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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소방관 Nov 08. 2020

낮은 곳을 바라봐야 한다

산업재해로 사망하는 사람들


거리의 약자

어느 날 차를 타고 수영장을 가고 있었다. 코로나라는 몹쓸 바이러스 때문에 다니던 동네 근처의 한적한 수영장이 운영을 하지 않아 시내 멀리 있는 대형 사설 수영장으로 가던 참이었다. 시내 큰 도로가를 지나갈 때였다. 점심시간이 지난 왕복 8차선 도로는 한적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앞서가는 차들이 밀리기 시작했고, 가다 말다 하던 내 차는 밀린 차들로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고 그대로 멈춰 섰다. 얼른 수영장에 가서 운동을 하고 싶은 마음에 막힌 길 위에서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러다 서서히 움직이는 앞 차를 따라 조금씩 전진했다. 어느 정도 갔을까? 차량 정체의 원인을 내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작은 리어카에는 종이박스나 폐지가 높게 쌓여 있었다. 그 옆에 파란색 트럭 한 대 서 있었고 트럭 운전자로 보이는 중년의 남자는 누군가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무슨 사달이 났는가 싶어 가까이 지날 때 목을 길쭉하게 빼 옆쪽을 봤다. 폐지가 쌓여 있는 리어카 뒤쪽으로 허리가 휜 노인이 서 있었다. 한눈에 봐도 고령으로 보이는 노인은 무어라고 고성에 삿대질까지 하는 트럭 운전자가 내지르는 말을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추측하건대 가장자리로 힘겹게 리어카를 끌고 가는 노인이 뒤에서 오는 트럭과 어떤 실랑이가 있은 듯했다. 폐지를 싣고 가는 리어카 때문에 차가 정체됐을 것이고 그러다가 뒤따라오는 트럭과 무슨 일이 생겼을 터이다. 남의 속 사정이야 알 수가 없었지만 깊게 팬 주름에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의 노인의 얼굴이 그 후에도 한참 동안 기억에 남았다.


서울지방경찰청의 통계자료에 따르면 폐지를 싣고 가다가 교통사고를 당하여 사망하는 노인의 수가 최근 3년간 21명에 달한다고 한다. 해마다 폐지를 줍는 노인이 당하는 교통사고가 끊이지 않는다(서울경찰청, 2017~2019) 이와 관련된 안타까운 뉴스를 가끔 접한다. 지난여름 천안에서는 폐지를 줍고 가던 할머니가 차량에 치여 숨졌다. 그때 지나가던 20대 여성도 다쳤다고 한다. 그 여성은 할머니의 폐지가 수레에서 떨어지자 줍는 것을 도와주다가 변을 당했다. 단순한 교통사고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은 사례를 내가 본 구조현장에 빗대어 보자면 사회적 약자가 늘 사고의 위험에 많이 노출된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사고는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겠지만 사고가 일어날 수 있는 환경은 분명히 다르다.




사고의 현장

기장 구조대에서 근무할 때였다. 공장에 사람의 다리가 기계에 끼었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을 했다. 도착한 공장 입구에 들어서자 공장 인부로 보이는 사람들이 문 앞에 모여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경위를 묻자 다들 넋이 나간 표정이었다. 나는 사람이 기계에 끼어 있는데 왜 다들 공장 밖으로 나와 있을까 의문스러웠다. 한 사람을 붙들고 자세히 물어보니 손으로 공장 안을 가리키며 겨우 말문을 열었다.


“저기 왼쪽으로 돌아 들어가면 있어요.”


나는 그쪽으로 우리를 안내하라고 말했다.


“아이고. 나는 도저히 못 들어가요”


남자는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이 말했다. 어쩔 수 없이 나는 후배와 함께 기계가 다닥다닥 붙어있는 공장 안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조금 걸어들어 가자 멀리 무언가 사람의 형체가 보였다. 무섭게 생긴 커다란 기계 아래로 쓰러져 있는 남자의 상반신이 보였다. 그때였다.


“빠드득”


발에 무언가가 밟혀서 부서지는 소리가 낫다. 나는 발을 들어 신발 바닥을 보았다. 흰색의 무언가가 신발 바닥에 붙어 있었다. 뼛조각이었다. 주위를 둘러보자 사람의 뼈로 보이는 조각이 바닥 여기저기에 널려 있었다. 그 주위로 핏물이 여기저기 뿌려져 있었다. 더 가까이 다가가자 나와 후배는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나일론 끈을 만드는 공장이었다. 공장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다. 고만고만한 규모의 공장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산업단지 맨 꼭대기에 위치한 공장이었다. 가느다란 실을 꼬아 손가락 굵기만 한 끈으로 만드는 기계였다. 거기에 사람의 몸이 말려 들어갔다. 실을 꼬는 롤러 사이로 몸이 들어갔다. 나일론 끈을 억지로 당기는 기계의 엄청난 힘은 남자의 다리부터 끌어들였다. 좁은 롤러 사이로 사람의 몸이 기계의 힘에 의해 우겨져 들어가면서 몸은 산산조각 났다. 동료들의 증언과 정황을 보아 그렇게 추정했다. 기계 소리 때문에 귀마개를 막고 일을 하는 다른 동료들은 기계로 말려들어가는 동료의 비명소리를 듣지 못했다고 한다.


사람의 몸이라고 볼 수 없을 만큼 훼손이 심했다. 상체와 하체는 약간의 근육 덩어리에 의해 겨우 서로 붙어 있었다. 상반신은 바닥에 거꾸로 떨어져 있었고 하반신은 여전히 롤러 사이에 끼어 있었다. 드러난 골반뼈는 산산조각 나서 주위로 튀었고, 내장은 배 밖으로 다 쏟아져 나와 있었다. 그 아래로 검붉은 피가 바닥 전체를 덮었다. 하반신은 롤러와 함께 얼마나 돌았는지 배배 꼬여 나일론 끈에 엉켜 있었다. 처참했다. 나와 동료 구조 대원이 떨어져 나가 있는 하반신 신체 부위를 한곳으로 모았다. 경찰 조사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우선 사체를 시트로 덮고 신고자에게 설명을 하고 현장을 떠났다.


죽은 이의 동료들은 충격에 말을 잇지 못했다. 사고를 당한 사람은 60대 남자고 성실했으며 착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동남아 여성과 늦은 결혼을 하고 열심히 공장을 다니며 살아가는 한 집안의 가장이었다고 동료들은 말했다. 동료들은 넋을 잃은 표정이었다. 조금 전까지 말을 나누고 같은 일을 했던 직장 동료가 상상할 수도 없는 처참한 모습으로 주검이 된 것을 목도했기 때문에 그 충격은 상당했을 것이다. 




산업재해로 희생되는 사람들

 그렇다고 단언할 수 없지만 이런 사고를 당하는 사람들은 거의 사회적으로 낮은 곳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이다. 생업을 위해 주말에도 위험한 기계 사이를 오가며 일을 하다가 변을 당한 것이다. 우리는 삶을 이어가기 위해 열심히 살아가다가 사고로 숨진 이들의 소식을 듣곤 한다. 초고층 주상복합 아파트 건설 현장에서 추락사한 일용직 노동자(부산 엘시티 추락 사고), 지하철 스크린 도어를 수리하다가 사망한 외주업체의 젊은 직원(구의역 사고), 화력발전소에 설비 점검을 하다가 컨베이어 벨트에 끼어 사망한 비정규직 근로자(태안 화력발전소 사고) 등 사고의 현장에서 변을 당하는 이들은 낮은 곳에서 살아가는 이들이다. 컵라면 하나로 끼니를 때우고, 힘들게 번 하루 일당을 맘껏 써보지도 못하고 아끼고 또 아끼는 사람들이다.


힘들고 어려운 산업 현장이나 남들이 하지 않는 일을 하는 사람들은 더 많은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들은 그러한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일을 할 수밖에 없다.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다만 그들이 일하는 곳의 환경이 위험하다면 그 위험을 조금이라도 줄이고 더 안전하게 일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것은 우리 모두가 살펴봐야 할 일이다. 당연하듯이 그런 곳에서 일하며 위험을 고스란히 감내하라는 것은 부당한 일이다. 위험 자체를 없앨 수는 없겠지만 위험 요소를 최대한 제거하고 안전하게 생업에 임할 수 있게 해줘야 한다. 그런 일을 하는 사람들을 보는 인식의 개선도 필요하다.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고 필요한 일이다. 직업의 귀천이 없다는 식상한 옛말이 아니더라도 각자가 맡은 곳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나와 같은 이웃이고 가족들이라는 인식이 필요하다. 소위 어렵고, 힘들고, 더러운 일을 한다고 해서 그들이 목숨이 위협받을 만큼 환경을 그대로 두어야 한다는 법은 어디에도 없다.




우리는 낮은 곳을 바라봐야 한다

산업재해로 인한 사고 사망자가 한 해에만 971명이다.(고용노동부 통계. 2018) 하루에 3명 가까이 일터에서 죽어나간다.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인 우리나라다. 선진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IT 강국인 대한민국은 여전히 산업재해의 후진국이다. 이는 아직도 우리의 산업 환경은 산업화 초기 시대의 위험에서 벗어나지 못함을 반증한다. 보이는 곳만 화려하고 번지르르하게 만든다. 휘양 찬란한 거리의 뒤편에는 기름때 묻은 손으로 커다란 기계를 조작하며 위험천만하게 일을 하는 노동자들이 있다. 그들이 만들어낸 제조품으로 우리는 현대사회가 주는 즐거움을 만끽하면서 살아간다.


IT 산업이 발전하고 스마트폰 하나로 모든 것이 해결되는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다. 인공지능이 이 세상을 편리하고 빠르게 만든다. 코로나 때문에 비대면 사회가 보편화되고, 움직이지 않고도 많은 것을 이룰 수 있는 세상이 도래했다. 하지만 이런 발전된 사회의 그늘에는 여전히 자신의 몸을 힘들고 위험한 곳에 노출한 채 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세상의 낮은 곳에서 자신의 삶을 잇기 매일 아침 집을 나선다. 우리가 그들의 일을 대신하자는 것이 아니다. 공감하고 소통해야 한다. 낮고 어두운 곳을 함께 바라봐야 한다. 그런 관심이 제도적으로 위험을 줄이고 위험한 곳에서 일하는 이들에 대한 인식을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고, 그래야만 그들의 위험을 없앨 수는 없어도 줄일 수는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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