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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소방관 Nov 06. 2020

이별을 막기 위한 사투

119구조대원이 막아야 하는 이별과 죽음

                                          

처음 겪은 이별

사람은 인생을 살면서 무수한 만남과 이별을 반복한다. 회자정리(會者定離)이고 거자필반(去者必返)인 것이다. 이별의 형태가 다를 뿐 가족과 친구, 이웃과 동료 등 가까운 이들과 함께 한 시간을 뒤로하고 멀리 돌아설 수밖에 없는 순간들을 겪는다. 이런 이별이라는 단어가 주는 어감이 조금은 슬플 수밖에 없는 것 같다. 그것은 함께 나눈 시간에 대한 그리움과 함께 나눌 시간이 더는 없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동시에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리움과 아쉬움이 클수록 이별의 슬픔도 클 것이며, 슬픔이 클수록 이별의 잔상도 오래간다. 이별의 대상이 누구냐에 따라서도 감정이 다를 것이다. 사회적인 관계 즉 친구나 동료보다 가족과의 이별의 슬픔이 더 큰 것이 좋은 예이다. 가족과의 이별은 슬픔을 넘어서 충격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


 어릴 적 내가 다닌 초등학교는 전교생이 100여 명 남짓한 작은 시골마을 학교였다. 난 1학년 때부터 6학년까지 중간에 한두 명 전학 간 친구를 제외하고 32명이 6년 동안 같은 학급에서 함께 공부하고 놀았다. 남자가 20명 정도였고, 여자가 10명 남짓이었다. 나는 6년 동안 학급 번호가 19번이었다. 생일순으로 번호를 정했는데, 내 생일이 12월 29일이었기 때문에 남자 중에서는 가장 뒷번호 바로 앞이었다. 내 뒤에는 이철호라는 친구였는데 그 친구는 나보다 생일 20일 정도 늦었다. 6년 동안 한 반을 하며 지내온 친구들과의 추억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그리고 6학년을 마치고 졸업을 하며 헤어지는 날도 아주 잘 기억하고 있다.


 어차피 가까운 중학교에 다 같이 진학을 하기 때문에 친구들과의 이별이라는 감정이 졸업을 하는 당장에는 없었다. 하지만 난 부모님이 인근의 작은 시내로 이사를 가게 되어 시내에 있는 큰 중학교로 전학을 갈 수밖에 없었다. 나는 이때 난생처음 이별이라는 감정에 휩싸이게 되었다.


 무려 6년 동안 같은 교실에서 함께 했던 친구들과의 이별은 나에게는 너무나 견디기 힘든 슬픔이었다. 특히 그중에는 한 동네에서 나고 자란 친구들도 서너 명 있었다. 이사를 나오던 날 친구들과 부둥켜안고 울던 그날을 잊지 못한다. 눈물, 콧물 범벅이 되어 친구를 붙들고 서럽게 울던 그 해 겨울날의 이별이 그 당시에는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슬픔이었다. 어린 나만의 아쉬움이 아니었다. 고향마을이자 삶의 터전이었던 그곳을 떠날 때 부모님 역시 눈물을 흘렸다. 작은 마을에서 오랫동안 정들었던 이웃과의 이별이 슬프기는 내가 친구들과 헤어짐을 슬퍼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동네 아줌마들은 엄마와 나를 번갈아 껴안아 주며 눈물을 지으셨다. 이별의 아픔은 누구나 같다는 것도 그때 처음 알았다. 


이별을 대하는 감정

이별도 내성이 생기는 것일까? 아니면 내가 나이가 들며 이별의 감정을 느끼는 것이 무뎌진 것일까? 청소년기를 지나 20대가 되며 나는 많은 이별을 겪었지만 초등학교 시절 그때의 이별만큼의 감정을 느낀 적이 별로 없는 것 같았다. 다들 갖는 감정이고 사람 만나고 헤어지는 것이 무슨 대수인가라고도 생각했다. 그런게 남자다운 것이라 여겼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의 이런 이별을 대하는 감정이 재정립(?) 되는 일을 겪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친할머니의 죽음이었다. 


21살 때 나의 친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아흔이 넘는 나이셨지만 크게 아픈 곳 없이 노환으로 세상을 떠나셨다. 임종은 특이하게도 나의 친형 혼자 보았다고 한다. 할머니는 돌아가시기 한 달 전쯤부터 큰집에서 우리 집으로 거처를 옮겨 지내셨는데 어느 날 할머니와 형 둘이서만 집에 있게 되었고, 그때 할머니가 주무시듯 돌아가셨다고 한다. 


 할머니의 죽음이 내가 겪은 가장 가까운 사람의 첫 번째 죽음이었다. 나는 할머니의 죽음이 실감 나지 않았다. 죄송스럽게도 상(喪)이 치러지는 며칠 동안 눈물이 나지 않았다. 이상했다. 할머니와의 추억이 생생한데도 할머니의 죽음이 슬프게만 다가오지 않았다. 오히려 사촌 매형들이 주는 술을 마시며 즐겁게 웃기까지 했다. 나뿐만 아니었다. 상갓집에 문상 온 문상객들 거의가 그랬다. 큰아버지 두 분과 나의 아버지, 고모들만이 상복을 입은 채 침통해 있었다. 다만 할머니가 누운 관이 파여진 묏자리 안으로 들어갈 때는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할머니가 어릴 적 나를 아무도 모르게 불러 늘 주었던 용돈이 생각났다. 그것이 할머니의 죽음을 슬프게 만드는 내 안의 그리움이었던 것 같다. 


그러다 10여 년 뒤 나는 다른 형태의 죽음을 보게 된다. 큰어머니께서 돌아가신 것이다. 소방관이 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는데 큰어머니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것이다. 할머니의 죽음 다음으로 가장 가까운 이의 죽음이었다. 이상하게도 나는 할머니의 죽음과 다르게 많은 눈물을 흘렸다. 큰어머니의에 대한 그리움과 함께 떠나보내는 마음이 할머니의 죽음보다 더 커서가 아니었다. 큰어머니의 죽음은 전혀 생각지 못한 죽음이었던 것이었다. 교통사고에 의한 죽음은 나도, 나의 가족들도 그리고 친척들도 겪어보지 못한 충격이었던 것이다. 그 충격은 결국 주체할 수 없는 슬픔으로 다가왔다. 할머니처럼 천수를 누리셔야 했을 큰어머니가 불쌍했다. 사고로 인한 죽음은 죽은 이의 인생을 더욱 가엾게 했다. 나에겐 할머니의 죽음과 큰어머니의 죽음은 왠지 다르게 느껴졌다. 나만 그렇지는 않은 듯했다. 그래서 그런지 생을 다하는 그 순간이 확연히 다른 이별의 형태는 떠나보내는 이의 슬픔의 무게를 달리하는 듯도 하다.


119구조대원이 본 이별 그리고 죽음

큰 어머니의 죽음 이후 나는 교통사고 현장에서 맞닥뜨리는 죽음의 모습을 볼 때마다 요구조자의 가족들이 불현듯 떠오른다. 생면부지 처음보는 사람의 가족들의 형상이 잠시 잠깐 머릿속을 스친다. 그 긴박한 구조의 시간에 말이다.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이들의 가족은 꿈에도 이런 사고를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만약 지금 이 요구조자가 죽는다면 남아있는 가족들은 아마 내가 큰어머니를 떠나보냈던 그 슬픔처럼  큰 이별의 슬픔을 겪을 것이다. 교통사고뿐만 아니다. 이미 우리 사회는 무시무시한 대형 재난으로 순식간에 수백 명이 목숨을 잃는 사고의 현장을 두 눈으로 지켜본 적이 있다. 그런 사고는 굳이 가족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슬프고, 아팠다. 삼풍백화점, 성수대교, 대구지하철, 세월호... 내 가족이 아니더라도 내 가족, 내 친구, 내 동료의 이별인 듯 같이 아프고 같이 슬펐다. 


 결국 재난의 현장에서 죽어가는 이들을 살려내야 하는 구조 대원들은 사람과 사람들이 이별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것이다.  죽음은 이별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다. 수명이 다해 죽는 것은 그나마 죽음에 대한 마음의 준비와 슬픔을 이겨낼 수 있는 환경을 만들 수 있지만 사고에 의한 죽음은 그렇지 못하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살려야 한다. 죽음이라는 고통스러운 이별을 막아내야 한다. 구조 대원이 할 수 있는 가장 힘든 일이자 가장 고귀한 일이 바로 그것이다. 한 사람을 사지에서 구해냄으로써 그 사람을 알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슬픔을 막아낼 수 있기에 소방의 현장은 이별을 막아내는 사투의 현장일 수도 있다. 


그런 이별을 모두 막아낼 수는 없다. 우리는 신이 아니다. 인간 세상의 모든 죽음의 이별을 어찌 한낱 힘없는 우리가 다 막을 수가 있겠는가? 그렇다 하더라도 단 한 사람만의 이별이라도 막아낼 수만 있다면 소방관들은 자기가 죽을지도 모르는 사투의 현장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설령 우리의 죽음이 또 다른 이별을 만들어내는 아이러니한 일일지라도 사고를 당한 이들의 이별을 막는 것이 우리의 일이다. 이별을 담보로 또 다른 이별을 막아내는 우리의 일이 그렇다.


 이별은 슬프다.  죽음으로 인한 이별은 더 슬프다. 끝내 받아들이겠지만 떠나보내는 사람은 떠난 이를  오랫동안 그리워한다. 어릴 적 초등학교 시절 친구들과의 이별, 할머니와 큰어머니의 죽음을 통해 이별이 나에게 주는 슬픔이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그 후에도 더 큰 슬픔을 주는 이별도 겪어보았지만 나의 곁에 있던 사람이 떠나는 이별만큼 슬픈 것은 없다는 것 역시 알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하는 일에 더욱 자부심을 느끼기도 한다.


사람과 사람의 인연이 끊어지지 않게 하는 일처럼 값진 일이 있겠는가? 뻐기고 자랑할 일도 아지만 분명 우리가 하는 일이 그런 소중한 일이라는 것을 많은 소방 동료들이 느꼈으면 한다. 우리는 이별을 막기 위해 사투를 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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