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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의 정보화 혁명, 그리고 지금

by 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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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전환점, 소위 말하는 Tipping Point란 게 존재한다.


이때 행동에 나설 수 있는 결기와 제대로 된 방향 추를 잡을 수 있는 지혜를 발휘한 자들이 시대의 승자가 되어 과실을 독차지하게 된다. 그리고 뒤처진 자들은 잘해봐야 추격자, 최악의 경우엔 낙오자로 전락하고 만다.


1990년대, 한국은 IT 혁명에 기민하게 대처해 승자의 반열에 올랐다. 만일 이때 겁을 먹고 주저했거나 방향을 잘못 잡았다면 오늘날 선진국으로 도약한 대한민국은 없었을 것이다. 당시의 한국이 Developing Country 특유의 야성과 Advanced Economy의 세련됨이 예술적으로 균형을 이룬 나라였던 덕분이었을까? 당시 한국이 보여준 산업 정책은 지금 되돌아보아도 여러모로 감탄하게 된다.


첫째, 선제적으로 정보통신부를 설립해 범부처 차원의 계획을 종합, 조정, 추진할 수 있는 통합 거버넌스를 구축하였다. 기존의 체신부를 정보통신부로 확대 개편하자 기존 부처들의 반발이 컸던 것, 이후 주도권을 둘러싸고 치열한 영역 다툼이 벌어졌던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특히 노무현 정부가 전자정부 구축 사업을 진행하는 과정에선 범정부 위원회의 개입에도 불구하고 부처 간 험악한 말들이 언론에 오르내릴 정도로 갈등이 심했다. 만일 정부가 확실한 의지를 가지고 그립감을 유지하지 않았다면 여러 번 판이 뒤집어졌을 것이다.


둘째, 당장 눈앞의 실적에 연연해 좌충우돌하는 우를 범하지 않았다. 거창한 성과 이전에 초중고 컴


퓨터 보급과 통신비 지원을 시작으로 국민들의 정보 이용도 및 인식을 개선하기 위한 다양한 정책들을 추진했다. 이러한 노력은 단순한 복지에 그치지 않고 IT 산업을 지탱할 수 있는 인력 양성 및 소비자 기반 확보라는 선순환 구조로 이어졌다. 닷컴 버블이 꺼지며 디지털 회의감이 확산되었을 때도 ‘옥석이 가려지는 과정일 뿐’이라며 대통령이 직접 벤처 재육성의 의지를 보였다.


셋째, 그 누구도 경제성 확보를 장담할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수십 조원의 거액을 초고속 국가망에 투자했다. IMF 직후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는 놀라운 일이다. 그 결과 한국은 초고속 인터넷 가입률 세계 1위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21세기를 맞을 수 있었다. Dynamic Korea답게 이후 정치적으로 굴곡이 많았고 여야 정권교체도 있었지만 디지털이 미래라는 초당적 합의는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


넷째, 스타트를 끊는 건 정부지만 결국 모든 기술은 시장에서 완성된다는 것을 잊지 않았다. KT를 민영화하는 등 민간의 참여를 점진적으로 늘려갔고, 디지털 표준을 선제적으로 수립해 민간이 투자할 수 있는 정책환경을 마련해 줬다. 또한 전자정부 구축을 비롯해 굵직한 인프라 사업을 꾸준히 기획해 자생적인 산업 생태계가 생길 수 있도록 도왔다.


돌이켜봤을 때 아쉬운 게 없었던 건 아니다. 인프라에 집중하느라 소프트웨어 역량이 낙후되고 폐쇄적인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비판은 뼈아프다. 정부의 대규모 자금이 들어간 프로젝트였는데 몇몇 기업이 가장 큰 혜택을 봤다는 걸 지적하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당시의 한국에 그것까지 바라는 건 지나치게 비현실적인 게 아닐까? 그나마 ‘선택과 집중’의 논리로 먹힌 덕분에 최소한 하드웨어 측면에선 세계적인 기술력을 가질 수 있었고 이를 통해 반도체, 휴대폰 같은 새로운 먹거리 확보가 가능했다. 이러한 단계를 거쳤기에 세계에서 몇 안 되는 독자 포탈과 SNS를 가진 나라가 되었고 네이버 같은 벤처 성공신화도 가능했다. 뭐든 순서라는 게 있는 법이다.


확고한 의지, 꾸준한 실천, 전략적 선택, 마지막으로 시의적절한 민관 간의 바통터치까지. 한국의 정보화 성공은 중견급 나라들을 위한 모범사례로 손색이 없다. 국민의 정부가 핵심적인 역할을 했지만 정보통신부를 설립한 문민정부를 시작으로 국민의 정부가 세운 비전을 계승한 후대 정부들의 역할도 컸다. 정보화는 팀코리아의 성공이었다.


사회생활을 막 시작할 때 선배가 해줬던 말이 생각난다. 결국 한국은 자동차, 반도체, 조선, 철강, 화학으로 먹고사는 나라니까 그 물줄기 안에서 먹고 살 궁리를 해야 한다고.


그 이후 세상이 많이 바뀌었다. 우리의 간판 산업들이 하나같이 구조적인 위기에 놓여 신음하고 있다.


그동안 정보화를 잇는 프로젝트가 여럿 있었다. 하지만 한철 유행을 넘어 꾸준한 동력과 분명한 전략적 방향을 가지고 정상으로 밀어 올리는데 성공한 건 없었던 것 같다. 굳이 꼽자면 한류 정도가 있겠지만 어쩔 수 없이 그 스케일이 제한적이다.


우물쭈물하던 사이에 ‘다음 먹거리’를 위한 고민이 성장의 문제가 아닌 생존의 문제가 되어 버렸다. 이제 다시 미래담론의 계절이 다가왔다. 한철 유행이 아닌 백년대계를 위한 담론들이 펼쳐지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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