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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anius May 17. 2024

미국에서 처음 성적표

My first report card in the States

모두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단어, 성적표

내가 한국에서 초등학교를 다닐 때 성적표를 받으면 '우리 선생님께 나는 어떤 아이일까?'라는 생각을 하며 두근 거리는 마음으로 성적표를 펼쳐봤었던 것 같다. 초등학교 6학년이 되었을 때부터는 단원평가, 수행평가 등 시험을 보기도 했고 IQ 검사 결과등을 보면서 반에서 성적으로 등급을 나누기도 했었다. 지금은 초등학교 저학년, 아니 유치원생이 다니는 학원에서도 아이들에게 어른들이 정한 이러한 번호들을 매긴다고 하니 당시 나의 학교 생활이 그리 놀라운 것도 아니었다. 그렇게 나도 중학교 1학년이 되자 더욱더 신나게 번호가 매겨졌다. 나의 번호는 반에서 7이었다. 그 번호를 올리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그다음 시험에서 내 번호는 5가 되었고, 3까지도 올렸었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다른 친구들과의 성적과 비교하여 정해지는 상대평가에서 나의 부족함을 느꼈고, 시간이 더 주어졌다면 가능했을지도 모르겠으나 그렇게 나의 중학교 1학년은 3번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렇게 미국으로 이민을 오게 되었고, 나에게 미국에서 중학교 2학년 수업이란 참으로 '식은 죽 먹기'었다. 총 6교시였지만 ESL (English as Second Language) 수업을 들어야 했던 나는 영어 두 시간을 제외하면 총 다섯 과목이었고 모든 과목은 절대평가였다. 게다가 내가 느끼기에 그렇게 많은 것을 요구하지도 않는 것 같았다. 매 시간 정시에 교실에 도착하고 결석만 하지 않아도 성적의 50% 이상은 따놓은 당상이었다. 내가 다녔던 Berendo Middle School은 Los Angeles district에서 그리 좋은 학군에 위치한 학교는 아니었다. 가주교육구에서 목표로 하는 API(Academic Performance Index) 지수 800에 도달하지 못하는 하위권 학교 중 하나였다. (물론 지금은 학교 관계자 분들과 선생님들의 노력으로 많이 발전했다고 한다.) 그래서 학생들의 출석을 기대하기 어려웠고 수업 중간에 학교 무단이탈, 소위 말하는 땡땡이(ditch)를 하는 아이들이 많았기 때문에 매 수업시간 출석 체크는 선생님들의 의무였다. 초등학교 시절, 6년 개근했던 나에게 근면 성실은 일도 아니었다. '아파도 학교에 가서 아프자'라고 배우고 단련되었던 나는 전염병이 아닌 이상 학교에 꼬박꼬박 출석을 하였고, 학교에서 '근면 성실의 표본'이었던 나는 선생님들과도 친분이 두터워질 수 있었다.



또 미국의 성적표는 온통 숫자로만 나를 나타내었던 한국의 성적표와는 달랐다. (오른쪽에 보이는 내 첫 성적표는 나중에 나의 고등학교 졸업 성적표에 연계되어 나온 것으로 많이 단순화되어 있지만) 숫자만이 아닌 다양한 알파벳으로 최종 성적과 함께 나의 학교 생활과 태도 (WH: work habit), 그리고 교우들과의 협력(Coop: coorporation)을 같이 나타내고 있었다. E는 excellent, S는 satisfactory, U는 unsatisfactory의 약자로 각 과목당 모든 학생들이 받을 수 있는 가장 높은 성적은 AEE로 절대평가였다.


처음 미국에 도착하여 비록 중학교 2학년(7학년) 과정을 한 학기 밖에 못하였지만 내가 받을 수 있는 가장 최고 점수들을 받은 것이다. 한국에서 아무리 노력해도 반에서 5등 언저리에서 머무를 수밖에 없었던 나에게, 미국에서의 처음 성적표는 최고의 보상을 안겨준 첫 경험이었다. 그 짜릿함을 맛본 나는 폭주하기 시작한다. 뭐든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더 열심히 공부했다고 마음먹었다. 그렇게 미국에서의 내 첫 성적표는 열심히 하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용기를 주었고, 결심한 일은 열심히 반드시 해내고야 마는 사람으로 성장하게 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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