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그녀의 두번째 첫사랑

15. 실연의 상처

by 이세벽

벌써 몇 번째 산 아랫길을 오가는 것인지 모른다. 마침내 월인은 호반로 갓길 위에 올라서서 마주 보이는 호수로 시선을 던진다.

길 끝에서 호반로 양쪽을 바라보면, 오른쪽 읍내 방향은 은행나무 가로수 뒤로 급하게 휘어져 묻혀버리고, 왼쪽 청남대 방향도 직선으로 달리다 어둠 속으로 아득히 지워지고 만다.

정기진료를 받으러 병원에 갔을 때, 월인은 의사에게 자신이 겪고 있는 강박증과 불면증에 대해 털어놓았다. 환청이 들리기도 하고 환영도 보인다고.


월인은 의사의 지시에 따라 간호사가 내민 수십 문항의 질문지를 읽고 시험 치듯 답안을 작성했다.

의사는 지난번 검사한 갑상선수치가 정상으로 회복되었다고 말하면서도 밝은 얼굴이 아니었다.


- 약을 드시면 좋아지실 겁니다. 의지가 강하신 분이니까 걱정은 안하지만 약은 꼭 챙겨드셔야 합니다.

하지만 월인은 며칠 전부터 약복용을 중단하고 먹지 않고 있다.


약을 먹고 나면 시도 때도 없이 졸음이 몰려오는 것도 문제지만 정신이 맑지 않고 안개 낀 듯 흐려지는 때문이다.


차라리 환청과 환영을 존재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게 나을 것 같다.


하늘로 시선을 돌리자 몇 개의 별들이 말을 걸어온다.


그러나 수직으로 하강하는 별들의 음성은 지상에 도달하지 못하고 사멸한다.

천강과 이 길을 걸을 때는 별과의 소통 부재 따위는 없었다.


천강은 온몸으로 별의 음성을, 사멸해버린 별의 소리를 척척 해독해 냈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천강은, 향기로운 천강의 몸은 별들의 언어를 자동으로 번역해주는 동시 통역기였던 셈이다.

어둠 속 호수가 두려워지는 것은 걸어 들어오라고, 어서 걸어 들어와 편히 누우라고 부추기는 목소리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천강과의 소통 부재 탓이다.


사랑을 잃어버린 남자는 목숨까지도 버려야 할지 모른다.


월인은 그런 생각으로 눈시울이 젖는다.

약을 다시 먹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하지만 먹지 않으리라는 것도 월인은 알고 있다.

호반로로 달리는 자동차 불빛이 어둠을 들추면 들판의 벼들이 도깨비처럼 푸르딩딩하게 웃는다.

그러나 그들은 꿈결인 듯 어깨를 한 번 뒤척이고는 이내 다시 어둠을 이마까지 끌어 덮는다.

벼들의 밤잠은 곤하다.

길섶의 풀들은 잠들지 않았던 것처럼 미소 짓고 있는 것 같아도 사실은 깨지도 않고 낮게 코를 고는 중이다.

산 아랫길 옆으로 흐르는 계곡은 남의 애인 같은 밤하늘을 올려다보면서 외롭다고 운다. 흐흐흑 흐흐흑........

산기슭에 기대어 누운 떡갈나무는 잠 못 이루고 뒤척이다 천식을 앓는 것처럼 잔기침을 연신 해댄다.

월인은 문득 걸음을 멈춘다.


갑자기 길섶의 풀들 속에서 반딧불이들이 하나로 모여 등대처럼 적막한 바닷길을 연 것이다.


헤아려보지 않아서 몇 번째 오가는 길인지 알 수 없지만 월인에게는 그저 길 아닌 길, 길 없는 길이었다가 비로소 보이는 바닷길이다.


누군가 뛰어들라고 충동질이다. 돌아보면 아무도 없다.


월인은 그제야 환상이고 환청임을 깨닫는다. 까닭 없이 자꾸 눈물이 난다.


예정된 진료일이 돌아오기 전이라도 의사를 만나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월인은 환상과 환청 속에서 간신히 현실의 길을 찾아 조심스럽게 걸음을 뗀다.


발바닥으로 아스팔트의 촉감이 전해진다. 월인은 그제야 자신이 맨발임을 깨닫는다.


월인이 의사를 만나 부작용이 적은 약으로 바꿔 달라 해야겠다고 다짐하는데 위로의 음성처럼 어렸을 때의 기억이 떠오른다.



아직 어린 그. 읽고 있던 책을 방바닥에 던져버린다.


이가 빠진 동그라미가 마침내 자신에게 꼭 맞는 조각을 찾은 뒤에 노래를 부르지 못하게 되는 것 때문에 화가 난 것이다.


게다가 이가 꼭 맞는 조각을 내려놓고 또 다른 조각을 찾아 나서는 모습은 절망적이었다.


마음으로는 듣지 못하는 멍청한 동그라미였어. 무슨 노래가 더 필요해. 이가 꼭 맞는 것만큼 아름다운 노래가 어디 있다고.

이가 맞지 않으면 또 어때서. 함께 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행복일 텐데…….


도대체 작가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어린 그에게서 알 수 없는 우울을 감지한 어머니는 아버지 생신상에나 올려놓는 불고기를 해 주셨다.


그러나 그는 먹지 않겠다며 고집을 피웠다. 어머니에게 투정을 부려보는 것이었다.


그는 결국 불고기 냄새에 이끌려 부엌으로 들어가서 불고기 한 점을 집어 먹었다. 그리고 그만 뚜껑을 덮어야지 생각했지만 손이 멈춰지지 않았다.

그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불고기를 먹어치웠다. 왜 우는 건지 그 이유는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어머니는 그가 부엌에 들어가는 것을 봐놓고도, 또 불고기가 없어진 걸 알면서도 모른 척했다.


대신 다음 날 오후에 명절이라도 돌아온 것처럼 새 옷을 사 오셨다. 어머니가 보기에도 풀 죽은 어린 그가 안쓰러웠던 것이다.


새 옷 때문은 아니지만 마침내 그는 이가 맞는 조각조차 내려놓고 또다시 짝을 찾아 나서야만 하는 이가 빠진 동그라미의 그 막막한 여정의 아픔을 극복했다.

어쩌면 잊어버린 것이겠지만.

대신 그에게는 자신의 조각은 누굴까 하는 상상으로 사람들을 바라보는 습관이 생겼다.

남자친구나 옆집 아주머니가 자신의 조각처럼 군다고 느껴지면 그는 거부의 표시로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달아났다.


영문을 모르는 상대방은 멍하니 어린 그의 뒷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마음에 드는 여자아이를 자신의 불완전한 동그라미 속에 끼워 보는 상상을 하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거나 물웅덩이에 빠지는 일도 종종 있었다.


그것을 목격한 어머니가 그냥 지나칠 리 없었다.


다음 날 어머니는 영양제를 사 왔다. 그가 허약해진 탓이라고 지레짐작 했던 것이다.


짙은 갈색 병에 든 약은 지렁이 똥같이 생긴 데다 맛까지 니글니글해서 구역질이 났다.

그렇지만 어머니가 엄하게 감시하는 통에 몰래 뱉어버릴 수가 없었다.

‘약’은 본래 먹기가 나쁜 것이지만 결국 너를 건강하게 만들어 줄 거야.


어린 그가 헛구역질을 해대며 아픈 게 아니라고, 조각을 찾아 떠나는 동그라미 때문이라고 설명과 변명을 번갈아 해도 소용없었다.


그 무렵이었다.


그는 어머니와 함께, 어쩌면 어머니의 손에 이끌리어 길을 가다가 한 여인과 마주쳤다.

그 여인을 한 번도 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직감으로 다리 건너 방이 많은 집에 세 들어 산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어린 그는 그 여인의 미소와 마주치는 순간 심한 어지럼증으로 비틀거렸다.

사실 그 여인은 어머니에게 인사를 하고 나서 그를 쳐다보며 웃었던 것뿐이었다.


다행히 그는 어머니의 치맛자락을 붙들고 간신히 버틸 수 있었다.


그 여인은 어머니와 대화를 나누는 중에도 그를 보며 쉼 없이 웃어 보였다.

마침내 헤어지려 할 때 그 여인이 그를 향해 의미심장한 눈웃음을 던졌다.

왕자님, 제가 왕자님의 조각이에요.


어린 그는 그 여인의 눈웃음을 그렇게 해석했다.


그 여인은 아쉬운 듯, 혹은 어린 그가 알아차리지 못했다고 생각한 듯 고개를 돌려 다시 한번 뜨거운 눈웃음을 던졌다.


제가 왕자님의 조각이라고요.


여인의 눈웃음을 가슴 언저리에 맞은 그는 의식을 잃고 어머니의 발등 상에 풀썩 쓰러졌다. 어머니의 치맛자락을 꼭 붙들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더 불행한 일은 이내 의식이 돌아왔다는 것이다. 하지만 창피해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그는 실신한 척 실눈을 뜨고 여인의 치마 아래로 곧게 뻗은 다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은 맑고 깊은 호수 같았다. 아니 호수의 수면 위로 자란 신비한 나무 같기도 했다.


동혁아, 동혁아, 장동혁, 어머니는 그를 흔들어보다가 들쳐업었다.

몸이 많이 허약한가 봐요.

여인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영양제를 먹이는데, 별 효과가 없나 봐.


어머니는 등에 업힌 동혁의 엉덩이를 방정맞게 두드려댔다.


아휴, 귀여운 왕자님께서 이렇게 허약해서 어쩌나. 속상하시겠어요.

여인은 어머니의 등에 엎드린 어린 그의 볼을 쓰다듬었다.


그날 오후 긴 낮잠에서 깨어난 그는 흔들리는 땅을 밟으며 집을 나섰다.

속이 울렁거렸고 자신의 긴 그림자가 앞을 막아섰지만 흐흐 웃음을 흘리며 개천을 건너려고 다리 위로 올라섰다.


자전거를 타거나, 술 취한 채 좁은 다리를 건너다가 추락하는 사람을 종종 본 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순간 겁을 집어먹었다.

그렇지만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는 이내 용기를 내어 흐느적흐느적 다리를 건넜다.


누구니?


등 뒤에서 낯익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론가 어머니를 만나러 종종 집에 왔던 여자였다.


어머, 주인집 아들이잖아. 혼자 왔니? 여기까지 왔으니까 들어가자. 누나가 맛있는 과자 줄게. 엄마한테는 여기 왔단 소린 하지 마라.


그는 여자의 손에 이끌려 집 마당으로 들어섰다. 여자에게서는 비누 냄새와 담배 냄새가 섞여 났다.

눈웃음으로 그의 가슴을 멍들게 했던, 아니 어린 그를 기절시켰던 그 여인은 치마를 허벅지까지 걷어 올리고 마루에 앉아서 화장을 하고 있었다.


귀여운 왕자님이 여긴 어쩐 일이야? 지금은 괜찮니? 어머, 왕자님 얼굴이 하야네. 어디 아픈 거 아니니!

그런 말도 했다. 그러나 그는 그 여인의 다리 사이에 핀 하얀 꽃을 보고 또다시 혼절하고 말았다.

그날 밤, 어지럼증은 구토증으로 바뀌었다.

그는 등을 두드려 주는 어머니에게 말했다.

어머니, 운우관 누나가 제 조각 같아요.

그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방이 많은 그 집에 사는 여인들을 두고 '운우관 애들'이라고 하는 것을 언젠가 들은 기억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의 어머니는 깜짝 놀라서 소리쳤다. 여보, 동혁이가 이제는 헛소리까지 해요.

어린 그. 아버지 등에 업혀 병원을 오갔다.


다행히 구토증은 멈췄지만 대신 열병에 시달렸다. 그리고 염소똥을 쌌다.


의사가 밝힌 그의 병명은 장티푸스였다. 그의 형은 동생이 염소가 되어가고 있다며 슬퍼했다.


어린 그. 며칠 동안 부모에게 근심 걱정을 끼치고 나서야 겨우 병석에서 일어났다.



집 앞까지 다 왔는데 뒷주머니에 넣어두었던 스마트폰이 울린다. 그는 아쉽게도 위로가 되어주던 기억에서 빠져나와 스마트폰을 꺼낸다.


장동철, 형이다.


가족 모임은 내일인데 형한테 왜 전화가 왔는지 궁금증이 먼저 인다. 어쩌면 못 온다고 전화를 한 건지 모른다. 형은 그런 사람이니까.

명절 때도 이런저런 핑계로 본가에 내려오지 않고 어머니한테 전화만 겨우 하는 사람이다. 대개는 해외 출장 중이거나 비상 근무라고 둘러대는데 형수는 믿지 않는 눈치다.

그래서인지 형수의 얼굴은 언제나 그늘져 보였다. 그러나 설마 아버지의 추도식 겸 어머니 칠순인데 안 올까 싶기도 하다.

소풍에 도착하니까 송현이 대리가 형이 기다리고 있는 방으로 월인을 안내한다.


형 동철이 음식을 먹고 있다가 손을 들어 보이며 웃는다. 양복 차림이 아니고 점퍼를 입고 있다.


형 동철은 월인이 앉기도 전에 직원들이 네 이름도 모르더라 하면서 묻는 얼굴이다.


- 우리는 관습상 어른 이름은 잘 안 쓰잖아. 그래서 아호, 택호 같은 이름을 따로 지어 불렀고.

월인은 형 동철 앞에 마주 앉아 물을 한 모금 마시면서 안간힘을 다해 우울을 몰아낸다. 억지로라도 즐거워지려고, 밝은 표정을 지어 보이려 애쓴다.


- 우리도 그런 거야. 천강 씨 말로는 애명愛名이래. 연애시절부터 우리는 그 이름만 썼어. 은진 씨는 천강, 나는 월인. 사람들은 우리를 월인과 천강이라 불러. 애명을 진짜 이름으로 착각하는 사람도 있고.

형이라고 해도 오랫동안 만나보지 못한 탓인지 살짝 긴장되기도 하고 또 생각보다 형의 얼굴이 반갑다. 그래서 말이 많아진다.


우울하던 기분들이 어딘가로 숨어버리고 빛이 든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


- 애명! 그거 사전적 의미가 뭐냐?


- 사전엔 사랑애 이름명 그런 말 없지. 슬플 애哀 울 명鳴은 있더라고.

- 그거 슬피 운다 뭐 이런 뜻 아니냐.


- 사전에 나오는 뜻은 그렇지.


- 애명을 지어서 장 검사가 슬픈 운명에 처한 거 같다. 슬피 울 이름이잖아.


- 그냥 호 같은 건데 비약할 건 없어.


월인은 웃는다.


- 그건 그렇고. 장 검사 얼굴이 말이 아니다. 많이 힘드나 보네.


- 잠을 못 자서 그래.


- 어머닌 걱정이 크시다. 제수씨 영영 기억을 못 찾는 거 아니냐고.


- 좋아지고 있어.


- 그러면 좋지. 내일은 못 나오지. 제수씨 얼굴 한 번 보고 싶다야.


- 천강 씨가 혼란스러워할 거야.


- 어머니께서는 제수씨 얼굴이라도 보시겠다고 여기서 모이자고 한 거잖아.


- 그러지 않으셔도 된다고 말씀드렸는데 막무가내로 밀어붙이시네. 여기서 모여도 달라지는 건 없을 텐데.

- 어머니 병원 계실 때 제수씨 혼자 병간 다했잖아. 어머닌 그게 너무 고마우신 거야. 전화 드릴 때마다 말씀하신다.


- 좋은 사람인데.


월인은 목이 멘다.


- 장 검사 정말 힘들구나.


- 아냐.


- 아니긴 얼굴에 쓰여 있는데.


- 그런데 형이 어쩐 일로 다 왔어. 명절 때도 안 오는 사람이.


- 어머니 칠순인데 안 올 수 없지.


- 그렇다고 해도 하루씩이나 앞당겨 올 형이 아니잖아.


- 내가 좀 그렇게 살았지. 미안하다.


- 그런 소리 듣자는 건 아니고. 반가워서 그렇지.


- 사실은 말이야. 장 검사하고 상의할 일이 있어.


- 나한테?


- 그래. 나, 말이야.


- 무슨 일인데 형답지 않게 뜸을 들여.


- 나 공직생활 접어야 할 것 같다.


동철은 비로소 하루 앞당겨 온 이유와 그간의 사정을 월인에게 털어놓는다.


월인도 오랫동안 형수를 괴롭혀온 형의 바람기를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런데 결국 여자 때문에 공직에서 물러나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는 말을 형 입으로 직접 듣게 될 줄은 몰랐다.


동철이 처음부터 자신의 이중생활에 대해 솔직하게 털어놓은 건 아니다.


처음엔 젊은 나이에 고위직에 오른 게 무슨 죄냐며 일이 터질 때마다 사정의 칼바람이 목을 겨냥하고, 공무원윤리위원회다 청문회다 뭐다, 해서 툭하면 숨통을 조이는 공직생활이 이제는 정나미 떨어진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하지만 결국엔 수년간 이중생활을 해온 것이 감찰반에 적발되어 더는 공직에 몸담고 있을 수 없게 되었고, 있어 봐야 아무런 희망이 없다고 자백한다.


그렇다고 사업에 뛰어들 자신은 없고 해서 월인에게 변호사 사무실을 내자고 한다.


굵직굵직한 수임 사건은 자신이 맡아 올 테니까 이름만 빌려주면 변호사 두고 할 거란다.


월인은 형이 감찰반에 적발된 사항은 비단 그뿐이 아닌 것을 짐작하고 남음이 있다.


민원인과의 잦은 룸살롱 출입, 촌지 수수 등이 형의 목을 조이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 이상일지 모른다.

변호사 사무실을 내면 자신이 변호사 행세를 하고도 남을 사람이라는 것도 월인은 안다.


- 현직에 있을 때 형의 옷을 벗기지 못한 게 후회스럽다.


- 그때만 해도 아직은 청정무구였지. 털끝만큼도 오염되지 않았었다고. 사랑에 빠지지 않았다면 지금도 그랬을 거야.


- 그 말을 누가 믿어. 세 살 버릇 여든 간다더니........


월인은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정확한 나이는 기억할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월인은 중학생이었고 동철은 고등학생이었다. 그때만 해도 동철과 월인은 어른과 아이처럼 키 차이가 크게 났다.


동철은 월인을 비롯해서 동네 아이들 대여섯 명을 캠핑 가자고 꼬드겨서 진하 해수욕장으로 데리고 갔다.

가까이 일산 해수욕장이 있는데 굳이 거기로 간 것까지는 모르겠다. 동철은 모아 둔 용돈을 털어 텐트와 코펠 등의 캠핑 장비 일체를 마련했다.

그리고 동네 아이들을 불러 모아놓고 쌀, 라면, 된장, 고추장, 양파 등등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것들을 가져오게 했다.


다행인 것은 부모들이 동철이가 데리고 가는 거라서 마음이 놓인다며 기꺼이 필요한 것들을 내어주었다.

그러나 들떠서 떠들어대던 동철은 진하 해수욕장을 코앞에 두고 차멀미로 버스 뒷좌석에 누워버렸다. 캠핑장에 도착해서도 동철은 텐트를 치지 못하고 모래사장에 누워서 끙끙 앓았다.


그런데 한 무리의 여대생이 나타나자 동철은 언제 그랬냐는 듯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애들이 텐트를 잘 치고 있는데 괜히 잔소리하면서 여대생들을 힐끔거렸다.

여대생들은 텐트를 치지 못해서 난감해하고 있었다. 동철이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그는 자진해서 여대생들에게 텐트를 쳐주겠다고 나섰다.


여대생들은 못 이기는 척 동철의 도움을 받았다. 간간이 헤매기는 했지만 동철은 텐트를 치는 데 성공했다.

어디서 주워들은 풍월인지 텐트 주변에 그럴듯하게 고랑도 팠다. 그러고 나서 동철은 느닷없이 여학생들에게 담배를 달라고 했다.


여대생들은 무슨 소리냐는 듯 생뚱맞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망설이던 한 여대생이 가방 속에서 담배를 꺼내 동철에게 주었다.

동철은 먼저 담배 한 개비를 빼서 자신의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그러나 연기를 들이마시다가 기침을 하는 바람에 담배 못 피운다는 걸 들키고 말았다.

그렇지만 동철은 전혀 기죽지 않고 능청을 떨며 뱀이나 해충을 막아야 한다며 담배를 부숴서 텐트 주위에 뿌렸다.


동철은 여대생들에게 자신을 명문대에 다니는 대학생이라고 소개했다. 동철은 당시에 벌써 지금처럼 키가 컸기 때문에 여대생들은 의심하지 않았다.

또 필요 이상으로 영어를 구사해서 월인의 미간을 찌푸리게 했다. 하지만 여대생들에게는 먹혀드는 것 같았다.


그것으로 성이 차지 않았는지 동철은 과일을 깎거나 찌개를 끓이면서도, 심지어 돌을 던지면서까지 뉴턴과 아인슈타인, 호킹을 들먹였다.


그리고 만류 인력에서 상대성이론, 양자역학, 미적분 등등을 입에 올리며 명문대생임을 입증하려고 갖은 애를 썼다.


동철이 떠벌린 것들은 정기구독하고 있는 과학 잡지에서 읽은 것들로 월인도 대부분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여대생들은 완전히 속아 넘어가는 듯 보였고 간간이 미소 지으며 동철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여대생들의 마음을 전적으로 사로잡았던 것은 동철의 감상어린 하모니카 연주였다.

동철이 뒷주머니에서 하모니카를 꺼내 섬아기를 불기 시작하자 여대생들은 그대로 동철에게 빠져드는 눈치였다.


어쨌거나 나중에 그 대학에 들어가긴 했지만 동철이 대학생이라는 건 당시로서는 터무니없는 거짓말이었다.

동철의 대학생 행세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동철은 여대생들과 함께 해변에 나가 술을 마시고 해변나이트클럽에까지 따라갔다가 새벽에야 돌아왔다.


어쩐 일인지 여대생들은 동철을 오빠처럼 따르고 의지하고 있었다.


월인은 새벽에야 돌아온 동철을 소나무 숲 가운데로 데리고 가서 정강이를 걷어찼다. 그리고 거짓말을 그만 두라고 형에게 명령했다.


그러나 동철은 술 냄새를 풍기며 능청스럽게 웃었다.


너를 대학생이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너한테서는 아직 젖내가 나는 걸 난들 어쩌겠냐. 넌 아직 키도 작잖아. 어서어서 형보다 더 커야지.


지금은 월인이 동철보다 키가 좀 더 크지만 당시만 해도 월인은 교실 맨 앞자리에 앉을 정도로 키가 작았던 것이다.


동철의 만행을 더 두고 볼 수 없던 월인은 그가 여대생 중 하나와 나란히 물을 뜨러 갔을 때 버스를 타고 집으로 와버렸다.


어머니께서 왜 혼자 왔느냐고 물었다. 월인은 그냥 지루하고 재미없었다고 둘러댔다.

동철은 무려 일주일이나 더 진하해수욕장에서 지낸 뒤에 새까맣게 타서 돌아왔다.

월인은 그렇게 모든 것이 다 끝난 줄 알았다. 하지만 그해 가을에 동철의 사기 행각은 들통이 나고 말았다.

동철과 함께 이른 아침부터 물을 뜨러 갔던 그 여대생이 찾아왔던 것이다. 동철은 가방을 싸 들고 독서실로 도망가 버렸다.


그녀는 돌아가지 않고 기다렸다가 어머니를 만나서 임신 사실을 털어놓았다.

그녀도 여대생이 아니라 섬유공장에 다니는 야간 고등학생임이 어머니의 추궁으로 드러났다.


어머니는 스무 살쯤 된 늦깎이 여고생을 산부인과에 데리고 가서 중절 수술을 받게 했다.


늦깎이 여고생의 본명은 수진이가 아니라 명숙이라는 것도 자연스럽게 밝혀졌다.


어머니는 그 여대생을 위로하기 위해 자신의 중절 경험을 털어놓기도 했다.


그때 월인은 그렇게 한 사람이 태어날 수도 사라져버릴 수도 있다는 것에 작지 않은 충격을 받았었다.


어머니의 뱃속에서 지워져 버린 생명이 자신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며칠 동안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던 것이다.


명숙이 누나가 어머니의 보살핌을 받으며 사나흘 정도 몸조리를 하는 동안 동철은 집에 들어오지 못하고 독서실에서 지냈다.


명숙이 누나가 공장 기숙사로 돌아가던 날 월인은 형 대신 사과했다.


그날, 해수욕장에서 형이 고등학생이라는 걸 말해주지 않아서 죄송해요. 형이 미안하다고 전해달래요.


뒷말은 월인이 그녀를 위로하기 위해 지어낸 말이었다.


내 잘못이지 뭐.


명숙 누나, 그녀의 눈가를 적시던 물기를 월인은 지금도 기억한다.


그것은 첫 경험을 치른 처녀의 쓰디쓴 패배 의식이었고 벗어날 수 없는 자신의 운명에 대한 성찰로 읽혔다.

월인은 성장하면서 슬픔으로 가득하던 그녀의 얼굴과 쓸쓸하게 돌아서던 그녀의 뒷모습을 그렇게 해석해 냈다.




- 그 여자는 정리했어?


월인의 생각은 형의 다른 여자에게 미쳤다.


- 정리할 수 있었으면 내가 이렇게 됐겠냐.


- 애라도 있는 거야, 형.


- 응.


- 정말이야!


- 그래, 두 돌 지났어. 그러니 장 검사, 너도 그 여자 그 여자 하지 말고 형수라고 해.


동철은 맥주를 따라 마신다.


- 고맙다. 형은 하난데 형수를 둘씩이나 만들어줘서.


- 형을 세상에 다시없는 죄를 지은 사람처럼 보지 마. 막말로 좀 있는 놈들 치고 애첩 안 거느린 놈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 조선시대든 로마시대든 동서양을 막론하고 있는 놈들은 애첩을 거느려왔잖아. 요즘도 드러내지 못할 뿐이지 달라진 건 없어. 장 검사가 그런 사실을 모를 리 없지만.


- 형은 언제나 그 모양이냐.


월인도 다 아는 사실이다. 월인이 공직생활을 그만두고 다니던 회사(법무법인) 대표는 드러내놓고 애첩의 아파트를 드나들었고 심지어 그곳으로 월인을 불러들이기도 했다. 예순이 가까운 대표의 애인은 서른도 채 안 된 여자였다.


- 장 검사가 좀 유별나지. 어쨌든 오늘 작은 형수 한번 만나볼래?


- 데리고 왔어, 여길?


- 지금 근처 모텔에 있어.


- 어쩌려고, 내일 형수도 오고 얘들도 올 텐데. 내일 가족 모임을 난장판으로 만들 작정이야.


- 그러니까 니가 가서 형수를 달래.


- 달래다니!


- 니 작은형수는 우리 식구들에게 인정받고 싶어 해. 자기도 엄연히 며느리니까 어머니 칠순 모임에도 아버지 추도식에도 참석하겠다고 그래.


- 두 사람 다 정신이 나갔다.


- 그러니까 너라도 좀 만나 줘. 그러면 마음이 좀 가라앉을 거 아냐. 나하고 산지가 벌써 몇 년인데 우리 식구들은 코빼기도 못 봤으니 자기 딴엔 좀 그런가 보더라.


- .......


- 오라고 전화한다.


동철은 휴대전화를 찾느라 주머니를 더듬는다.


- 여기선 안 돼. 모임 장소인데다가 우리 직원들이 뭐라겠어.


월인은 형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근처에 있는 카페에서 작은형수 수미를 만난다. 그 여자 때문에 어머니의 칠순 잔치를 망칠 수 없는 노릇이기도 하다.


작은형수 수미는 이십 대 후반 정도로 생각보다 어리다. 그래서인지 수미를 보는 순간 월인의 머릿속에 중절 수술을 받고 와서 어머니의 간호를 받던 명숙이 누나의 얼굴이 떠오른다.


명숙 누나와 같은 여자라는 생각이 든 건 순전히 월인의 착각일 것이다. 냉정히 분석해보면 두 사람은 닮은 구석이 있기는커녕 완전히 다른 부류라는 것이 명백해진다.


명숙이 누나는 예쁘긴 해도 시골스러운 데가 있고 가진 것도 배운 것도 없이 섬유공장에 다녔다.


그녀는 삶을 경멸하며 살다가 자신에게는 운명을 바꿔 줄 왕자나 다름없는 공직자의 아들과 스캔들을 일으키는 데는 성공했다.


그러나 나이 차이와 환경을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은 버림받는 비운을 겪는 것으로 그쳤다.


반면에 수미는 척 봐도 귀족적인 데다 대학까지 나와서 어쩌다 본처가 아닌 후처, 또는 첩으로 살게 된 데 대한 슬픔이 켜켜이 내려앉은 얼굴이다.


형이 아무리 전도유망한 공직자라고 해도 이제는 그런 기대마저 바로 자신으로 인해 깨진 바가지가 되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니까 같은 삶이어도 격이 다르고 슬픔의 격 또한 천양지차인 것이다.


자기 운명을 개척하는데 실패한 명숙 누나보다 운명적 사랑을 선택한 수미의 슬픔에 월인은 더 연민이 간다. 명숙 누나는 과거의 일이고 수미는 현재의 일이어서 그렇겠지만.


- 어떻게 조카가 두 살이 되도록 그렇게 지내셨습니까. 그동안 많이 힘드셨겠습니다.


야단부터 쳐야겠다는 생각과 달리 월인은 수미를 위로한다. 동철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웃고, 수미는 수줍은 듯 얼굴을 붉힌다.


- 하지만 형수님,


월인은 일부러 형수님에 힘을 주어 부른다.


- 내일 행사에 형수님이 가족 앞에 나서는 것은 좋은 생각이 아닙니다. 물론 형수님도 속상해서 형한테 투정부리시는 거겠지만.


- 이해해주셔서 고마워요.


수미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린다.


- 그런 거였어. 난, 당신이 너무 쎄게 나오니까 겁먹었지.


수미의 눈물을 닦아주는 동철이 능청스럽다.


월인은 카페에서 나오면서 명숙이 누나의 마지막 눈물을 떠올린다. 격은 천양지차인데 왠지 두 여자의 눈물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 내가 형 같은 사람 혼내주려고 검사가 됐었는데.


- 검사보다는 변호사가 장 검사 적성에 잘 맞는다는 걸 형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 언젯적 검산데 자꾸 검사 검사 그래.


- 그럼 전 검사 그러냐.


- 앞으론 검사란 소린 빼. 현직 검사가 아닌데 그러는 건 사기고 괜한 과시야.


- 어쨌든 오늘 일은 고맙다, 장 검사. 전직이든 현직이든 나는 내 동생을 검사라고 부르는 게 좋다. 권력의 냄새가 나잖아.


동철은 수미의 어깨를 감싸 안고 모텔로 향하면서 수지청즉무어, 인지찰즉무도(水至淸則無魚, 人至察則無徒)라고 혼잣말로 내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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