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26일, 블루 오리진은 토리 브루노가 신설 사업부인 국가안보 부문 사장으로 합류한다는 소식을 발표했다. 이 업계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뉴스가 최근 미국 발사체 업계 전반에 걸친 긴장과 경쟁, 그리고 미래를 둘러싼 셈법을 읽을 수 있는 중요한 단서라는 점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브루노는 낯선 이름이 아니다. 1961년생인 그는 지극히 전형적인 항공우주 분야 커리어를 쌓아온 인물이다. 기계공학을 전공한 뒤 록히드 마틴에서 인턴으로 경력을 시작했고, 이후 기술직과 관리직을 거쳐 임원으로 성장한 뒤 2014년 ULA의 CEO 자리에 올랐다. 그는 10년이 넘는 재임 기간 동안 과거의 유산이 된 Atlas V와 Delta IV의 퇴역을 준비하는 동시에 신형 발사체인 Vulcan의 개발과 국방 계약 수주를 이끌었다. 많은 이들에게 브루노는 ULA의 얼굴이었으며, 소위 말하는 ‘올드 스페이스(old space)’의 상징으로 여겨져 왔다.
ULA는 록히드 마틴과 보잉이라는 두 거인이 합작해 설립한 회사다. 최근 몇 년간 업계에서는 ULA가 과연 어떤 전략을 그리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끊이지 않았다. 관대한 국방 계약 덕분에 꾸준한 수익을 내고는 있지만, 민첩하고 과감한 SpaceX의 부상으로 인해 점점 미래가 불투명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ULA는 뼈를 깎는 각오로 재정비에 나서기보다는, 안정적인 국가 계약 수익을 최대한 오래 유지하는 데만 관심이 쏠려 있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이번 인사 소식에 사람들이 놀라긴 했지만 크게 당황하지는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어차피 ULA에 남아 있어도 브루노가 시도할 수 있는 변화의 폭은 제한적이었을 것이라는 인식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반면 블루 오리진에서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베이조스가 설립한 블루 오리진은 그동안 느린 행보로 많은 비판을 받아왔지만 이제는 본격적으로 칼을 뽑아 들 준비가 된 모습이다. 최근 대형 발사체 New Glenn을 두 차례 발사하는 데 성공했고, 국방 목적 발사 임무의 후보군에도 이름을 올렸다. 브루노가 가진 경험과 인맥, 그리고 그의 이름이 지닌 신뢰도는 블루 오리진이 본격적으로 사업을 확장하는 데 있어 큰 힘이 될 것이다.
블루 오리진의 ULA 인수설 역시 불발에 그칠 가능성이 커졌다. 블루 오리진은 록히드 마틴과 보잉에 막대한 인수 비용을 지불하는 대신 사실상 ULA에서 가장 필요했던 자산만 빼 왔다. 바로 국가안보 발사 시장의 암묵적 규칙과 구조적 페인 포인트를 속속들이 이해하고 있는 내부 인사다.
일부는 브루노를 ‘공룡’에 비유하며, 블루 오리진에는 보잉 세대의 베테랑이 아니라 더 젊고 근본적으로 새로운 사고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다수는 이번 결정을 현실적이고 전략적인 선택으로 평가한다. 브루노의 합류는 그 자체로 블루 오리진이 기술적 성과를 실제 계약으로 전환할 준비가 되었음을 상징한다. 동시에, 회사 경영진 내에 ‘진짜 로켓 전문가가 없다’는 불안을 상당 부분 해소하는 효과도 있다. 예를 들어 CEO인 데이브 림프는 2023년 블루 오리진에 합류하기 전까지 로켓 관련 경험이 전무했다.
이번 인사의 타이밍 역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브루노는 블루 오리진의 발표 직전에 ULA에서 물러나며, 단지 ‘새로운 기회를 추구하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혹시 언론에 공개되지 않은 사내 정치로 인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밀려난 것일까? 한 가지는 분명해 보인다. 브루노가 보기에 Vulcan, 나아가 ULA의 미래보다 New Glenn와 블루 오리진의 미래에 대한 기대가 더 크다는 것이다. 어쩌면 Vulcan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만큼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New Glenn의 재사용 기술이 충분히 검증되고 나면 자연스럽게 물량 확보를 위한 영업이 다음 핵심 목표가 된다. 현재 블루 오리진의 수주 잔고 대부분은 아마존의 프로젝트 카이퍼 위성 발사에 편중돼 있다. 아마존 의존도를 낮추기 위한 새로운 수익 모델은 필수적이다. 그리고 블루 오리진이 “우리는 이 임무를 ULA보다 훨씬 더 잘 수행할 수 있다”고 국방부를 설득할 때, 그 메시지를 가장 설득력 있게 전달할 수 있는 인물이 바로 브루노다. 와우, 상상만 해도 식은땀이 흐른다.
결국 이번 인사는 발사체 업계 전반의 변화를 보여주는 신호탄이다. 블루 오리진은 종종 ‘new old space’로 불려왔다. 스타트업 특유의 야심은 유지하되, 기존 제도권이 불편한 경계선을 함부로 넘지 않는 신중함이 결합된 회사라는 의미다. 토리 브루노의 영입은 바로 그 결합을 상징한다. 이것이 과거와의 진정한 단절인지, 아니면 익숙한 얼굴들의 재배치에 불과한지는 아직 단정할 수 없다. 분명한 건 미국 발사체 시장의 힘의 균형은 분명히 이동하고 있으며, 브루노의 선택은 한때 절대 강자였던 ULA가 서서히 기울어가는 과정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이정표가 되고 있다는 점이다.
한 가지 궁금증이 남는다. 브루노의 ULA 고용 계약에는 제대로 된 경쟁 금지 조항이 없었던 걸까? 업계에서 사실상 2위를 다투는 가장 위협적인 경쟁사로 아무런 유예 기간 없이 이동하는 건 이 업계가 아무리 역동적이고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곳이라 해도 이례적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