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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은 진정한 단합을 이룰 수 있을까

트럼프에게 조롱당한 구대륙

by 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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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2년, 나폴레옹은 60만 명에 달하는 대군을 조직해 러시아를 침공한다.


흔히 알려진 것과 달리 나폴레옹이 이끈 군대는 19세기판 NATO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다채로운 혼성군이었다. 나폴레옹 본대는 약 20만 명 정도였으며 라인 동맹이 13만 명, 폴란드가 10만 명을 지원했다. 나머지는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스페인 등 각지의 동맹국 및 속국에서 자의반 타의반으로 합류한 병력이었다.


초반의 기세는 대단했다. 표준화에 대한 집착으로 유명한 나폴레옹은 전군의 무기와 명령 체계를 일원화했고, 덕분에 60만 대군은 꽉 쥔 거대한 주먹처럼 단번에 러시아를 깨부술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들의 단합은 생각했던 것처럼 단단하지 못했다. 겉으론 통합된 것처럼 보였지만 속으론 다들 동상이몽, 한마음으로 뭉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러시아에 대한 분노로 가득한 폴란드와 싸울 의지도, 이겼을 때 딱히 얻을 것도 없는 라인 동맹의 군대는 전쟁을 대하는 태도가 다를 수밖에 없다.


진정한 단합은 매뉴얼과 복장의 통일, 감성적인 슬로건, 끝나고 나면 기억에도 남지 않는 가식적 이벤트로 이뤄지는 게 아니다. 각자의 다양한 욕구가 서로 의존하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단합은 호소해서 되는 게 아니라 정교한 설계를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진정한 단합은 가슴이 아니라 머리에서, 조직의 목표가 개인의 목표와 다를 수 있다는 걸 이해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강자에 대항하기 위해 약자들이 힘을 모은 사례를 여럿 찾을 수 있다.


“…천하의 지도를 놓고 살펴보건대, 제후들의 땅은 진나라의 5배가 넘고, 제후들이 보유하고 있는 병사들의 수는 진나라의 10배가 넘습니다. 육국이 하나가 되어 힘을 합해 진나라를 공격한다면 어찌 격파할 수 없겠습니까”


중국 전국시대에 활약한 소진이 남긴 말이다. 그는 강대국 진나라를 저지하기 위한 대안으로 여섯 나라의 동맹을 제안했다. 그 결과 파죽지세 같았던 진나라의 중원 진출에 브레이크가 걸리며 정국은 소강 상황으로 접어들었다.


하지만 그 효과는 일시적이었다. 서로 이해관계가 다른 나라들 간의 동맹은 겉으로 보기엔 위풍당당했으나 실속이 없었다. 진나라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어 상대적으로 안전했던 제나라는 언제나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하며 양다리를 걸치기 일쑤였다. 다른 나라들도 내심 어부지리를 기대하며 뒤로 빠지는 경우가 많았다. 심지어 진나라의 침입을 틈타 배후에서 동맹국을 찌르는 배신이 속출하기 시작했다. 결국 동맹은 와해되었고 여섯 나라들은 차례로 진나라의 먹이가 됐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강자에 대항하기 위해 약자들이 힘을 모은 사례를 여럿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류의 집단 안보가 성공한 사례는 의외로 찾기 어렵다. 역으로 약자들 간의 불협화음이 원인이 되어 하지 않느니만 못한 결과로 끝나는 게 태반이다.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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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가기 때문이다. 책임을 지고 최종결정을 내릴 수 있는 리더, 모두가 수긍하는 단일한 지휘체계가 없다면 그 연합은 실체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나폴레옹의 ‘두 명의 명장보다 한 명의 평범한 장군이 낫다’는 말은 고금을 뛰어넘는 진리다.


둘째, 입으로는 한마음을 외치지만 막상 피를 흘려야 할 때가 오면 무임승차하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히기 마련이다. 희생해야 할 때엔 힘을 아꼈다가 이익을 나누는 자리에서 전력을 다하는 게 합리적이기 때문. 2차 세계대전 때 마지막까지 참전을 미뤘던 미국, 백제를 배신하고 한강 유역을 차지한 신라가 대표적이다. 역사는 비겁한 자가 포상을 받은 기록으로 가득하다.


셋째, 상호 불완전한 신뢰로 인해 발생하는 비효율 때문이다. 유럽이 진정한 단일 군사협력 체제로 다시 태어나려면 각 나라가 서로 잘하는 분야에 집중하는 게 효율적이다. (프랑스는 육군과 핵전력, 독일은 지상 장비, 핀란드는 포격 능력 등) 하지만 이는 정치공학적으로 불가능하다.


최근 유럽에서 단합을 외치는 목소리가 뜨겁다. 지지부진했던 유럽군 창설을 둘러싼 논의도 다시 활발해지고 있다. 러시아를 미국의 도움 없이 직접 감당해야 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하지만 가능할까?


유럽에서 가장 인구와 경제규모가 큰 나라는 독일이다. 하지만 군사력과 정치적 영향력은 프랑스가 한 수 위에 있다. 두나라와 맞먹는 체급을 자랑하는 영국은 여전히 정체성 혼란에 빠져 미국과 유럽 본토 중 어느 쪽에 외교력을 집중해야 할지 갈팡질팡하고 있다. 미국 정찰자산 의존도가 높은 영국이 과연 유럽에 올인하는 게 가능할까?


NATO에서 미국 다음으로 큰 규모의 군대를 지닌 터키는 정작 EU에선 빠져있다. 헝가리와 세르비아는 친러 성향 정부가 연임 중이며, 이탈리아는 적극적으로 친미 시그널을 보내며 하나의 유럽, 정확히는 프랑스가 주도하는 유럽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국방비 증액을 둘러싼 반응도 각각 천차만별이다. 러시아를 실존적 위협으로 체감하고 있는 북유럽, 동유럽의 나라들은 작금의 현실을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반면 서유럽은 아직도 ‘좋았던 어제가 언젠간 돌아올 것’이라는 기대를 완전히 버리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유럽의 단결을 위해 더 많은 걸 부담해야 하는 쪽이 서유럽이란 걸 감안하면 이러한 공감대의 불균형은 심각한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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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한 유럽의 정치인이 “5억 명의 유럽인이 고작 1.4억 명의 러시아인들이 두려워 3억 명의 미국인들에게 매달리고 있다” 며 유럽의 각성을 요구하는 발언을 해 화제가 됐다. 유럽이 하나로 뭉칠 수만 있다면 지금 당장, 거의 모든 면에서 러시아를 압도할 수 있다.


지금 유럽에게 절실한 것은 리더십이지 핵무기나 천연가스가 아니다. 과연 단합을 위한 유럽의 노력은 성공할 수 있을까? 갈수록 접착력을 잃어가는 EU는 이번 사태를 계기로 새롭게 태어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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