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철나무 그늘
당신이 어떤 직업의 문턱에 들어섰다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직업은 당신을 자립하도록 만들어 주며, 어떤 의미에서는 당신으로 하여금 굳건하게 서도록 해줍니다. 직업때문에 당신의 내적인 생활이 제약을 받는다고 느낄 때까지는 우선 참고 기다리십시오. 저도 직업이란 매우 어렵고 까다로운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직업은 인습에 짓눌려 있기 때문에 개인적인 의견이 발붙일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고독은 그런 속에서도 당신이 의지하는 고향이 될 것이며, 그 고독으로 인해서 당신은 자신의 길을 발견할 것입니다. 저의 모든 소망을 즐거이 당신과 함께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으며 저의 모든 신뢰는 항상 당신과 함께 있습니다.
Rainer Maria Rilke,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정말 아끼는 사람들에게 선물하는 책,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물론 그 중 누군가는 펼쳐보지도 않고 먼지를 씌웠겠고 그 중 누군가는 나와에 버금가는 감동을 느꼈겠지만. 말로 잘 하지 못하는 마음의 애정표현을 종이 한뭉치로 대체하자면 이 책만큼 내 마음을 대신할 수 있는 말들은 없을 것이다. 현대의 자기계발서들처럼 세련된 화법은 아닐지 모르지만, 릴케는 오랜 세월을 같이 살아온 친구나 가족처럼, 때론 경험 많은 선배처럼 힘 있는 말들로 격려를 준다. 나에게는 가장 중요한 순간에, 가장 복잡하고 어려운 고민들에 대한 대답은 항상 릴케가 주었다.
고독이 자라나는 것은 소년이 성장하듯 고통스러우며 봄이 시작되듯 슬프기 때문입니다. (…) 꿀벌들이 꿀을 모으듯 우리들은 모든 것으로부터 가장 달콤한 것만을 모아서 신을 만듭니다. 보잘것 없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 것이라도, 그것이 사랑에서 나오기만 한다면 우리들은 그것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고된 작업과 그 후에 오는 휴식, 침묵이나 고독한 기쁨, 협력자나 추종자도 없이 우리들은 우리가 경험하지도 못할 신을 만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조금은 낯 간지러운 소소한 기억들이 고된 하루의 끝을 미소짓게 한다. 고독의 싹이 솟아나고, 그 싹이 자라나 꽃을 피우고 지는 과정의 시간동안 릴케의 말들은 나의 밤과 새벽을 함께 했다. 그 잔잔한 목소리 덕분에 슬픔도 고독도 견딜만했다. 지칠때면 세월과 공간을 초월한 나직한 울림 속에 잠시 쉬어 갈 수 있었다. 조용한 밤에 연필을 사각이거나 자판을 두드리는 일로 잠시나마 머리와 가슴의 짐들을 덜어냈고, 릴케 덕에 한결 편해진 속으로 내일을 향해 발을 내딛을 용기를 얻었다.
슬픔이란 무엇인가 새로운 것, 알려지지 않은 것이 들어오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그 순간 우리들의 감정은 깜짝 놀라 입을 다물고, 우리 내부에 있는 모든 것은 뒤로 몰러나서 거기에 고요가 생겨나며, 아무도 모르는 새로운 것이 그 가운데서 침묵을 지키고 있습니다.
내일이면 세상의 일터로 나가 한 평 책상에 앉아 경쟁과 생존의 일상을 반복할테지만, 보고 겪고 사랑하고 잃게 될 수많은 일과 사람들을 떠올리며 복잡해지는 머릿속을 릴케 덕에 늘 수월하게 비워내며 살아간다. 그로 인해 파생되는 생각과 감정들을 모두 털어내 말로 토해내고 잠든 아침엔, 웃는 얼굴로 일어날 수 있기 때문에.
그랬으면 좋겠다 살다가 지친 사람들
가끔씩 사철나무 그늘 아래 쉴 때는
계절이 달아나지 않고 시간이 흐르지 않아
오랫동안 늙지 않고 배고픔과 실직 잠시라도 잊거나
그늘 아래 휴식한 만큼 아픈 일생 아물어진다면
좋겠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굵직굵직한 나무 등걸 아래 앉아 억만 시름 접어 날리고
결국 끊지 못했던 흡연의 사슬 끝내 떨칠 수 있을 때
그늘 아래 앉은 그것이 그대로 하나의 뿌리가 되어
나는 지층 가장 깊은 곳에 내려앉은 물맛을 보고
수액이 체관 타고 흐르는 그대로 한 됫박 녹말이 되어
나뭇가지 흔드는 어깻짓으로 지친 새들의 날개와
부르튼 구름의 발바닥 쉬게 할 수 있다면
좋겠다 사철나무 그늘 아래 또 내가 앉아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내가 나밖에 될 수 없을 때
이제는 홀로 있음이 만물 자유케 하며
스물두 살 앞에 쌓인 술병 먼 길 돌아서 가고
공장들과 공장들 숱한 대장간과 국경의 거미줄로부터
그대 걸어 나와 서로의 팔목 야윈 슬픔 잡아준다면
좋을 것이다 그제서야 조금씩 시간의 얼레도 풀어져
초록의 대지는 저녁 타는 그림으로 어둑하고
형제들은 출근에 가위 눌리지 않는 단잠의 베개 벨 것인데
한켠에서 되게 낮잠 자버린 사람들이 나지막이 노래 불러
유행 지난 시편의 몇 구절을 기억하겠지
바빌론 강가에 앉아
사철나무 그늘을 생각하며 우리는
눈물을 흘렸지요
장정일, <사철나무 그늘 아래 쉴 때는>
나의 사철나무 그늘, 릴케의 편지는 언제 어디서나 나만의 안식처가 되어준다. 릴케 덕에 눈물을 닦고 잠시 쉬어가는 여유를 배웠고, 빨리 간다고 우쭐할 일도, 천천히 간다고 의기소침할 일도 한 번쯤 되돌아보며 주저할 줄 아는 지혜를 얻었다. 한 낮의 땡볕 무더위 속에서도 나만의 그늘을 가질 수 있다는 믿음으로 세상을 헤쳐나갈 수 있다는 것은 릴케가 나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이다. 이 편지들을 쓰면서 그도 알았을까, 그의 편지가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에 의해 읽혀질 줄.
창조하는 자에게는 가난이 없으며, 그냥 지나쳐 버려도 좋을 하찮은 장소란 없습니다. 세상의 소리가 모두 차단된 곳에서도, 유년 시절의 아름다운 기억으로만 시간을 보낼 수 있습니다.
I would like to beg you, dear sir, as well as I can, to have patience with everything unresolved in your heart and to try to love the questions themselves as if they were locked rooms or books written in a very foreign language. Don’t search for the answers, which could not be given to you now, because you would not be able to live them. And the point is to live everything. Live the questions now. Perhaps then, someday far in the future, you will gradually, without even noticing it, live your way into the answer.
나는 오늘도 릴케에게 빚진 셀 수 없는 밤들을 거름삼아 살아간다. 비록 아직 답을 찾지 못한 수많은 질문들과 헤쳐나가야 할 고난, 짊어져야 할 짐들이 많이 남았지만, '질문을 사랑하라'는 그의 충고가 버거운 중압감 속에서 균형을 잃지 않고 중심을 잡을 수 있게 도와준다. 답을 좇아 살기 보다는 질문 그 자체를 살아보라, 그래서 서서히 삶 속에서 답을 발견하도록 하라는 것. 그렇게 답을 '살으라는' 말. 아, 책이 없었으면 이런 혜안은 평생 몰랐겠지.
고마워요 릴케, 내 불안과 동요를 맡아줘서. 내 성장은 모두 당신 덕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