고 의지하고 있었다.
월인은 새벽에야 돌아온 동철을 소나무 숲 가운데로 데리고 가서 정강이를 걷어찼다. 그리고 거짓말을 그만 두라고 형에게 명령했다.
그러나 동철은 술 냄새를 풍기며 능청스럽게 웃었다.
너를 대학생이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너한테서는 아직 젖내가 나는 걸 난들 어쩌겠냐. 넌 아직 키도 작잖아. 어서어서 형보다 더 커야지.
지금은 월인이 동철보다 키가 좀 더 크지만 당시만 해도 월인은 교실 맨 앞자리에 앉을 정도로 키가 작았던 것이다.
동철의 만행을 더 두고 볼 수 없던 월인은 그가 여대생 중 하나와 나란히 물을 뜨러 갔을 때 버스를 타고 집으로 와버렸다.
어머니께서 왜 혼자 왔느냐고 물었다. 월인은 그냥 지루하고 재미없었다고 둘러댔다.
동철은 무려 일주일이나 더 진하해수욕장에서 지낸 뒤에 새까맣게 타서 돌아왔다.
월인은 그렇게 모든 것이 다 끝난 줄 알았다. 하지만 그해 가을에 동철의 사기 행각은 들통이 나고 말았다.
동철과 함께 이른 아침부터 물을 뜨러 갔던 그 여대생이 찾아왔던 것이다. 동철은 가방을 싸 들고 독서실로 도망가 버렸다.
그녀는 돌아가지 않고 기다렸다가 어머니를 만나서 임신 사실을 털어놓았다.
그녀도 여대생이 아니라 섬유공장에 다니는 야간 고등학생임이 어머니의 추궁으로 드러났다.
어머니는 스무 살쯤 된 늦깎이 여고생을 산부인과에 데리고 가서 중절 수술을 받게 했다.
늦깎이 여고생의 본명은 수진이가 아니라 명숙이라는 것도 자연스럽게 밝혀졌다.
어머니는 그 여대생을 위로하기 위해 자신의 중절 경험을 털어놓기도 했다.
그때 월인은 그렇게 한 사람이 태어날 수도 사라져버릴 수도 있다는 것에 작지 않은 충격을 받았었다.
어머니의 뱃속에서 지워져 버린 생명이 자신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며칠 동안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던 것이다.
명숙이 누나가 어머니의 보살핌을 받으며 사나흘 정도 몸조리를 하는 동안 동철은 집에 들어오지 못하고 독서실에서 지냈다.
명숙이 누나가 공장 기숙사로 돌아가던 날 월인은 형 대신 사과했다.
그날, 해수욕장에서 형이 고등학생이라는 걸 말해주지 않아서 죄송해요. 형이 미안하다고 전해달래요.
뒷말은 월인이 그녀를 위로하기 위해 지어낸 말이었다.
내 잘못이지 뭐.
명숙 누나, 그녀의 눈가를 적시던 물기를 월인은 지금도 기억한다.
그것은 첫 경험을 치른 처녀의 쓰디쓴 패배 의식이었고 벗어날 수 없는 자신의 운명에 대한 성찰로 읽혔다.
월인은 성장하면서 슬픔으로 가득하던 그녀의 얼굴과 쓸쓸하게 돌아서던 그녀의 뒷모습을 그렇게 해석해 냈다.
- 그 여자는 정리했어?
월인의 생각은 형의 다른 여자에게 미쳤다.
- 정리할 수 있었으면 내가 이렇게 됐겠냐.
- 애라도 있는 거야, 형.
- 응.
- 정말이야!
- 그래, 두 돌 지났어. 그러니 장 검사, 너도 그 여자 그 여자 하지 말고 형수라고 해.
동철은 맥주를 따라 마신다.
- 고맙다. 형은 하난데 형수를 둘씩이나 만들어줘서.
- 형을 세상에 다시없는 죄를 지은 사람처럼 보지 마. 막말로 좀 있는 놈들 치고 애첩 안 거느린 놈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 조선시대든 로마시대든 동서양을 막론하고 있는 놈들은 애첩을 거느려왔잖아. 요즘도 드러내지 못할 뿐이지 달라진 건 없어. 장 검사가 그런 사실을 모를 리 없지만.
- 형은 언제나 그 모양이냐.
월인도 다 아는 사실이다. 월인이 공직생활을 그만두고 다니던 회사(법무법인) 대표는 드러내놓고 애첩의 아파트를 드나들었고 심지어 그곳으로 월인을 불러들이기도 했다. 예순이 가까운 대표의 애인은 서른도 채 안 된 여자였다.
- 장 검사가 좀 유별나지. 어쨌든 오늘 작은 형수 한번 만나볼래?
- 데리고 왔어, 여길?
- 지금 근처 모텔에 있어.
- 어쩌려고, 내일 형수도 오고 얘들도 올 텐데. 내일 가족 모임을 난장판으로 만들 작정이야.
- 그러니까 니가 가서 형수를 달래.
- 달래다니!
- 니 작은형수는 우리 식구들에게 인정받고 싶어 해. 자기도 엄연히 며느리니까 어머니 칠순 모임에도 아버지 추도식에도 참석하겠다고 그래.
- 두 사람 다 정신이 나갔다.
- 그러니까 너라도 좀 만나 줘. 그러면 마음이 좀 가라앉을 거 아냐. 나하고 산지가 벌써 몇 년인데 우리 식구들은 코빼기도 못 봤으니 자기 딴엔 좀 그런가 보더라.
- .......
- 오라고 전화한다.
동철은 휴대전화를 찾느라 주머니를 더듬는다.
- 여기선 안 돼. 모임 장소인데다가 우리 직원들이 뭐라겠어.
월인은 형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근처에 있는 카페에서 작은형수 수미를 만난다. 그 여자 때문에 어머니의 칠순 잔치를 망칠 수 없는 노릇이기도 하다.
작은형수 수미는 이십 대 후반 정도로 생각보다 어리다. 그래서인지 수미를 보는 순간 월인의 머릿속에 중절 수술을 받고 와서 어머니의 간호를 받던 명숙이 누나의 얼굴이 떠오른다.
명숙 누나와 같은 여자라는 생각이 든 건 순전히 월인의 착각일 것이다. 냉정히 분석해보면 두 사람은 닮은 구석이 있기는커녕 완전히 다른 부류라는 것이 명백해진다.
명숙이 누나는 예쁘긴 해도 시골스러운 데가 있고 가진 것도 배운 것도 없이 섬유공장에 다녔다.
그녀는 삶을 경멸하며 살다가 자신에게는 운명을 바꿔 줄 왕자나 다름없는 공직자의 아들과 스캔들을 일으키는 데는 성공했다.
그러나 나이 차이와 환경을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은 버림받는 비운을 겪는 것으로 그쳤다.
반면에 수미는 척 봐도 귀족적인 데다 대학까지 나와서 어쩌다 본처가 아닌 후처, 또는 첩으로 살게 된 데 대한 슬픔이 켜켜이 내려앉은 얼굴이다.
형이 아무리 전도유망한 공직자라고 해도 이제는 그런 기대마저 바로 자신으로 인해 깨진 바가지가 되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니까 같은 삶이어도 격이 다르고 슬픔의 격 또한 천양지차인 것이다.
자기 운명을 개척하는데 실패한 명숙 누나보다 운명적 사랑을 선택한 수미의 슬픔에 월인은 더 연민이 간다. 명숙 누나는 과거의 일이고 수미는 현재의 일이어서 그렇겠지만.
- 어떻게 조카가 두 살이 되도록 그렇게 지내셨습니까. 그동안 많이 힘드셨겠습니다.
야단부터 쳐야겠다는 생각과 달리 월인은 수미를 위로한다. 동철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웃고, 수미는 수줍은 듯 얼굴을 붉힌다.
- 하지만 형수님,
월인은 일부러 형수님에 힘을 주어 부른다.
- 내일 행사에 형수님이 가족 앞에 나서는 것은 좋은 생각이 아닙니다. 물론 형수님도 속상해서 형한테 투정부리시는 거겠지만.
- 이해해주셔서 고마워요.
수미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린다.
- 그런 거였어. 난, 당신이 너무 쎄게 나오니까 겁먹었지.
수미의 눈물을 닦아주는 동철이 능청스럽다.
월인은 카페에서 나오면서 명숙이 누나의 마지막 눈물을 떠올린다. 격은 천양지차인데 왠지 두 여자의 눈물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 내가 형 같은 사람 혼내주려고 검사가 됐었는데.
- 검사보다는 변호사가 장 검사 적성에 잘 맞는다는 걸 형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 언젯적 검산데 자꾸 검사 검사 그래.
- 그럼 전 검사 그러냐.
- 앞으론 검사란 소린 빼. 현직 검사가 아닌데 그러는 건 사기고 괜한 과시야.
- 어쨌든 오늘 일은 고맙다, 장 검사. 전직이든 현직이든 나는 내 동생을 검사라고 부르는 게 좋다. 권력의 냄새가 나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