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무서워? 귀신이 무서워?

6살+아빠와 사진여행 6

by 션표 seanpyo




경주의 첫날밤



이미 해가 저물고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불 켜진 창이 거의 없었다. 여행 비수기이다 보니 보문단지 일대의 숙박업소들은 비슷한 모습이다. Swiss Rosen Hotel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에 자주 등장하는 -변두리에 위치하며 전성기가 지난 - 호텔 이미지와 흡사한 느낌이었다. 주변을 둘러싼 모텔들만 아니면 나름 깔끔하고 숙박비도 합리적이라 마음에 들 법도 한데...


체크인을 하고, 짐을 내려놓고, 화장실 불을 켜고, 방을 둘러보는 등 수십 차례의 여행을 통해 익숙해진 여행 속 일상이 시작되고서야 마음의 짐도 내려놓을 수 있었다. 앞으로의 일정은 순탄하길 바라지만 이미 우리는 전날 밤에 계획했던 '내일'과는 다른 미래에 와 있었다.





어쨌든 경주에서의 첫 밤이자 마지막 밤을 이대로 보낼 수 없어, 다시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고 호텔을 나서기로 했다. 문제는 침대 위에서 방방 뛰며 노는 아이를 어떻게 밖으로 유인해야 할까였다. 결국 편의점에서 맘껏 과자를 골라 파티를 열어보는 건 어떨까 제안했고 아이는 두 눈을 크게 뜨고 열렬히 찬성했다.





공포 특급, 안압지 투어


아이의 기대와 아빠의 계획이 늘 일치하지는 않는다. 둘 사이의 거리가 벌어지면 조바심이 생긴다. 그 불안함을 감수하면서 과자파티를 조건으로 협상한 것은 안압지였다. 이름난 야경을 함께 볼 수 있는 기회는 오늘밖에 없으니까.



밤 9시 30분 무렵, 안압지의 마지막 손님으로 입장했다. 야경이 유명한 곳이지만 동절기라 관광객도 없고, 검표원들은 쌀쌀한 날씨에 매표 기계 주위를 서성이며 남은 폐장시간을 기다리는 모습이었다. 우리가 매표를 하려 하자 시계를 확인하며 너무 늦지 않게 나오라 했다.




첨성대와 석굴암에서의 의외로 작은 스케일을 떠올리며 그저 아담하고 예쁜 연못을 상상하고 왔는데 몽골의 초원처럼 넓게 펼쳐진 정원 앞에서 어디로 걸어야 할지 막막해 잠시 멀뚱하게 서있었다. 컴컴한 밤이라 듬성듬성 서있는 가로등 만으로는 방향을 가늠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사람이라도 있으면 쫓아 갈 텐데 모든 사물들이 정지된 시간을 연기하듯 숨죽이고 있는 모습이었다.


'아빠 무서워'


아이는 연못을 찾아 걷는 동안 아빠 팔을 부둥켜안고 질질 끌려 다녔다.





연못에 도착하자마자 아이는 본격적으로 보채기 시작한다. '아빠 이제 가자!'


'괜찮아 귀신 없어'

그 이야기를 꺼내지 말았어야 했다.


무심코 뱉은 한마디가 아이의 상상력을 자극해 버린 것이다. 알록달록 밑에서 비추는 서치라이트를 받으며 우리를 지켜보는 듯한 나무들과 밤하늘 보다 컴컴해서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연못. 둘러보니 아이가 무서워할 만 한 것이 한둘이 아니다.


'남자는 씩씩해야 해'와 '아빠가 있으니 괜찮아'로 번번이 설득에 실패한 아이가 던진 최후의 카드에 결국 아빠는 무릎을 꿇고 말았다.


'아빠 오줌~'

(화장실은 입구 근처에 있었다.)


소문난 안압지의 야경이라지만 쌀쌀한 날씨였고, 평소대로 라면 아이가 이불 속에서 꿈을 꾸고 있을 시간이기도 했다. 게다가 소변까지 마려운 아이를 두고 더 이상 머무를 수는 없는 일, 우린 안압지와의 짧은 첫 만남을 뒤로하고 화장실로 향했다.





결국 연못에서 5분도 채 머무르지 못하고, 정말 소변이 마려워서 인지 무서워서 인지 좀비로부터 쫓기는 사람처럼 들판을 가로질러 황급히 화장실로 뛰어갔다. 이후 아이는 한동안 안압지를 '무서운 연못'이라 불렀다. 매표소 직원은 시계를 확인하며 마지막에 들어와서 왜 이렇게 일찍 나왔냐고 물었다. 호텔에서 안압지까지 차로 왕복 40분, 2인 3각을 하듯 안압지 관광에 소요된 시간은 10분이었다.





엄마가 무서워 귀신이 무서워



호텔로 돌아오는 길 우리는 편의점에 들러 과자파티를 위한 준비를 했다. 맥주를 고르고 있는데 과자 몇개를 품에 안고 다가온 아이가 물었다. "아빠 그런데 엄마한테 전화해야 돼" 평소 계획적인 생활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엄한 엄마가 떠오른 모양이다. "왜?" "밤인데 잠 안 자고 과자 먹어도 되는지 물어봐야지" "아빠와 함께 결정한 일이니 괜찮아"라고 했지만 마음이 불안한 표정이다. 결국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행 동안 아빠랑 맘껏 놀다 와'


그 말 한마디에 텔레토비에 나오는 해님처럼 해맑은 표정을 되찾은 아이.




호텔에 돌아와 물어보았다. "찬유야 귀신이 무서워 엄마가 무서워?" 먹던 과자를 손에 든 채 잠시 생각이 깊어진 아이.


하지만 아빠는 안다. 귀신은 무서운 연못에 살지만 엄마는 이 세상 어느 곳에서나 존재한다는 사실을. 머리 뒤에도 눈이 달려있고, 잠을 늦게 자도, 과자를 먹을 때도, 게임을 하려 해도 불쑥불쑥 나타난다. 귀신보다 무서운 엄마임에 틀림없었다.





같은 곳을 함께 다녀도 사람마다 기억이 조금씩 다르다. 기대하는 지점이 다르기 때문일 터. 안압지에 폐장 전 닿기 위해 마음 졸이고, 기억의 증표로 여행 내내 보관한 입장권은 아빠만의 '의미'였을 뿐, 여행 첫날 아이를 사로잡은 것은 다름 아닌 '과자파티'였다. 그 기억이 얼마나 강렬했는지 한동안 여행 이후에도 아빠와 단둘이 있을 때면 과자파티를 하자고 졸라대곤 했다.


아이가 잠이 들고, 낯선 책상 앞에 앉았다. 시티투어의 취소로 백지가 된 다음날 일정을 잡기 위해서다. 계획을 잡는 일은 쉽다. 하지만 과연 우리는 남은 여행 동안 서로의 눈높이를 좁혀 나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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