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정당의 호세 안토니오 카스트(José Antonio Kast)가 칠레 공산당의 제아네트 하라(Jeannette Jara)를 상대로 압승(58% vs 41%)을 거두었다. 현 정권의 저조한 경제 실적과 개선될 여지가 보이지 않는 치안 문제가 원인으로 꼽힌다. 다행히 하라 후보는 순순히 패배를 인정하고 국정 협력을 약속했다.
칠레는 군사정권이 물러난 1990년 이후 남미에서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체제를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 2010년 남미 최초로 OECD에 가입하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 들어 구체제의 한계를 드러내며 내부 갈등이 심화되고 있는 중이다. 경제성장의 혜택이 제대로 분배되지 못해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다. 보수 진영은 진보 대통령들의 세금 인상과 노동 규제 강화가 성장 잠재력을 깎아 먹었다고 주장한다. 반면 진보 진영은 천연자원에 의존하는 경제 구조가 한계에 이르렀으며, 정부의 적극적인 개입을 통한 중산층 육성이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참고로 칠레는 세계 최대의 구리 수출국이다. 칠레의 경제는 구리를 빼고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이러한 긴장은 결국 2019년 대규모 시위로 폭발하였다. 처음에는 지하철 요금을 둘러싼 작은 시위로 시작되었지만, 얼마 안 가 성장과 분배를 둘러싼 거대한 싸움으로 확대되었다. 6개월이나 지속된 이 시위는 당시 집권 세력이었던 보수당에 치명적 타격을 주었고, 결국 개헌 논의로 이어졌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 입법부와 행정부가 모두 진보 진영에 넘어갔다.
새 대통령으로 등장한 건 시위에서 활약한 학생 운동가 가브리엘 보리치(Gabriel Boric). 1986년생인 그는 열렬한 페미니스트이자 환경주의자였고, 신자유주의를 적극적으로 반대한 인물이기도 했다.
하지만 압승은 경솔로, 경솔은 자책골로 이어지는 게 이 바닥의 생리다. 진보 진영이 주도한 헌법 개정은 보수파는 물론 중도 진영도 거부감을 느낄 만큼 극단적이었다. 과도한 환경 규제, 원주민 공동체를 위한 별도의 사법 제도와 의석 할당, 낙태 합법화 등 논란이 되는 조항들을 밀어붙이는 과정에서 진보 세력은 정책 동력을 상당 부분 상실했다. 헌법 개정안은 국민투표에서 과반 지지를 얻지 못했고, 젊은 대통령은 임기 내내 20%대의 낮은 지지율에 그쳤다.
새롭게 대통령이 된 호세 안토니오 카스트는 현 대통령과 모든 면에서 반대 지점에 서 있는 인물이다. 1966년생이며 반평생을 정치인으로 보냈다. 보수적인 가톨릭 신자를 자처하며 낙태와 동성애를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인물이다. 2019년 시위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하지만 그의 당선을 가능케 한 힘은 이러한 사회적 이슈들이 아니라 먹고사는 문제, 즉 경제와 치안이었다. 이번 선거 과정에서 카스트는 이념 문제보단 범죄와의 전쟁, 불법 이민 통제, 감세 등 실용적 제안에 힘을 쏟았다.
최근 몇 년 동안 칠레는 좌파와 우파 정부가 번갈아 등장하며 정치적 진동이 계속되고 있다. 남미의 양강이라고 할 수 있는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이 각각 우파와 좌파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만큼 앞으로 칠레가 어느 쪽으로 기울게 될지는 남미의 정치적 균형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최근 트럼프 대통령이 남미 국가들의 대표를 초대한 뒤 ‘쉴드 오브 더 아메리카스’ 창설을 선언했다. 좌파 정권이 들어서 있는 브라질, 콜롬비아가 불참해 주로 미국에 우호적인 국가들이 주를 이뤘는데, 아르헨티나 정도를 제외하면 구성이 부실하다. 트럼프 입장에서는 우파로 돌아선 칠레가 여러모로 듬직할 것이다.
칠레가 자원 대국이라는 것도 변수다. 칠레는 세계 최대의 구리 생산국이며 전기차 배터리에 필수인 리튬의 주요 공급국이다. 중국은 칠레의 최대 교역국이며 칠레 광산에 대규모 투자를 하고 있다. 신임 대통령이 앞으로 미·중 경쟁 구도를 어떻게 해석하고 칠레의 역할을 어떻게 정의할지에 따라 두 나라의 자원 경쟁도 상당한 영향을 받을 것이다.
신임 대통령 임기가 공식 시작되는 건 3월 11일, 앞으로 2일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