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ge of Innocence
Innocence tinctures all things with brightest hues.
-Edward Counsel
자동차를 타고 고속도로를 지날 때면, 길이 막히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길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왜 막히는 것 인지 궁금했다. 비가 오면 오늘은 비가 그치는 지점이 어디이고, 나는 과연 살면서 그 지점에 서볼 날이 있을까 궁금해했고, 밤길에 쫓아오는 달로부터 어리석게 몸을 숨겨보기도, 쫓아 달려보기도 했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모든 것을 의심 없이 믿었고, 거짓말은 하얀 거짓말과 검은 거짓말 두 종류 뿐인 줄 알았다. 악보단 항상 선이었고, 어머니께서 옷이나 신발이 곧 줄어들 테니 한 사이즈 큰 것을 고르라고 하실 때 시간이 지나면서 옷과 신발이 작아지는 줄 알았다. 처음으로 볼일 보러 가신다는 어머니를 따라갔을 때 어머니는 은행엘 가셨고, 그래서 난 볼일을 본다는 건 무조건 은행에 가는 일인 줄로만 알았다. 숨막힐듯 아름다운 작품사진들을 보고는 그만큼 아름다운 현실이 아직 가보지 못한 어딘가에는 존재한다고 믿었었고, 아프리카엔 빌딩이 없는 줄 알았다. 사랑하면 절대적으로 아름다울 줄 알았고, 결혼은 살면서 누구나 당연히 거쳐야 하는 절차라고 생각했다. 스위스의 공기가 맑은 줄도 모르고 스위스를 사랑했고, 생일 파티를 할 때면 파티가 끝날 두려움을 생각할 여유도 없이 즐거웠다. 크리스마스 이브면, 산타클로스를 만나볼 생각에 잠자는 척 하다 잠이 들곤 했고, 궁금증 투성이인 세상은 마냥 밝고 희망찼다. 대통령이 세상에서 제일 부자인 줄 알았다. 이따금씩 답을 아직 모르는 수많은 질문들에 허우적대며 고뇌했지만, 또 한편으론 굳이 내가 그 질문들에 대한 답을 몰라도 어차피 정답은 하나이고, 내가 모른다고 해도 어딘가엔 답이 존재할 거라는 것을 믿었기에 위안이 되었다.
그땐 몰랐다. 그땐 깨끗했다.
이제는, 자동차가 막히는 시점과 안 막히는 시점이 뚜렷하게 나눠져 있지 않고, 중간에 서서히 막혀가는 시점과 서서히 풀려가는 시점이 있다는 것을 안다. 이제는, 비가 한 발자국 뒤에선 내리고, 한 발자국 앞에선 안 내리는 것이 아니고, 비를 흘리는 구름이 서서히 멀어지는 것이라는 것도 안다. 이제는, 달이 나를 쫓아 오는 것이 아니고, 내가 사는 지구가 달의 범위 안에서 맴돌고 있다는 것도 안다. 이제는, 텔레비전에서 하는 말은 애초부터 믿지 않고, 거짓말엔 하얀색과 검은색 말고도 너무나도 많은 색깔이 존재한다는 것도 안다. 이제는, 악이 없다면 딱히 선이라고 할 선이 없다는 것도 알고, 거짓이 없다면 굳이 진실이라 할 진실이 없다는 것도 안다. 이제는, 시간이 지나면서 옷이나 신발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고, 나의 몸이 커졌던 것이라는 것도 안다. 이제는, 볼일이 있으시다며 은행에 가신 어머니가 그 날만 은행에 가셨단 것도 안다. 이제는, 보통 현실의 색깔이 사진의 색깔만큼 아름답지 않다는 것도 알고, 아프리카에도 빌딩들이 우뚝 솟아 있단 것도 안다. 사랑의 이면에 때론 그 아름다움 만큼 끔찍한 고통이 있단 것도 알고, 결혼은 꼭 거쳐야 할 절차가 아니라는 것도 안다. 스위스의 공기는 그 어느 곳 보다 맑고 상쾌하단 것도 알고, 스위스엔 공기말고도 사랑할 많은 것들이 있을거라는 것도 짐작한다. 이제는 생일파티를 할 때면, 파티가 끝날 무렵 밀려올 허무함이나 아쉬움 따위가 당시의 즐거움을 덮을 때가 많다. 이제는, 크리스마스 이브에도 잘만 잠들고, 세상이 절대 마냥 밝고 희망차지만은 않다. 이제는, 대통령보다 더 부자가 많다는 것도 안다. 아직도 답을 알기보다는 모르는 질문들이 더욱 많지만, 이제는 사실상 답이 어딘가에 존재한대도, 내가 그 정답을 들고 있지 않다면 그 어딘가에도 답이 존재하지 않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는 것도 안다.
이젠 안다. 이젠 더럽다.
It is a blessing not yet to have acquired that over-keen, diagnostic, misanthropic eye, and to be able to look at people and things trustfully when one first sees them.
-Stefan Zweig, <Beware of Pity>
가끔은 어느 선에서부터 갑자기 차가 막혔으면 좋겠고, 나의 오른쪽으로 비가 내리고, 왼쪽으론 비가 안 내렸으면 좋겠다. 하루쯤은 밤길에 어깨 너머로 달이 쫓아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으면 좋겠고, 시간이 지날수록 정말로 거짓말처럼 옷이 줄어들었으면 좋겠다. 가끔은, 텔레비전에서 들리는 말들의 대부분을 믿고만 싶고, 거짓말엔 하얀색과 검은색 두 가지만 있었으면 좋겠다. 가끔은, 볼일 있으시다며 나가시는 어머니가 정말 늘 은행에 가셨으면 좋겠다. 가끔은, 생일 파티 내내 마냥 즐거울 수만 있었으면 좋겠고, 크리스마스 이브날 산타를 훔쳐볼 생각에 잠을 설쳤으면 좋겠다. 가끔은, 가보지 못한 세상 어딘가가 사진만큼 아름다운 색깔을 품고 있다고 믿고 싶고, 아프리카엔 빌딩 같은 건 없었으면 좋겠다. 가끔은 답을 몰라도 왠지 모를 안도감이 들었으면 좋겠고, 정말 대통령이 세계에서 제일 부자였으면 좋겠다. 가끔은 아침에 일어나서 밤에 있을 술 약속 대신 친구들과 아파트 단지에서 롤러브레이드 탈 생각이 났으면 좋겠다.
가끔은, 아직도 순수하고 투명한, 아무것도 모르는 백지이고 싶다.
O Innocence, with laughing eyes!
Thou art a cherub from the skies,
A wanderer from heaven.
-Harvey Ri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