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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름 위에서 바람이 전해준 것

제주 용눈이 오름 이야기

by 션표 seanpyo



용눈이오름은 제주에서 가장 사랑하는 곳 중 하나다.

이 곳과의 인연을 맺은지도 어느새 15년이 되어간다.





용눈이 오름은 사진작가 김영갑 선생이 자주 찾던 곳이기도 하다. 그는 제주의 중산간 풍경에 마음을 빼앗겨 육지에서의 신변을 정리하고 이곳에 들어와 작품 활동을 하다가 루게릭병에 걸려 세상을 등졌고, 지금은 생전에 그가 직접 지은 갤러리 '두모악'만 남아있다.


하지만 용눈이오름이 특별한 이유는 어느 사진가의 개인사 때문이 아니라 아부오름이 그랬듯 소중한 사람들과의 추억 때문이다. 그들과 이 곳에 겹겹이 남긴 수많은 발자국들이 언덕의 도처에 흩어져 있다.



이전에 여자친구(지금의 아내)와 이곳을 찾았을 때 우린 언덕을 오르기 전 말다툼을 했고, 결국 오르는 동안 서로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나는 이 멋진 풍경을 배경으로 그녀를 담고 싶어 데려왔건만 먼저 말 거는 게 지는 거라 생각했는지, 결국 사진 한 장 찍지 못하고 이곳을 내려오고 말았다.


여행에서 돌아와 여자친구에게 빌려준 소형 디지털카메라를 돌려받았다. 그리고 여행 내내 그녀가 담은 몇 장 되지 않는 사진 중에 그 오름에 서 있는 내 사진을 발견했다.


평생에 가장 아끼는 내 사진, photo by kiki

순간 물밀듯 밀려오는 쓰나미급 후회와 미안함은 말로 다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아마도 오늘 이곳을 다시 찾은 이유는 아내의 사진 한 장에 대 한 막막한 미안함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photo by kiki

아빠의 속좁았던 추억이 담긴 용눈이오름 등반은 엄마의 사진기로부터 시작한다.




연이은 오름 행군에 초반부터 지친 찬유.





거친 초원,

나무가 없는 낮은 언덕,

내가 제주를 사랑하는 이유다.




발치에서 아빠를 바라보는 아이의 눈빛, 아이에게 이 과정은 그저 힘든 산행일 뿐인가 보다.





오름산보는 계속되고





우린 어느새 능선에 올랐다.




능선 너머의 세상이 모습을 드러낸다.

기대한 만큼 보여주는 오름의 매력에 아이도 즐겁다.




내가 걸어온 길을 금세 따라 올라온 바람이 속삭이듯 스쳐 지나가고, 왠지 즐거워지는 오름 위 풀밭에서의 시간




이 세상에 언덕 위에 초원이 여기뿐이겠는가... 차로 네바다 사막을 지나는 동안에도 이런 풍경은 지천에 널려 있었다. 김영갑 씨가 이곳(미국)에 와 봤다면 제주에서 살다 가진 않았을 거라는 농담이 절로 나오기도 했다. 세상에 이런 곳이 무수히 많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아는 것과 직접 가보는 것은 다르다.



올라와 보지 않고는 알 수 없는 그 무엇이, 나무 한 그루 찾아보기 힘든 이 텅 빈 언덕에 위에 존재한다.



자! 이제 내려갈 시간




그 언젠가 빚진 한 장과





오늘의 좌표 한 장을 언덕 위에 슬며시 내려놓고


'다음 언젠가는...'을

말없이 기약하는

우리 세 식구의 삶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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