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미국 현지는 DOGE가 불을 지핀 논란으로 시끄럽다
처음엔 공화당 지지자들도 트럼프 특유의 ‘성동격서’ 정도로 여겼으나, 이젠 많은 이들이 실존적인 위협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워싱턴 현지에선 부동산 가격이 들쑥날쑥한다는 이야기가 들린다. 머스크가 재택근무 금지령을 내리자 워싱턴 중심가로 이사하려는 공무원들 때문에 집값이 폭등하더니 이번엔 대량 해고가 현실화되면서 매물이 쏟아지고 있다는 것.
DOGE가 미국 행정의 새로운 전환점이 될지, 아니면 무분별한 삭감으로 혼란을 야기하는데 그칠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할 것 같다. 그 배경에 대해서도 미국의 현실을 직시하고 내린 합리적인 처방전이라는 주장부터 정교하게 설계된 미국의 ‘을묘사화’라는 음모론까지 해석이 분분하다.
개선의 여지가 있는 건 분명하다. 미국에 살아본 사람이라면 공항에서 시작해 운전면허 교통국에서 마무리되는 정착 과정에서 초강대국답지 않게 허술한 미국의 첫인상에 당황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머스크가 주장하는 천문학적인 예산 절감이 가능할지는 의심스럽지만, 미국 사회에 변화를 요구하는 경종 역할을 한다면 이 정도의 혼란은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넘어선 안될 임계점은 존재한다. 나라 살림은 경영과 달리 효율성을 유일한 지상 과제로 추구할 수 없으며, 그래서도 안된다.
국민과 정부가 맺은 사회 계약은 일반적인 고용 계약과는 그 성격이 본질적으로 다르다. 우리는 정부에게 우리 삶을 통제할 수 있는 독점적 권한을 위임했다. 정부는 내 생명을 합법적으로 거둘 수 있는 유일한 존재다. 행정부가 무능할 경우 ‘선거’나 ‘소송’이란 수단으로 대항할 수 있지만 공화국이라는 개념 자체를 거부할 순 없다.
따라서 정부는 효율성이란 척도만으로 움직여선 안된다. 정부의 존립 자체가 모든 국민을 대표한다는 형평성의 명분 위에 서있기 때문이다. 정부에겐 65살이 넘어 생산성이 떨어진 국민으로 추방하거나 학력이 일정 수준 이상이 되어야만 참정권을 줄 권리가 없다. 공화시민의 권리는 천부인권인 자유를 포기한 대가로 얻어진 것이지 매년 납세액이나 GDP 기여 여부로 갱신되는 멤버십이 아니다.
관료제는 본질적으로 자가 증식하는 성격을 지닌다. 귀한 혈세가 효율적으로 쓰일 수 있도록 조직에 긴장감을 불어넣는 건 바람직한 일이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내 돈이 저렇게 엉성하게 쓰인다는 데 분노해 보지 않은 사회인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기업과 달리 정부는 공공재이며, 아무리 필요한 개혁도 그 방식과 강도에 대해서 공적인 합의가 있어야 한다. DOGE가 추구하는 효율적인 세상이 누군가에겐 힘들고 불안한 세상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는 DOGE의 정책이 옳고 그름의 여부와 성격이 다른 문제다. 애초에 민주주의 자체가 이러한 비효율을 어느 정도는 감수하겠다는 전제로 만들어진 시스템이다. 너무 흔들면 예산 몇 푼보다 훨씬 더 귀한 게 손상될 수도 있다.
때론 급할수록 천천히 가야 한다. 절차를 지켜가며 사람들을 설득해 가며 차분히 진행했으면 어땠을까? 쇠뿔은 무조건 단김에 빼야 하는 걸까? 자칫하면 민주당의 과도한 이념적 경색이 그 반동을 불러일으켰던 역사가 반복될지도 모른다. 아니, 이미 그런 기색이 보이고 있다.
이 모든 걸 그저 미국의 일이라며 강 건너 불구경할 수 없음은 물론이다. DOGE처럼 스케일이 크지 않을 뿐 우리 주변에서도 비슷한 일들이 끊임없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