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과 집중
쥬라기 시리즈의 신작, ‘쥬라기 월드: 새로운 시작(이하, 새로운 시작)’을 봤다. 전작 ‘도미니언’이 졸작이었기 때문에 기대치가 높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워낙 포지셔닝이 탄탄한 영화라 반쯤은 습관처럼 극장가를 향하게 되었다. 괴수물 특유의 서스펜스와 가족 관객에게 어필할 수 있는 따뜻함의 조합은 쥬라기 공원만의 USP(Unique Selling Point)이다. ‘공룡’이라는 아이템을 선점한 덕분에 완성도가 떨어져도 최소한의 흥행을 기대할 수 있는 시리즈. 역시… 뭐든지 판을 잘 까는 게 중요하다. 어떤 패가 나오느냐는 그다음 문제.
하지만 아무리 질긴 생명력을 자랑하는 소재여도 7번째 작품이라면 기획 과정에서 고민이 많았을 것이다. 과학과 윤리의 갈등, 인간과 자연의 공존을 둘러싼 주제의식은 전설의 1편이 이미 완벽하게 풀어낸 바 있다. 웬만한 인기 공룡은 다 써먹었고, ‘이건 공룡이 아니다’라고 비판하는 과학 매니아들의 이탈을 감수하면서 하이브리드 공룡까지 써먹었기 때문에 캐릭터의 힘으로 진부함을 극복하기도 한계가 있다. 시리즈의 전환점이었던 ‘쥬라기 월드’는 공룡이 일상이 된 세계를 그려 차별화를 노렸지만 잠깐 신선했을 뿐이다(오히려 공룡보다 인간의 비중이 많아 시리즈의 정체성이 흔들리는 역효과가 났다)
그렇다면 이번에 나온 7편은 어땠을까? 한마디로 말하면 ‘분수를 아는 작품’이었다.
‘새로운 시작’은 진중한 척하지 않는다. 과학의 결실(치료제)을 소수가 독점해서는 안 된다는 주제가 다루어지지만 얄팍한 수준에 그친다. 주인공(스칼렛 요한슨)이 치료제를 나누기 싫다고 반대했어도 ‘그래? 싫음 말고’로 끝났을 것 같을 정도다.
인간 캐릭터들은 스테레오 타입 그 자체다. 스칼렛 요한슨이 본인의 매력을 무기로 분투하지만 워낙 캐릭터가 단편적이라서 한계가 명확하며, 그 밖의 캐릭터들은 그저 스토리를 진행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
한 가지 언급하고 싶은 것은, 이 영화는 스토리나 캐릭터로 승부하려고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 치료제를 만들기 위해 육지, 바다, 하늘 공룡의 DNA가 필요한지, 누가 어떤 목적으로 변종 실험을 했는지에 대한 설명은 끝까지 나오지 않는다. 섬에서 벌어진 일이 루빈과 제이비의 관계를 어떻게 바꾸었는지도 제대로 묘사되지 않는다. 어떻게 고무보트가 티라노의 치악력을 견딜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일체 언급이 없다. 생각을 많이 하면 할수록 집중하기 어려운 영화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나면 이 모든 게 의도적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감독은 철저하게 이 시리즈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는 대신 나머지를 과감하게 포기했다. 영화는 최대한 많은 공룡들을 가능한 다양한 극한 상황 속에서 보여주는 것에 집중한다. 논리적으로는 어이가 없는 고무보트도 영화 속에서는 추격 장면의 긴박함을 극대화하는 훌륭한 장치로 기능했다.
이러한 ‘전략적 집중’은 제작비에서도 드러난다. 2시간이 넘는 상영 시간에 시각적인 만족감도 대단한데 제작비는 전작의 절반도 되지 않는다. 전작 ‘도미니언’은 $500M이 들었는데 이번 작품은 $180M 수준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영화에서 실제로 느껴지는 스릴은 이번 작품이 훨씬 뛰어나다.
어차피 1편처럼 새로운 메시지와 훌륭한 스토리로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건 불가능하다. 공룡들을 현대 문명(정확히는 근미래)으로 끌고 온 이상 세밀한 설정과 풍부한 캐릭터를 만들려면 상영 시간 중 많은 부분을 할애해야 한다(‘에일리언 2’는 시작 후 1시간이 지나서야 괴물이 등장한다).
전작의 부진으로 흥행 부담감이 큰 상황에 리소스를 분산하는 건 위험한 선택이다. 영화는 철저히 시리즈를 소구하는 관객층을 타겟팅하고 쥬라기 시리즈가 가장 잘하는 것에 집중했다. 그 밖의 모든 것은 철저히 버렸다. 그 결과? 이 시리즈를 즐겨 본 사람들이라면 만족할 수 있는 영화가 나왔다. 미국에서의 흥행도 순조로우며 제작비를 대폭 절감한 덕분에 수익 차원에서는 전작을 능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어차피 모두를 만족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때로는 백만 명의 관객에게 호소하는 것보다 만 명의 찐팬을 유지하는 게 현명한 전략이다. 로켓랩(Rocket Lab)은 다행성종의 미래와 같은 거창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결론: 블록버스터의 쾌감만 놓고 보면, 4편(쥬라기월드) 이후 나온 후속작 중에서는 가장 잘 만든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