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조각들

by 우너


보잘것 없는 짓을 함으로써 나는 더욱 고독하게 되었고

나와 나의 유년시절 사이엔 냉혹한 시선으로 망을 보는 문지기가 버티어 선
굳게 닫힌 낙원의 문이 생겨났던 것이었다.

이것이야말로 내 자신에의 향수의 처음이었으며 그 사실의 깨달음이었다.

-Hermann Hesse, <Demian>



가끔씩 그럴 때가 있다. 오지 않는 잠기운에 창문을 열어놓고 넘실대는 밤공기를 한 움큼 들이마시다가 책장과 서랍 속의 모든 것들을 꺼내어 하나하나 정리하게 되는 그런 시간.

평소에는 애써 지나치며 스리슬쩍 서랍 속 깊은 곳에 숨겨두었던 순간들, 그리고 부록처럼 그 사이 사이에 부대껴 있는 케케 묵은 감정들. 안녕? 오랜만이야. 여기 있었구나. 흐릿해지는 기억만큼 감정도 딱 그만큼만 희석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순간.


무너지기 싫어서, 약해지기 싫어서, 흔들리기 싫어서, 그것도 아니면 시간이 없어서 한 구석에 켜켜이 쌓아두었던 마음의 조각들. 바라보고 있기 무안하게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마주 들여다 볼 용기가 없어 잊은 척 방치해 두었던 기억들. 미처 깔끔하게 재단하지 못한 삐죽빼죽한 감정의 자투리들.


새 마음이 들어설 준비를 위해, 새로운 무언가를 맞이할 준비를 하기 위해, 이렇게 가끔씩 마음에 입주청소를 치르며 스스로에게 지금과 다른 내가 되기를 독촉해본다.


결국 인간이란 어쩔 수 없이 지독한 외로움의 바다에 둥둥 떠다닐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발생하는 미세한 흠집들, 그로 인해 파생된 마음의 오작동, 무력함, 불안과 불신, 내가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었던 거리에 있었던 그것들, 기억이 미치는 그 곳에 자리를 펴고 앉은 미련과 후회... 지나간 날들에 무덤덤해지려 애쓰다 얻은 이성과 냉철함에 때때로 구원받으며 마음의 평정을 갈구했었다. 그리고는 이제 와서야. 나를 둘러싼 이 모든 것들이 한바탕 힘겹게 지나가고 나서야, 용기를 내어 이렇게 느껴보는 것이다.




하얗게 불태운 밤,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새단장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