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재 팬의 지극히 주관적인 견해
‘푸른 산호초’는 1980년에 일본의‘국민 여동생’ 마쓰다 세이코가 불러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던 노래다. 버블 호황이 정점을 찍었던 일본 황금기의 상징으로도 통한다.
최근 뉴진스의 하니가 도쿄돔 무대에서 부른 ‘푸른 산호초’가 화제다. 공연의 길이는 3분 남짓으로 길지 않다. 하지만 그 무대에는 정교한 디테일을 넘어 각종 시대적 담론과 해석을 일으킬 만한 시사성과 파급력이 있었다.
일본은 잃어버린 20년을 겪고도 여전히 생기를 되찾지 못하고 있다.
화려했던 과거를 추억하는 일본인들에게 이 선곡은 엄청난 정서적 울림을 줬을 것이다. 세이코를 상징하는 단발 커트를 완벽히 재현하기 위해 가발까지 착용한 섬세함은 일본문화에 대한 존경과 헌사처럼 느껴졌다. 영상 속 도쿄돔은 내가 기억하는 일본인들에게서 쉽게 볼 수 없는 뜨거운 열기로 녹아내릴 것 같았다. 미래에 대한 불안과 답답함이 큰 만큼 과거의 향수를 소환당했을 때 느낀 카타르시스도 컸던 것 아닐까?
베트남계 호주출신 한국 걸그룹 멤버가 일본 노래를 부르는 모습도 신선한 광경이었다.
어쩌면 우리는 고향, 인종, 국적과 같은 오래된 정체성들이 힘을 잃고 희미해지는 거대한 변화를 목도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젠 서울 명소 어느 곳을 가도 외국인들이 넘쳐난다. 하니의 무대에 열광하는 국내 팬들은 아직도 반일과 극일이 어떻게 다른지 입씨름을 하고 있는 일부 기성세대보다 일본의 버니즈들과 통하는 게 더 많아 보인다. 과연 20년 뒤에도 국가와 민족은 지금처럼 고정불변의 정체성으로 남을 수 있을까?
하니의 무대는 우리 문화가 얼마나 성숙해졌는지 엿볼 수 있는 시금석이기도 했다.
똑같은 무대를 90년대에 시도했다면 당장 ‘친일파’라는 주홍글씨가 붙었을 것이다. 10년 전이라면 ‘도쿄돔 정복’과 같은 촌스러운 국뽕 헤드라인들이 넘쳐났을 게 뻔하다. 지금은? 그냥 무대 자체를 즐기는 느낌이다. 옛말에 겁먹은 개가 요란하게 짖는다고 했다. 스스로에게 자신이 있으면 남을 의식하지 않는다. 하니의 무대 이후‘푸른 산호초’가 국내에서도 인기다. 이제 우리도 남의 것이라도 좋은 게 있으면 그 자체로 인정하고 즐길 줄 알게 됐다. 세계에서 가장 문화 권력이 강한 미국도 막상 따져보면 순수 미국산은 많지 않다.
일본의 클래식을 발굴하고 재해석한 게 한국이라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거의 10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아시아의 문화를 지배하는 건 일본이었다. 단순히 만화나 게임이 인기가 있었던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현대어 중 대부분이 일본에서 유래했으며, 심지어 우리나라의 역사를 해석하는 기준도 알게 모르게 일본의 영향을 받았던 시절이 있었다. 한국뿐 아니라 아시아 국가 대부분이 마찬가지. 중국의 고전 삼국지도 재해석되는 과정에서 일본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다.
IMF 이후 미국 문화를 직수입하는 경우가 늘면서 일본의 영향이 줄어들기 시작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흔적은 여전히 여기저기에 남아있다. 진정한 문화의 힘, 일명 소프트파워는 바로 이런 데서 나오는 것이지 ‘관광객 숫자’로 비교할 게 아니다. 나는 일본의 클래식을 자유롭게 재해석하며 노는 하니를 보며 격이 달라진 우리의 소프트파워를 느꼈다. 국력을 수출 얼마, 올림픽 매달 몇 개로만 재는 촌스러운 시대는 이제 지났다.
아, 그리고 또 하나. 팜하니는 최고다. 사실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이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