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욱, 대기만성

by 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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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만성>


정욱은 조조를 섬긴 참모로 많은 공을 세웠다. 하지만 그가 역사에 등장하기 전의 삶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정욱은 141년생으로, 조조(155년생)보다 훨씬 윗세대였다. 위나라 1세대 참모를 대표하는 순욱(163년생), 순유(157년생), 곽가(170년생), 동소(156년생), 유엽(179년생)과 비교하면 거의 아버지 세대에 가깝다. 그나마 가후(147년생) 정도가 비슷한 세대였다.


정욱에게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정황상 그는 연주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지닌 집안 출신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연주를 거쳐 간 지배자들은 예외 없이 정욱과 가까워지려 했다. 반란을 일으키려던 백성들이 명성이 높은 정욱의 설득을 듣고 뜻을 접었다는 기록을 보면 세간의 평가 역시 좋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정욱은 서두르지 않고 때를 기다렸다. 연주자사 유대가 그를 초빙했지만 정욱은 이를 거절했다. 유대는 황족이었고 연주에 부임하기 전 재상직을 지낸 거물이었다. 이때 정욱은 이미 50대였다. 수명이 짧았던 당시 기준으로 보면 슬슬 은퇴를 생각해도 이상하지 않은 나이였다.


정욱은 193년 조조의 초빙을 받아들이면서 비로소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남들보다 출발은 늦었지만 이후 정욱의 활약은 대단했다. 조조가 서주를 공격하는 동안 정욱은 순욱과 함께 후방을 맡았다. 그 틈을 타 진궁이 여포를 끌어들여 반란을 일으켰다. 조조는 생애 여러 번 위기를 맞았지만, 막 기반을 세우기 시작한 시점에 본거지가 넘어간 이때만큼 위급했던 순간은 없었다.

그러나 정욱은 동요하는 관리와 백성들을 설득해 근거지를 지켜냈고, 그 덕분에 조조는 재기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훗날 조조는 이 일을 회상하며 “정욱이 없었다면 자신도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정욱이 출세욕이 없어서 시작이 늦었던 것은 아니다. 조조가 여포와의 싸움에서 고전하다 마음이 약해져 원소에게 굽히려 하자 정욱은 “당신은 원소를 아래에 둘 사람”이라며 강하게 만류했다. 또한 조조를 떠받들겠다는 뜻을 담아 원래 이름인 정립(程立)에 태양 일(日)을 더해 정욱(程昱)으로 개명하기도 했다.


정욱은 재주와 야심이 넘쳤지만 서두르지 않고 때를 기다렸다. 그가 무직으로 보낸 시간은 인맥을 쌓고 정세를 관찰하며 스스로를 숙성시키는 시간이었다.


50대에 출사한 그는 이미 충분한 경험을 갖추고 있었다. 20~30대에 등장한 동료들이 이상주의나 과격한 전략, 혹은 과시욕에 사로잡히는 동안 정욱은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조조의 핵심 참모로 남았다. 정권 설계에 깊이 관여했던 순욱과 순유, 모 아니면 도 식의 결단을 즐겼던 곽가와 비교하면 정욱은 현실적이고 안정적인 인물이었다. 조조에게 믿음이 가면서도 부담을 주지 않는 존재였던 셈이다.


그의 또래인 140년대생 인재들은 격동의 시대에 휩쓸려 대부분이 몰락했다. 집권 세력이었던 환관들은 당고의 화(1차 166년, 2차 169년)를 일으켜 지식인과 젊은 관료들을 대거 숙청했다. 이때 처형된 사람만 수백 명이었고, 연루되어 처벌받은 사람은 수천 명에 달했다. 출세의 꿈을 품고 조정에 뛰어든 젊은 인재들이 대거 휩쓸려 사라졌다. 정욱은 강직하고 고집이 센 인물로 유명했다. 만약 이 시기에 공직에 있었다면 십중팔구 환관들에게 제거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자신을 잘 알았던 정욱은 스스로 빛날 수 있는 때와 장소를 끈기 있게 기다렸다. 대기만성, 인생은 마라톤과 같다.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페이스가 있으며, 다른 주자에게 마음이 흔들려 속도를 잃으면 발이 꼬여 넘어지기 마련이다.


출사 이후에도 정욱은 조급해하지 않았다. 나이로 보면 아들뻘인 동료들이 자신보다 한두 걸음을 앞서가도 초조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중앙 정부의 요직에 집착하지 않았고, 조조가 명령하면 최전선에 나가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조조 말년에 잠시 은퇴했다가 조비가 뒤를 잇자 다시 복귀하기도 했다. 아마도 정권 교체기의 피바람을 피하기 위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조조가 죽은 뒤 위나라는 개국 공신들을 다섯 차례에 걸쳐 조조의 종묘에 배향했다. 그 가운데 가장 먼저, 즉 가장 높은 대우를 받은 세 사람이 하후돈, 조인, 그리고 정욱이었다. 하후돈과 조인이 조조의 종친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정욱이 사실상 최측근 공신으로 인정받은 셈이다. 순유는 세 번째, 곽가는 다섯 번째에야 이름을 올렸다. 말년이 불우했던 순욱은 끝내 배향되지 못했다.


누가 이겼는지는 마지막 순간이 되어야 비로소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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