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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에서 홍수를 만난다면?!

후쿠오카 에피소드

by 션표 seanpyo





후쿠오카 에피소드



떠나기 전날 심상치 않은 모습의 후쿠오카 하늘





이상한 모닝콜


아침 첫 비행기를 타기 위해 서둘러 준비를 마치고 나오니 엘리베이터가 정지해 있었다.

새벽에 단잠을 방해했던 알아들을 수 없었던 안내방송이 엘리베이터 고장에 관한 내용이었을까? 처음엔 모닝콜인 줄 알고 벌떡 일어나 시계를 보았지만 새벽 2시. 생각해보니 모닝콜을 스피커로 방송한다는 이야긴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잠이 덜 깬 채 침대 위에 앉아 스피커를 통해 들려오는 -알아들을 수 없는 일본어- 음성으로 내용을 가늠해 보려 애썼지만 그런 일이 가능할 리 없다. 혹시...

저녁에 내리던 폭우가 아직도 내리고 있는 걸까... 생각이 거기까지 미쳤을 때 손을 뻗어 창의 커튼을 살짝 걷어보니 잠들기 전까지 세차게 쏟아지던 빗줄기는 어느새 멈춰 있었고 밤하늘은 고요했다. 안내방송은 같은 내용을 두 번 반복해서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무슨 일이 일어났건 지금 이 나라에서 마지막으로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내일 첫 비행기를 무사히 타는 것이라고 생각한 우리는 다시 잠을 청했다.



물의 도시 후쿠오카답게 커널시티 내부도 물로 꾸며져 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엘리베이터가 고장 난 사실을 새벽 2시에 알리는 호텔은 어느 나라에도 없다.그러나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9시 출발하는 국제선을 타기 위해 7시까지는 공항에 도착해야 한다. 지금 시각 새벽 6시 10분, 지하철로 30분 거리에 공항이 있었으니 14층 계단을 내려가는 시간이 20분 이상 걸리지만 않는다면 엘리베이터가 고장 난 건 큰 문제가 아니었다.




전날 종일 내리던 비가 결국 도시를 덮고 말았다

계단으로 내려가던 중 한 일본인이 뛰어 올라오며, 다급한 목소리로 우리에게 뭔가를 이야기했지만 우리가 외국인이라는 사실을 눈치채고 그냥 위층으로 올라가버렸다. 그때 우린 뭔가 심상치 않음을 깨달았고 창밖을 확인한 순간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시선이 닿는 아래 쪽,

마땅히 보여야 할 도로가 보이지 않았다. 어제 저녁 내린 비가 강을 이루며 시내를 따라 흐르고, 중간중간 차 지붕만 확인될 뿐이었다. 시내 중심에 위치한 호텔의 6층 창문으로 고개를 내밀고 사방 어느 쪽을 확인해도 땅이 보이지 않고, 마치 처음부터 도로는 없었던 것 같은 물의 세계가 펼쳐 있었던 것이다.





로비로 내려가니 이곳도 이미 물로 가득 차있었다. 사람들은 2층과 1층 사이의 계단에 앉아 넋을 잃고 호텔 직원의 설명을 듣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2시간 후에 뜨는 비행기를 어떻게 탈 수 있을까? ‘내일 출근해야 하는데’ 하는 생각에 심장은 두 근 반 세 근 반, 머릿속은 다음 행동에 대한 답을 끊임없이 찾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를 더욱 힘들게 했던 것은 정체불명의 검은 부유물들과 화장실 냄새였다. 힘겹게 다시 14층 객실로 올라가 버려도 되는 간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여행가방을 머리에 이고 쇼핑한 선물 봉투를 한쪽 어깨에... 삼각대와 불필요한 짐은 아깝지만 호텔에 버려야 했다. 그리고 사진기 가방을 왼쪽 어깨에 둘둘 말아 동여매고 로비로 향했다.

호텔 직원은 우리를 강하게 만류했다. 바로 옆에 큰 강이 있어 휩쓸릴 수도 있다는 이야기였지만 다음날 출근을 지켜야 하는 직장인의 마음을 그도 모를 리 없었다. 결국 그들의 만류를 거부하고 물속에 몸을 담갔다. 직원들은 비장한 표정으로 온갖 짐들로 두손이 자유롭지 못한 우리의 목에 호텔 수건을 두개씩 걸어주고 조심하라며 안녕을 고했다





길로 나섰다

가도 가도 바닥이 보이지 않는 거리 위에서 동서남북도 모른 채 걸었다. 지하철도 다닐 리 없고 그저 호텔 직원이 알려준 방향으로 물속을 걸어갔다





한참을 걸어 가니 서서히 지대가 높은 곳이 나왔다. 우리는 머리에 이고 있던 짐들을 내려 자세를 고쳐 잡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사진을 찍을 여유도 생겼다.





이런 상황에서 우산의 용도가 뭘까?




신발을 잃어버린 사람




주인을 잃은 자전거




한두 정거장 걸어가니 아스팔트가 나타났고(얼마나 반가웠는지) 우리는 택시를 잡아 공항으로 향할 수 있었다. 하지만 흠뻑 젖은 바지 때문에 택시 안에는 고약한 악취로 숨쉬기 어려울 정도였다. 미안한 마음에 공항에 도착해서는 요금과 남은 잔돈을 모두 털어 팁으로 드렸다.



겨우 비행기 시간에 맞춰 허겁지겁 계단을 뛰어 올라갔지만 넓은 공항에는 인적도 없어 마치 봄방학이 시작된 학교 건물처럼 을씨년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공항직원에게 물어보니 기장, 승무원 모두 홍수로 공항에 오지 못해 비행기가 연착되었다고 했다. 마침 사람도 없어서 우리는 화장실에 들어가 간이 샤워를 하고 새옷으로 갈아입었다. 기분이 훨씬 나아졌다. 뭔가 대단한 일을 해낸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마치 조금 전에 있었던 일들은 이미 아득한 추억처럼 아련하게 느껴졌다.



열흘남짓 배낭여행은 그로부터 1시간 반이 지난 서울행 비행기 안에서 막을 내렸다. 여행의 트러블은 당시에는 스트레스를 동반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다른 어떤 것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소중한 모험담이 된다. 물론 그 재산도 기록으로 남기지 않는다면 아련한 기억 속에 과장되거나 잊혀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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