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권의 저주

장완과 조상

by 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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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권의 저주>



흥세전투는 244년에 위나라와 촉나라 사이에서 벌어진 전투다. 삼국지 후반부에 일어난 전투라 적벽대전이나 이릉대전에 비해 인지도는 낮지만 규모는 뒤지지 않는다.



전쟁의 포문을 연 쪽은 위나라의 조상이다. 조상은 혈연 덕분에 과분한 자리에 올랐지만 낙하산 인사였기 때문에 권위가 바닥이었다. 조상은 갑자기 생긴 절대권력이 한순간에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떨쳐내지 못했다. 산전수전을 다 겪어 군부에 막강한 영향력을 유지하던 사마의의 존재는 조상과 그 일파를 더욱 불안하게 했다.



결국 조상은 입지를 굳히기 위해 대규모 원정을 감행한다.



조상이 직접 본대를 이끌고, 곽회와 하후패가 각각 보조부대를 맡아 한중을 세 방향에서 압박하는 작전이었다. 동원된 병력은 10만 명. 반면 막는 입장인 촉나라는 당장 투입할 수 있는 병력이 3만 명에 불과했다. 사령관 왕평은 총지휘관 경험이 부족했고, 제갈량이 죽은 뒤로는 조직을 한 손에 틀어쥔 강력한 리더도 없었다. 누가 봐도 촉나라의 패배를 점치는 게 자연스러웠다.



그러나 전투는 예상과 완전히 다르게 진행됐다.



흥세는 촉으로 들어가는 최단 경로였지만 길이 험하고 지형은 좁았으며 물을 구하기도 어려워 대군을 운용하기엔 최악의 조건이었다. 촉나라가 예상외로 완강하게 저항하자 조상이 이끄는 주력 부대는 흥세에 발이 묶여 그물 안의 고기 신세가 됐다.



플랜 B를 고려하지 않았던 조상은 정면 돌파에만 집착했고 그럴수록 피해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전투가 길어지자 계산에 없던 촉나라의 후방 예비병력이 합류해 조상이 자신하던 병력 우위는 무색해졌다. 이 와중에 곽회는 위기에 빠진 본대를 외면하고 독단적으로 후퇴해버렸다.



흥세전투의 실패는 100% 조상의 조급함과 확증편향에서 비롯됐다.



그는 ‘빠르게, 크게, 화려하게’ 이기는 데 집착한 나머지 처음부터 끝까지 오판을 거듭했다. 한중을 지키는 촉군이 3만 명에 불과하다는 정보만 믿고 후방 병력의 존재를 고려하지 않았으며, 속전속결에 집착하느라 가장 짧은 경로인 흥세를 공격 루트로 정했다. 촉나라를 상대로 싸워 본 경험이 많은 곽회, 보급을 맡은 강족 세력과 사전에 작전을 조율하는 노력도 하지 않았다. 곳곳에서 위험 신호가 감지됐지만 끝까지 외면했고 그 결과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결과는 참혹했다.



위나라 군은 퇴로 곳곳에서 매복을 당해 대부분의 병력을 잃었다. 그 충격이 얼마나 컸는지 이후 위나라는 사마소가 결단을 내릴 때까지 거의 20년 동안 촉나라를 선제 공격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전쟁의 승부는 두 나라의 리더십 차이에서 갈렸다. 공적에 눈이 멀어 승리의 본질을 보지 못한 조상과 달리 이에 맞선 촉나라의 대응은 훌륭했다.


제갈량 사후 촉나라의 최고 지도자는 장완이었다. 제갈량의 뒤를 이은 탓에 “전임자만 못하다”며 폄하하는 정적들이 많았지만 장완은 자신의 부족함을 솔직히 인정하고 주변 인사들을 포섭하는 데 힘썼다. 한 관원이 “장완은 일하는 방식이 어리석어 옛날에 비해 너무 불편하다”고 공개적으로 비방했을 때조차 틀린 말이 아니라며 추궁하지 않았다.



장완은 권력을 장악하거나 과시하는 데 관심이 없었고 오직 결과에만 집중했다. 그는 왕평과 비의에게 지휘권을 맡기고 자신은 후방 지원에 전념했다. 전쟁에서 승리한 뒤 비의가 익주자사로 승진한 것도 (장완과 동급의 자리다) 배후에서 장완이 적극적으로 밀어준 덕분이었다.



장완은 물러서고 나누어 주는 리더십으로 나라를 살렸을 뿐 아니라 결과적으로 자신의 권력도 지켜냈다. 제갈량의 죽음으로 극도로 불안해진 정국을 물려받았음에도 장완은 10년 넘게 재상직을 유지했고 당장 폭발할 것 같던 내부 갈등도 곧 잠잠해졌다.



반면 조상은 제사보다 잿밥에만 관심이 있었다.



당시 위나라의 진영에는 조상의 측근(등양, 이승), 왕실 세력(하후현, 하후패), 친사마의 계열(곽회, 사마소)이 뒤섞여 있었는데, 조상은 이들을 하나의 팀으로 묶을 생각도 그럴 능력도 없었다. 그저 자신이 위나라의 거물급 인재들을 휘하에 거느리고 있다는 사실을 과시하고 싶었을 뿐이다. 실전 경험이 없는 주제에 지휘권에 집착했던 것도, 당대 최고의 명사였지만 군사적 재능은 빵점에 가까웠던 하후현에게 대장을 맡긴 것도 모두 콤플렉스로 인한 과시욕이 원인이었을 것이다.



상황이 악화되자 주변에서 철수를 권했지만 조상에게는 전쟁의 결과보다 자신의 위신이 더 중요했다. 조상이 조금만 일찍 스스로의 아집을 버렸다면 피해의 규모가 크게 줄었을 것이다.



패배 이후에도 그는 진지한 반성이 아닌 책임전가와 자기합리화에 매달렸고 결국 민심을 완전히 잃게 된다. 5년 뒤, 조상과 그 일파는 사마의가 일으킨 친위 쿠데타 앞에서 제대로 저항조차 하지 못한 채 몰락하고 말았다.


대박의 달콤함을 맛본 사람들은 그 유혹에서 쉽게 헤어나질 못한다. 손쉬운 승리를 좇으면 절차는 무너지고 이성은 마비되어 결국 몰락하게 된다. 쉽게 얻은 건 쉽게 사라지는 법이다. 만일 제비가 호박씨를 물어왔다면 경계하는 게 좋다. 어쩌면 그 안에는 금은보화가 아니라 도깨비가 들어있을지 모른다.



제갈량이 동조연(재상을 도와 인사권을 담당하는 요직이다, 요즘으로 치면 민정수석)으로 초빙하자 장완은 자기 재주가 부족하다며 다른 사람들을 추천했다. 이처럼 능력에 더해 겸손함을 겸비한 그를 제갈량은 일찌감치 후계자로 점 찍었다고 한다. 이를 장완도 모르지 않았을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격이 거친 위연, 양의와 원만하게 잘 지냈다. 이 둘이 각각 자기가 후계자가 될 거라고 착각했던 걸 보면 장완은 제갈량의 총애에도 불구하고 흐트러지지 않았던 것 같다. 장완이 후계자가 된 것에 불만을 품은 양의가 처형당할 위기에 놓였을 때 ‘그래도 공신이니 목숨은 살려주자’고 구제한 것도 장완이었다.



장완은 제갈량이 죽고 1인자가 된 뒤에도 권력을 독식하지 않고 익주파인 비의와 동윤, 위나라에서 투항해 온 왕평과 강유에게 역할을 나누여주었다. 또한 우리는 선대(제갈량)만 못하다며 무리한 개혁이나 전쟁을 하지 않고 내실을 키우는 데 집중했다.



쉬운 성공은 자만과 초조함을 불러오는 반면 연마의 시간을 거친 사람은 깊이가 있고 단단하다.



과거 장완은 유비에게 밉보여 처형당할 뻔한 적이 있었다. 친척인 반준이 적국에 항복해 위기에 몰리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산전수전 다 겪으며 장완의 내공은 갈수록 더 깊이가 더해졌다. 그는 10년 넘게 음지에서 제갈량을 보조하면서 실력을 가다듬었다. 드디어 무대에 올랐을 때, 장완은 스스로에게 확신이 있었고 굳이 무리해서 대박을 노리거나 동료들을 깎아내릴 필요가 없었다.



반면 조상은 어렸을 때부터 황궁에 출입해 황제와 친했다는 게 전부다. 아버지인 조진이 물려준 후작 지위를 가진 게 전부였고 스스로 이룬 게 하나도 없다. 능력도 명분도 없는 조상은 떠밀리듯 무대에 오르자 고소공포증에 발작하다가 발을 헛디뎌 추락사했다.



노력해 얻지 않은 성공은 축복이 아니라 재앙이다. 당신 주변에 조상이 있다면 주의하라, 자칫하면 그가 패가망신할 때 휩쓸릴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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