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되어 있다'
▪외국인들이 미국에 가면 적응하기 어려워하는 것 중 하나가 팁 문화다. 나도 미국에 가서 계절이 두 번 정도 바뀌고 나서야 팁을 줘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 임박한 2024 대선에 후보로 나온 트럼프와 해리스. 두 사람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팁 면세 공약을 들고나왔다. 저소득층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팁으로 받는 돈에는 소득세를 물리지 않겠다는 것.
▪ 듣기엔 아주 그럴싸하다. 일단 ‘No Tax’라는 마법의 단어가 그 자체로 가진 힘이 세고, 덜 가진 사람들을 보호한다는 명분도 매력적이다. 하지만 실제로 적용하면 무슨 일이 생기게 될까?
▪ 아마 엉뚱한 역효과만 초래하고 졸속 정책의 실패 사례로 남을 가능성이 크다.
▪ 첫째, 듣기엔 뭔가 과감한 결단을 내린 것 같지만 정작 미국에서 팁으로 먹고사는 사람은 전체 노동인구의 3%가량에 불과하며, 이중 상당수가 징세 구간에 해당되지 않을 만큼 소득이 낮다.
▪ 둘째, 같은 저소득층 간 불평등을 야기할 가능성이 크다. 같은 배달부라도 고객과 대면 접촉이 이뤄지는, 예를 들면 치킨이나 피자 배달부는 팁을 받기 때문에 면세 혜택을 누릴 수 있다. 반면 우편배달부처럼 팁을 요구할 기회가 없는 경우엔 혜택을 누릴 수 없다. 수평적 공평성, 동일한 수준의 소득에 동일한 세금을 매기는 것 이야말로 조세 형평성의 기본이다. ‘팁’을 기준으로 한 면세 정책은 불공정 논란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정책의 수혜자는 한정되어 있는데 진행과정에서 예상되는 사회적 비용은 높은 최악의 상황인 것.
▪ 셋째, 정작 이 정책의 혜택을 누리는 건 근로자가 아닌 고용자일 가능성이 크다. (아마도 팁의 역사적 기원 때문에 그런 것이겠지만) 팁 문화를 둘러싼 미국의 조세 정책은 철저히 고용자에게 유리하게 되어 있다. 미국 연방정부가 규정한 최저임금은 시간당 $7.25이다. 반면 팁 근로자에겐 $2.13만 줘도 된다. 근로자가 팁을 많이 받지 못해 합계 수입이 $7,25에 미치지 못하면 그 차액을 지급해야 하지만, 직원 하나하나의 수입을 팁과 고정급을 구분해서 추적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시급 $7.25로 미국 물가를 견디는 게 불가능하다 보니) 연방정부 기준과 별개로 주마다 별도의 최저임금을 두고 있긴 하다. 하지만 고용자의 부담을 고객에게 전가하는 메커니즘이란 것은 동일하다.
▪ 만일 팁에 물리는 세금을 면제해 주면 팁 문화가 보다 다양한 업종으로 번져 나갈 가능성이 크다. 최악의 경우 변호사와 같은 고소득층들이 팁으로 자문료를 받는 꼼수를 부릴지 모른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옛말에 ‘지옥으로 가는 도로는 선의로 포장되어 있다’고 했는데 딱 그 꼴이다.
▪ 이처럼 적신호가 많은데도 불구하고 팁 면세를 지지하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높아지고 있다. 아마도 2024 대선이 끝날 때까지는 이러한 추세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감세’와 ‘약자 보호’는 정치판에선 결코 거스를 수 없는 무적의 주문과도 같기 때문이다. (반면 이 둘이 서로 충돌, 모순되는 경우가 많다는 걸 지적하는 목소리는 인기가 없다)
▪ 이 정책이 실행되면 줄어들 것으로 예상되는 조세 수입은 향후 10년간 약 400조 원이다. 큰돈이지만 미국이라면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규모로도 보인다. 문제는 이보다 훨씬 비싸고 더 경솔하게 준비되고 있는 인기 영합 공약들이 많다는 것이다. 하나하나는 크지 않아도 다 모으면 아무리 초강대국 미국도 골병이 날지도 모른다.
▪ 어쩌면 이건 ‘다수결’의 원칙 위에 세워진 현대 민주주의 국가가 피할 수 없는 숙명일지 모른다. 뭐, 최소한 우리는 정말 이 길이 맞냐는 논쟁도 할 수 있고, 아니다 싶으면 브레이크를 밟거나 방향을 틀 수도 있다. 한번 정하면 지옥에 떨어질 때까지 전력 질주하는 권위주의 정부들에 비하면 훨씬 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