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라는 질문이 멈추는 순간, 우리는 늙기 시작한다

검색의 시대에 잃어버린 사유라는 보물지도

by 글쓰는 소방관

어젯밤, 얇은 방문을 사이에 두고 날카로운 말소리가 새어 나왔다. 아내와 딸이 또 한바탕 실랑이를 벌이는 모양이었다. 초저녁 일찍 든 잠이 확 달아날 만큼 팽팽한 긴장감이 거실을 감돌았다. 잠결이라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었으나, 높아진 언성 속에 섞인 단어들로 미루어 보건대 곧 다가올 중간고사 준비에 대한 아이의 태도가 아내의 심기를 건드린 듯했다.
"너 이번에도 그렇게 대충 할 거야?"
"아, 알아서 한다고!"
어느 집이나 시험 기간이면 으레 겪는 풍경이겠지만, 다시 잠을 청하려 돌아누운 내 귀에는 그 소란이 묘한 씁쓸함으로 남았다. 단순히 성적 때문이 아니었다. 정답을 맞히기 위해 아등바등하는 저 아이도, 한때는 정답이 아니라 세상을 알고 싶어서 눈을 반짝이던 시절이 있었는데. 그 순수했던 호기심이 입시라는 괴물 앞에서 점차 빛을 잃어가는 것만 같아 마음이 아렸다.

하나밖에 없는 내 딸은 어려서부터 유독 책을 좋아했다. 밥 먹을 때도 책을 놓지 않아 그만 읽으라고 말려야 할 정도였고, 온 집 안은 아이의 책으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사람들이 "부모가 책을 좋아하니 아이도 닮나 봐요"라거나 "환경이 중요하죠"라고 덕담을 건넬 때면, 나는 속으로 고개를 저으며 생각했다.

'아니야, 저건 순전히 아이의 호기심 때문이야.'
아이가 걸음마를 떼고 말문이 트이기 시작했을 때, 우리 집에서 가장 많이 들린 단어는 단연코 "왜?"였다.

물론 "엄마", "아빠"를 가장 많이 불렀겠지만, 그 호명 뒤에는 언제나 물음표가 꼬리표처럼 따라붙었다.
"아빠, 왜 하늘은 파래?"
"엄마, 왜 바람이 불어?"
"왜 강아지는 멍멍 짖어?"
눈을 뜨고 움직이며 마주하는 세상의 모든 것이 생애 처음이었던 아이. 그 아이의 눈에 세상은 거대한 물음표 덩어리였고, 그 신기함은 봇물 터지듯 질문으로 쏟아져 나왔다. 무지하기도 했고, 때로는 일상에 지쳐 무신경하기도 했던 나는 "원래 그런 거야"라는 식의 그저 그런 대답으로 얼버무리곤 했다. 하지만 아내는 달랐다. 아내는 나의 빈약한 대답 대신 아이의 손에 책을 쥐여주었다. 책 속에는 아이가 던진 질문의 답이, 혹은 그 답을 찾아가는 길이 그려져 있었다. 아이는 스스로 책장을 넘기며 답을 찾는 희열을 맛보았고, 그렇게 독서라는 지적 탐험을 시작했다. 활자 속에서 길을 찾고 눈을 반짝이던 그 모습은 부모인 내가 보기에도 경이로울 만큼 기특하고 아름다웠다.

초등학교를 거쳐 어느덧 중학생이 된 지금, 아이는 그때와 사뭇 다르다. 호기심을 채우기 위해 책을 펼치던 손길은, 정해진 답을 찾기 위해 문제집을 푸는 손길로 바뀌었다. 물론 공부라는 것이 그 나이, 그 시절에 겪어야 할 피할 수 없는 통과 의례쯤이라 여길 수도 있다. 입시라는 거대한 파도 앞에서 한가롭게 호기심 타령이나 하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하지만 못내 아쉬운 것은 아이의 호기심을 대하는 태도다. 호기심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닐 것이다. 10대에게도 여전히 세상은 궁금하고 모르는 것투성이 일 테니까. 달라진 점은 질문의 해답을 더 이상 책이나 깊은 사색이 아닌, 손바닥만 한 휴대전화에서 찾는다는 것이다. 궁금한 것이 생기면 1초도 망설이지 않고 검색창을 켠다. 그리고 누군가가 요약해 놓은 몇 줄의 텍스트, 혹은 1분짜리 쇼츠 영상을 보고는 "아, 그렇구나" 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종이 속 글을 읽으며 행간의 의미를 곱씹던 '지적 활동'은 사그라들고, 빠르고 정확한 답만을 요구하는 '검색 활동'만이 왕성해졌다.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아이만을 탓할 수도 없다. 나를 포함해 누구라도, 버스 안에서도 식탁 앞에서도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사색 대신 검색을 하는 세상이니까.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이가 여전히 책을 놓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비록 그 나이답게 판타지나 로맨스 같은 장르물에 빠져 편식하긴 하지만, 영상 매체의 홍수 속에서도 활자의 끈을 놓지 않음에 위안을 삼는다.

아이의 변화를 바라보다 문득 거울 속의 나를 들여다본다. 아이가 질문을 잃어가는 과정을 보며 혀를 차지만, 정작 나는 어떠한가. 나이 들어간다는 것은 어쩌면 호기심을 잃어가는 과정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이건 원래 그런 거야", "살아보니 다 그렇더라". 경험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타성에 젖어, 세상에 대해 더 이상 "왜?"라고 묻지 않게 된 것이 언제부터였을까. 스스로 치열하게 질문을 쫓아 본 적이 과연 언제였던가. 역사를 돌이켜보면 위대한 발자취는 언제나 나이를 잊은 호기심에서 탄생했다. 조선의 실학자 연암 박지원을 보자. 그가 중국 사신으로 떠날 때, 편안한 수도 연경(북경)이 아니라 험한 길을 돌아 열하로 간 이유는 단 하나, '호기심'이었다. 당시 평균 수명으로 치면 '상노인' 취급을 받았을 마흔네 살의 나이. 하지만 그는 가보지 못한 곳, 새로운 문물에 대한 지적 허기를 채우기 위해 기꺼이 고행길을 자처했다. 그 뜨거운 호기심이 조선 최고의 여행기이자 문명 비평서인 역작 <열하일기>를 탄생시켰다. 우리 시대의 지성이라 불렸던 이어령 교수 또한 그러했다. 그는 죽음을 앞둔 순간까지 지적 호기심을 놓지 않았다. 아흔이 넘은 나이, 육체는 시들어갔지만 정신은 그 어느 청년보다 투명하게 빛났다. 그는 인공지능(AI)을 연구하고, <너 어떻게 살래?>와 같은 책을 써내며 마지막까지 세상에 질문을 던졌다. 그는 자신의 삶을 통해 증명했다. 육체는 늙어도 호기심은 결코 늙지 않는다는 것을. 아니, 호기심을 잃지 않는 한 우리는 영원히 늙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나, 그리고 내 아이가 호기심을 잃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세상이 정해놓은 정답을 외우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정답이 과연 옳은지, 다른 길은 없는지 끊임없이 의심하고 질문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호기심의 해결을, 손가락 터치 몇 번으로 끝나는 검색이 아니라 오직 독서와 직접적인 경험으로 해결했으면 한다. 물론 시대가 주는 편리함을 아예 배척할 수는 없을 것이다. 급할 때는 내비게이션을 켜고, 모르는 단어는 검색을 해야 한다. 하지만 인생의 본질적인 질문들,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사랑이란 무엇인가" 같은 거대한 물음표들은 검색창이 아니라 책장 속에, 그리고 우리가 흘리는 땀방울 속에 숨어 있다. 스스로 움직여 찾아낸 답만이 진짜 내 것이 된다는 사실을, 나는 당연하게 믿고 싶다.


오늘 밤은 스마트폰을 끄고, 딸아이의 책장에서 먼지 쌓인 책 한 권을 꺼내 들어야겠다. 그리고 내 안의 어린아이에게 다시 한번 물어봐야겠다.
"지금, 너는 무엇이 궁금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