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대의 명절 추석을 맞아 한 권의 책을 집어 들었다. ‘Apple in China: The Capture of the World’s Greatest Company’, 파이낸셜타임스 기자 출신인 패트릭 맥지(Patrick McGee)가 쓴 이 신간은 중국이 제조업 초강대국으로 도약하는 과정에서 애플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생생하게 그려낸다.
무미건조한 통계 대신, 성공과 실패, 좌절과 극복을 넘나드는 드라마 같은 이야기와 다양한 인물들로 가득해 지루할 틈이 없다. 스승이었던 애플이 한때 순종적인 제자였던 중국에게 인질로 붙잡히는 과정을 셰익스피어의 비극과 중국 전국시대 와신상담의 이야기를 떠올리게 할 만큼 실감나게 묘사한다.
이 주제는 우리와도 무관하지 않다. 책에는 LG를 비롯해 익숙한 한국 기업들의 이름들이 등장한다. 스티브 잡스가 애플 부활의 신호탄으로 준비한 아이맥의 핵심 협력사는 LG였다. 당시 폭스콘(Foxconn)은 실력과 인지도 모두 LG에 한참 못 미쳤다.
그럼에도 창업자 궈타이밍은 초기 비용 전액을 부담한다는 파격적 조건과 함께 훨씬 저렴한 공급가를 제안했다. 폭스콘 입장에서는 수익이 전혀 남지 않는 구조였지만 애플과 일하는 경험 그 자체가 목적이었던 궈타이밍에게 그런 건 큰 문제가 아니었다. 10년 이상을 내다본 이 과감한 투자에 승리의 여신은 후한 보상을 안겨주었다. 오늘날 폭스콘의 시가총액은 LG전자의 10배가 넘는다.
저자는 중국의 성장을 그저 편법의 결과에 불과하다고 과소평가하는 시선을 비웃는다. 물론 중국이 직, 간접적으로 기술을 탈취한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그 반대편에는 중국의 초대를 반기며 스스로 자청해 중국의 그물에 걸려든 선진국 기업들이 있었다. 거대한 내수시장, 저렴한 인건비, 학대에 가까운 노동 착취를 묵인하는 공산당 체제, 그리고 더 나은 내일을 위해서라면 오늘의 안락함을 포기하는 건 망설이지 않는 근로 윤리의 조합은 오직 중국만 제공할 수 있었다. 중국이라는 사과는 너무나도 달콤했고, 이를 한번 맛본 애플은 다시는 다른 지역에서 나는 시큼하고 비싼 사과를 먹을 수 없게 됐다.
애플은 자발적으로 자국의 설비를 뜯어 중국으로 옮기고, 최고의 엔지니어를 보내 기술을 전수했다. 한 애플 관계자는 새로운 기술, 설비, 제품이 나오면 가장 먼저 중국에서 시험해 보는 것이 애플의 불문율이었다고 고백한다. 중국이라는 카지노에 수많은 함정이 깔려 있었던 건 맞지만, 그 사실을 알면서도 기꺼이 테이블에 앉아 밤을 세워 패를 돌린 건 애플이었다. 과거 서구가 아편으로 중국을 중독시켰다면, 이번에는 중국이 자본으로 서구를 중독시킨 셈이다.
서양 기업들은 주주이익 극대화가 기업의 지상 과제라는 명분 아래 단기적 이익에 매몰되어 장기적 위기를 외면했고, 우려하는 목소리들을 자본주의의 힘으로 중국을 길들일 수 있다는 근거 없는 낙관론으로 짓눌렀다. 연간 실적을 발표하는 1년, 기껏해야 선거가 치루어지는 4~5년 주기로 계획이 이루어지는 자유세계는 ‘군자의 복수는 10년이 걸려도 늦지 않다’는 말을 가슴에 새긴 노회한 중국에게 끌려다녔다.
하지만 우리에게 애플의 실수를 비웃을 자격이 있는지는 의문이다. 한국의 주력 산업이 중국에 잠식될 것이라는 경고는 이미 오래전부터, 최소한 2008년에는 상식으로 통했다. 그럼에도 우리는 시장 다변화를 제한적으로 시도했을 뿐 본질적인 대응은 이루어진 게 거의 없다. “중국에 못 팔면 미국에 팔면 된다”는 발상을 크게 넘어서지 못한 것이다.
일각에서는 대의민주주의의 변덕과 충동이 전제 일당독재보다 무능한 증거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솔직히 말해 그건 오버가 좀 심하다. 모든 전제주의가 중국처럼 장기적으로 안정적 성장세를 이어가는 것은 아니다(러시아를 보라). 어쩌면 정치체제보다 문화적 요인이 더 큰 원인일지도 모르겠다. 강태공과 구천의 나라라서 그런 걸까?
세상에 영원한 2등, 영원한 을, 영원한 조연에 머물기를 원하는 이는 없다. 그러나 1등과 갑, 주연들은 눈앞의 경쟁자에 몰두한 나머지 가장 큰 잠재적 위협이 곁에 있다는 사실을 종종 잊곤 한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새로운 1등은 기존의 강자를 정면으로 꺾기보다는 그들에게 편승하거나 기생하면서 자리를 훔쳐온 경우가 많았다. 정면대결은 리스크가 크고, 설사 이긴다 해도 비용이 많이 든다.
영국의 패권을 빼앗은 건 독일이 아니라 배후에서 야금야금 유산을 가져간 미국이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애플과 IBM에게 올라타 세계 최강 기업이 됐고, 시진핑은 장쩌민과 후진타오의 미묘한 균열에 편승해 절대 권력자가 되었다. 미국에게 오늘날 중국이 과거의 소련보다 훨씬 더 큰 위협으로 다가오는 이유다. 정면에서 날라오는 주먹보다 안으로부터 내 몸을 갉아먹는 기생충이 훨씬 더 위협적인 법이다.
승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동안 중국의 추격전략이 대성공을 거둔 건 맞지만 앞으로 스승 없이 스스로, 스승을 뛰어넘는 새로운 방식으로도 성공을 거둘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판세만 보자면 장기판을 주도하고 있는 건 중국인 것 같다. 미국이 연이어 장군을 외쳐도 중국이 깔아 놓은 판은 쉽게 흔들리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