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정 엄마에게 말을 하기 전에는 항상 생각하라는 소리는 많이 들으며 자랐다. 혀에 힘이 있음을 간접적으로 접하고 살아온 나는 항상 과묵한 아이였고 생각을 하고 말하느라 다른 사람들의 답답함을 항상 느끼며 자라왔다. 하지만 내가 확실한 목표가 생기면 그것을 이루었을 때 나의 모습을 상상하고 그 후에 계획도 세우곤 했다. 일종의 자기 인식(self-awareness) 같은 것이었다. 그렇게 인식이 끝나면 나는 입 밖으로 뱉어냈다.
"수석으로 고등학교 졸업 할 거예요."
"대학원에 가서 돈 걱정 안 하고 하고 싶은 공부와 연구 마음껏 할 거예요."
"암 연구하는 과학자가 되기 이전에 그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을 마음으로 이해할 수 있는 따듯한 사람이 될 거예요."
"훌륭한 과학자가 될 거예요."
그렇게 무수히 많은 약속들을 나 자신과 했었고 이룰 때마다 하나씩 지워 나갔다.
어렸을 때부터, 물론 그때는 어렸을 때라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하나둘씩 내가 생각하고 바랐던 것들을 이뤄나가며 성취감이 들었고, '생각 - 선언 - 실천 - 노력 - 실현'을 반복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의 영향은 아무래도 부모님께서 살아가는 모습에서 항상 열심을 목격하고 나도 같이 그렇게 살아가는 법을 익혀갔고 미국에 가게 되었을 때는 그렇게 열심히 일궈놓으신 것들을 내려놓으며 오롯이 자식들의 교육을 위해 어렵고 좁은 길을 선택하는 모습에서 나 역시 그분들에게 더 자랑스러운 딸이 되고 싶었다. 엄마가 나를 그렇게 부르셨듯 부모님의 '열 아들 안 부러운 딸'이 되고 싶었다. 그리고 내가 열심히 공부할 때 부모님이 가장 기뻐하셨던 것 같았고 그래서 막연히 공부했던 것 같다. 그렇게 미국으로 이민을 갔고 이민자로서의 삶은 여러모로 힘이 들었다.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 그리고 경제적으로... 하지만 어려움이 하나씩 늘어날수록 이상하게도 나는 포기하고 절망하기보다 더 열심히 이겨내려고 했던 것 같다. 이민자로서 한국이 아닌 미국까지 와서 무너지면 정말 끝임을 알기 때문에...
언어가 부족하다고 느끼면 다른 공부보다 영어를 공부를 더 했고, 쉬는 시간에도 도서관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점심시간에는 학교에서 점심식사로 나온 피자를 챙겨 들고 점심시간 후 다음 수업이 있는 교실로 가서 책을 읽으며 점심을 먹었다. 도서관은 음식 반입이 불가하여 점심시간에는 도서관 대신 교실을 택하여 선생님들과 대화도 하고 예습과 복습도 쉬지 않고 하였다. 그렇게 나는 미국 생활 5년 만에 수석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영광을 얻게 되었다. 수석이라는 타이틀도 뜻깊었지만 내 19년 인생 처음으로 내가 세운 계획을 오롯이 노력으로 이룬 것이어서 그 성취감이 더 컸던 것 같다. 그리고 내 계획 리스트에서도 1번 계획을 지웠다.
"수석으로 고등학교 졸업을 할 거예요."
그리고 이민자로서의 나의 열심과 계획들을 대학교 원서, 장학금 지원서 등에 잘 녹여냈고, 원하는 대학에 전액 장학금을 받고 입학할 수 있었다. 그 후에도 추가로 많은 장학재단에서 나의 꿈과 계획을 응원해 주어서 대학원까지 졸업하는데 경제적으로 어려움은 없을 정도였다. 그렇게 미국에서 석사과정까지 마치고 한국으로 박사과정을 시작하게 되었다.
"대학원에 가서 돈 걱정 안 하고 하고 싶은 공부와 연구 마음껏 할 거예요."
박사과정을 시작할 당시 나는 이미 한 아이의 엄마였다. 그리고 과정 중 두 번의 출산이 있었고 당시 신랑은 타지에서 사업을 하고 있어서 주중에는 세 아이의 엄마로서, 박사과정 학생으로서 학업을 이어나가야 했다. 하지만 신랑의 전폭적인 응원과 지지가 있었고, 교수님의 믿음과 이해, 또 많은 분들의 도움으로 6년이라는 짧지만 긴 박사과정을 마치고 좋은 저널에 졸업 논문도 싣을 수 있게 되었다. 나의 연구성과가 국내외 언론사에도 알려지게 되었고, 어느 날 연구실로 한통의 전화를 받게 되었다.
"안녕하세요. 연구실에서 최근 나온 논문에 대해 여쭙고자 연락드렸습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전화를 하신 분은 내가 연구하던 유방암 유형으로 앓고 계신 부인의 남편분이었다. 나의 논문에 나온 치료법을 적용하여 치료받아보고 싶다는 연락이었다. 마음이 너무 아팠다. 내가 한 연구는 기초연구이고 이 치료법이 정말로 환자에게 쓰이려면 동물실험을 거쳐 후보약물 개발단계를 거쳐 그 약물의 대한 독성 테스트등 다양한 검사를 거쳐 비로소 환자에게 투여될 수 있고 그 기간도 10~15년이 넘는 기간이 걸리지만 성공할 가능성도 굉장히 낮기 때문이다. 눈물이 앞을 가려서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내 작은 연구 성과도 병을 앓고 있는 환자의 가족들에게는 정말 가느다란 빛 한줄기 일 것이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일 것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논문을 드디어 출판하게 되었다고 잠시나마 우쭐했던 나 자신이 초라해졌다. 기초과학도 정말 중요하지만 내가 연구한 것들이 환자들을 위해 쓰이기 위해서는 약물 개발단계도 정말 중요하다는 것도 깨달았고, 교수님과 창업을 하여 기초연구의 그다음 단계인 약물을 개발하는 일을 하는 계기가 되었다.
항상 집에서 공부만 하던 나의 학창 시절은 오롯이 내 계획을 이루겠다는 생각으로 가득했고 나 자신을 항상 공부라는 틀 안에 가두었던 것 같다. 그래서 우리 아이들에게는 좀 더 큰 세상을 보여주고 더 많은 것들을 경험하게 해주고 싶어서 주말에도 집에서 쉴 수가 없다. 이번 주말은 아이들과 평창으로 여행을 갔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워터파크에서 물놀이도 하고 근처 박물관에 들러서 구경도 하고, 아이들이 궁금해하는 것을 설명도 해준다. 아이들이 좋아하고 두뇌 발전에도 좋은 만들기 수업도 같이하며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갑자기 둘째 아이가 무엇이 생각이 났는지 나에게 퀴즈를 냈다.
"엄마, 제가 퀴즈 하나 낼게요. 맞춰보세요.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과학자는?"
"글쎄, 토마스 에디슨? 알버트 아인슈타인?"
"땡. 틀렸어요. 정답은 엄마예요."
".... 왜?"
"우리를 위해 새로운 것도 알려주시고, 시간을 내서 여행도 같이 가고, 많은 좋은 경험도 (할 수 있게 도와) 주니까요."
어렸을 때부터 칭찬의 노예였다.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었고 그것이 내 노력에 대한 결과물이라고만 생각해 왔다. 결혼을 하고 세명의 아이의 엄마가 된 지금 깨달은 것이 있다. 그 어떤 사람들보다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들, 가족에게 사랑받고 인정받는 것이 가장 어려운 것이고 가장 가치 있는 것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