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일 좋아하는 작곡가가 누구인가요?'라는 질문에 제대로 답해본 적이 없다. 좋아하는 작곡가가 너무 많아서이기도 하지만 음악을 듣는 순간엔 그 곡의 작곡가가 세계 최고의 작곡가니까. '이 상황에 어울리는 곡을 추천해줄 수 있나요?'라는 질문에도 선뜻 답하기 어렵다. 같은 상황이라도 사람에 따라 느끼는 감정이 다를 것이고, 그날의 날씨나 함께 있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떠오르는 음악이 달라지니까. 하지만 가을이면 꼭 브람스가 생각난다. 아니 브람스가 생각나면 가을이 왔음을 느끼게 된다.
무엇이 나와 가을, 브람스를 이어준 걸까? 사실 대학교 때 교수님께서 "네가 곡을 쓰는 스타일은 마치 브람스 같다."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어서 브람스에게 왠지 모를 내적 친밀감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 때문에 가을이면 브람스가 생각나는 건 아닐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의 음악도 음악이지만 그의 삶에서 가을을, 또 나를 느낄 수 있었다.
나에게 가을이란 잔잔함이다. 가을엔 기대감, 벅참, 아쉬움, 미련보다는 좀더 평온한 마음이 든다. 난 감정의 폭이 그리 넓지 않다. 정말 환호할 만한 일이 있어도 짧게 소리 한 번 지르곤 미소만 살짝 띨 정도로 차분해진다. 화가 나는 일이 있어도 잠시 투덜대고 하던 일을 마저 한다. 속상한 일이 있어도 누군가에게 말하며 힘든 마음을 털어놓기보다는 한숨 한 번 크게 쉬고 속으로 삭인다. 또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게도 내 마음을 아주 꽁꽁 잘 숨긴다. 감정을 절제하는 게 익숙한 사람이랄까. 아 그렇다, 난 잔잔한 사람이다. 나와 가을의 연결고리는 찾았다. 그럼 가을과 브람스, 또 나와 브람스는 어떤 연결고리가 있을까?
슈만, 클라라, 브람스의 관계는 너무나 유명하다. 클라라 아버지의 극심한 반대로 인해 법정투쟁을 거쳐 쟁취할 수 있었던 슈만과 클라라의 뜨거운 사랑. 스승 슈만의 아내이자 14살 연상의 클라라를 사랑한 브람스. 슈만이 라인강에 투신한 후 정신병원에 있을 때 묵묵히 클라라 곁을 지키며 슈만 가족을 보살핀 브람스. 이런 브람스의 마음을 완곡히 거절하고 평생 슈만의 아내로 남기로 한 클라라. 오직 한 여인만을 바라보며 독신으로 생을 마감한 브람스. 사람들은 이런 브람스의 인생을 보며 쓸쓸하고 고독한 삶을 살았고 이것이 그의 음악에 잘 나타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브람스가 그리 고독하기만 한 삶을 산 것은 아닐 거라 생각한다. 평생을 사랑한 그녀에게 선택받지는 못했지만 그녀 곁을 지키며, 자신의 도움으로 그녀를 안전하고 행복하게 만든 그 자체로 그는 벅찬 감정을 느꼈을 것이다. 슈만이 생을 마감한 후 클라라에게 본인의 마음을 표현하기는 했지만 또 그의 인생을 '사랑'이라는 가치로만 판단하긴 어렵지만 그래도 브람스는 자신의 감정을 잘 절제하던 사람이었던 것 같다. 내가 느끼는 가을처럼, 내가 바라보는 나처럼, 나에게 브람스는 잔잔했던 사람이다.
이제 왜 가을이면 브람스가 생각나는지, 브람스가 떠오르면 가을이 온 걸 느낄 수 있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 브람스에게 묻고 싶다. "난 당신과 비슷한 점이 참 많아요. 그래서 당신이 느끼는 스스로의 삶이 어땠는지 궁금해요. 왠지 내 미래가 될 것 같거든요. 당신은 당신의 인생이 쓸쓸했고 고독했다고 생각하나요?" 가을이 거의 다 지나긴 했지만 얼마 남지 않은 이 가을 동안 계속 브람스가, 그의 음악이 생각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