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관세를 떨궜다. 허풍일 거라는 일각의 기대와 달리 오히려 더 센 강도의 폭탄이 떨어져 그 파장이 어마어마하다.
관세는 양날의 검이다. 이번 조치에 대한 미국의 공식 목표는 관세를 통해 얻는 수입으로 감세와 국가채무 감소를 노리고, 나아가 미국을 떠난 제조업 일자리들이 가져오겠다는 것이다. 그동안 미국이 감수해온 불공평한 무역 관행을 바로잡는 것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적잖다. 반면 경제 전문가들은 이번 조치가 극심한 불확실성과 인플레이션을 가져와 미국 경제에 큰 타격을 줄 것이라고 우려한다.
미국이 세계경제의 원칙을 뒤흔든 건 이게 처음이 아니다. 1940년대에 브레튼우즈 체제로 불리는 국제금융 체제를 만들었고, 1970년대에 닉슨이 금본위를 일방적으로 포기하면서 자기가 만든 판을 뒤엎었다. 1980년엔 레이건의 주도 하에 소위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룰을 도입했다. 플라자 합의는 이 과정에서 벌어진 상징적 해프닝이었다.
이번 관세 조치는 즉흥적이지 않은, 철저히 계산된 전략적 수라는 게 내 생각이다. 트럼프 특유의 자극적인 연출 때문에 더 극적으로 느껴질 뿐, 닉슨과 레이건이 휘두른 펀치가 트럼프의 그것에 비해 파괴력이 떨어지는 건 아니었다.
그동안 미국이 글로벌 질서를 설계해온 역사를 되짚어 보자.
브레튼우주 체제의 기본 원칙은 다음과 같다. 첫째, 금에 연동된 미국 달러가 전 세계 기축통화 역할을 한다. 둘째, 미국은 우방들의 안보를 책임진다. (따라서 우방들은 미국의 지휘를 받아들이고 필요 이상의 과도한 국방력 – 예를 들면 핵전력 – 을 추구하지 않는다) 셋째, 미국은 우방들이 전쟁으로 파괴된 나라를 재건할 수 있도록 미국 시장 진출을 용인한다.
이렇게 보면 미국이 우방들을 위해 굉장히 호혜적인 관계를 허용한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도 그런 면이 크지만, 세상에 일방적인 거래는 존재하지 않는다. 미국은 공산진영에 대적하기 위해 강하고 공산주의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 견고한 중산층이 이끄는 우방들이 필요했다. 여기엔 과잉생산에 허덕이던 미국 기업들이 수출할 수 있는 시장이 필요하다는 경제적 판단도 작용했다.
국방도 마찬가지. 만일 미국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독재, 공산주의, 그리고 어쩌면 광기의 핵 확산으로 온 세계가 통제 불능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미국이 자유진영을 재건하기 위해 투입한 천문학적인 비용은 장기적인 관점에선 훨씬 더 큰 이익으로 되돌아왔고, 미국의 초강대국 지위가 견고해지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세상도 변했다. 공산진영은 붕괴되었고, 한때 아사 직전이었던 우방들이 강력한 산업 경쟁자들로 성장했다.
그러자 미국은 대대적으로 새 판 짜기에 나섰다. 금본위 제도를 폐기해 달러 발행의 상한을 없애 버렸고, 나라 간 무역과 금융 투자를 가로막던 규제를 폐지해 달러의 영향권을 전 세계로 확대했다. 이를 위해 그동안 우방에게만 적용되었던 안보 보장도 한발 더 나아가 세계 평화를 보장하겠다는 공약으로 확장되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 세상에 일방적인 거래는 존재하지 않는다. 달러의 영향력이 대폭 강화된 덕분에 미국은 세계 최강의 군대를 유지할 수 있었다. 또한 글로벌 실물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꾸준히 낮아졌음에도 불구하고 금융의 힘으로 세계 경제에 막강한 영향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달러의 마법으로 미국은 초강대국의 지위를 더욱 공고히 했다.
하지만 세상에 공짜는 없고, 모든 것은 대가가 뒤따르는 법이다.
달러가 강해진 결과 한때 세계 제조업의 절반을 차지했던 미국의 제조업은 경쟁력을 잃었다. 미국의 기업들은 저렴한 생산처를 찾아 해외로 빠져나갔으며 그중 대부분이 중국으로 흘러 들어갔다.
오늘날 중국의 산업 역량은 미국의 그것을 압도한다. 만일 두 나라 간에 무력 분쟁이 일어난다면? 지금이야 기술의 미국이 우위에 있지만 총력전이 벌어졌을 때도 그럴 수 있을까?
달러의 마법이 모든 미국인에게 공평하게 적용되지 않은 것도 문제다. 세계화의 혜택을 누린 서비스 부문과 희생을 강요당한 제조업 부문 간의 갈등은 아예 세계관이 다른 수준에 이르렀다. 그 결과, 한때 이념처럼 받아들여졌던 자유무역에 대한 회의론이 서서히 설득력을 얻기 시작했다.
돌이켜보면 미국이 자유무역에 물음표를 던진 그 순간 이미 구질서는 그 효력을 다했던 것이다. 전임 대통령이었던 바이든 역시 천문학적인 보조금을 투입하며 미국 현지 기업 육성에 열심이었다. 과거 국영기업들에 대한 보조금을 ‘반칙’이라고 비판했던 바로 그 미국이 말이다.
미국에 제조업 재건은 더 이상 선택이 아닌 필수다. 그렇다고 달러의 지배적인 지위를 포기할 수도 없다. 언뜻 보면 서로 상반되는 것처럼 보이는 두 목표를 동시에 달성하는 게 가능할까?
협상에 성공하기 위해선 레버리지가 있어야 한다. 이번 관세 논란으로 미국은 전 세계 국가들을 협상장으로 끌어올 수 있는 판을 까는데 성공했다. 미국에도 엄청난 파장이 있겠지만, 공장과 시장이 싸우면 시장이 이기게 되어있다. 그린란드, 51번째 주 같은 논란도 같은 맥락에서 펼쳐지는 빌드업이 아닐까?
어쩌면 내가 지나치게 낙관적인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니, 어쩌면 너무 비관적인 것일지도.
…1973년, 닉슨이 금본위를 포기하고 2년 뒤 미국은 사우디와 페트로달러 합의를 이뤘다. 석유를 달러로만 거래한다는 합의로 달러의 지위는 금과 연동되었을 때보다 더욱 견고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