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 사랑 소망
세상에는 좋아하는 것들을 오래 품는 사람들이 있다. 한 번 마음을 주면 쉽게 식지 않고, 한 장소에 수 십번 가도 여전히 감동하며, 한 노래를 수백 번 들어도 가슴이 두근거리고, 한 가지 일을 매일 하면서도 늘 설레는 사람들.
어떤 이들은 그런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지만, 진심으로 좋아하는 것이 생긴다는 건 그들에겐 단순한 즐거움이 아니다. 좋아하는 사람들을 곁에 두고, 좋아하는 일을 하고, 좋아하는 음악을 듣고, 좋아하는 음식을 먹으며 사는 하루하루가 모여 만드는 삶이 얼마나 알차고 신나는지 몰라서 하는 말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늘려나가는 삶. 나의 취향을 갱신해 나가는 기쁨이 얼마나 다채로운지. 그럴 때 그들은 살아있음을 느낀다.
그들은 아마도 마음속 상처가 조금 많은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마음을 다칠 때의 씁쓸함과 아픔을 알기에 그럴 때는 조용한 방 한 구석에서 시간의 무게를 묵묵히 견디면서도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는 일에는 유독 조심스럽다. 섣부른 한 마디 말이나 행동이 혹여 누군가의 마음을 무겁게 할까 고민을 거듭하고 기억을 되짚는다.
다정한 사람은 내가 흘려 말한 이야기를 잊지않고 있다가 필요할 때 그 사람을 살필 수 있도록 하는, 그럼으로써 누군가의 하루를 따뜻하게 데울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런 태도 하나로 주변을 따뜻하게 하는 사람은 다정이 몸에 배인 사람이다. 단순히 착하다거나 만만한 것과는 전혀 다르다.
누군가가 나를 좋아한다면 나를 훌륭하거나 완벽하게 보지 않아도 괜찮다. 하지만 적어도 나를 쉽게 판단해버리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내가 왜 그런 말을, 행동을 했는지, 왜 그런 결정을 했는지, 왜 그 날은 말수가 적었는지, 표정이 달랐는지 알아채지 못하더라도 조금만 더 궁금해해주는 사람이었으면 한다. 매일 상대의 하루를 살뜰히 살피지는 못하더라도 함부로 다루지는 않는 사람. 그 사람의 속도와 상황을 먼저 들여다보려는 사람.
다정함이란 결국 마음을 쓰는 방식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크게 표현하지 않아도, 눈에 띄지 않아도, 한 사람을 배려하는 쪽을 선택하는 일. 돌고 돌아 처음과 같은 선택을 결국에 하게 된대도, 그렇게 심사숙고하는 태도로 최선을 다하는 일. 나 역시 그런 마음을 건네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살아오면서 꽤 많은 사람을 만났다.
천천히 알아가고 대화를 나누고 시간을 켜켜히 쌓아가며 추억을 덧입히고 서로 함께 하는 즐거운 경험들이 늘어갔을 때 서서히 마음이 기울었다. 내 세상에 조금씩 발들이는 것을 허락하고, 그렇게 조금의 시간에서 시작한 공통의 영역이 사적인 영역으로까지 확장되는 방식. 그렇게 조심스럽게 허락한 내 마음은 늘 오랫동안 한결같았고, 이런 방식으로 오랜 인연들을 소중히 간직해왔으므로 나는 이렇게 해야 믿을 만한 사람들과 오랫동안 향기로운 인연을 이어갈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이 믿음은 젊은시절 꽤 오랫동안 나를 지켜주었다.
첫 만남의 설렘, 느낌의 강렬함같은 것보다 두 번째, 세 번째 만남에서 드러나는 태도에 더 무게를 두었고, 말의 결, 약속을 대하는 자세, 사람들 사이에서의 행동과 표정 같은 것들을 특별한 판단없이 조용히 마음 속에 남겨두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이 모든 기준을 처음부터 비켜가는 사람이었다. 설명할 수 없는 이유로 시선이 계속 향했고, 좋아하지 않는 낯선 존재였음에도 금새 편안해졌다. 함께 있는 동안 괜히 웃고 있다는 걸 나중에서야 알아차렸다. 이상하다고 느낀 건 그 다음이었다. 마음이 이미 머리보다 앞서 있는 것 같은 느낌. 새로운 인연에 발들이기 조심스럽던 내가 괜히 더 잘해주고 싶어졌고, 아무 이유없이 더 챙기고 싶어졌다. 누군가에 대한 순수한 호감이 이렇게 두서없이 자리잡을 수 있다는 게 스스로도 믿기지 않았다. 특별한 제스처없이, 아무런 극적인 장면 없이 서서히 원래 그랬던 사람처럼 내 삶 속에 조용히 자리잡았다. 화려한 고백이나 대단한 노력, 특별한 표현도 없었지만 그럼에도 오래 고민해온 관계나 쌓아온 인연보다 훨씬 빠르게, 훨씬 깊숙하게 새로운 방식으로 내 마음의 문을 열었다.
이 경험 이후로 나는 사랑을 정의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어떤 사람 앞에서는 아무 준비 없이도, 세월의 도움 없이도 모습을 드러내는 마음이 있다는 것. 그게 사랑 비슷한 마음이 되기도 한다는 걸. 아마도 그런 순간은 살면서 자주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나만의 기준이나 철칙이 한순간에 무의미해질만큼 강력하고 특별한 예외를 만난다는 건. 대낮에 꾸는 정말 멋진 꿈같은 일일까.
사랑을 알아차리는 순간.
평범한 날씨, 흔한 풍경조차 그 사람 옆에서는 조금 더 따뜻하게 다가올 때. 건조한 일상 속 사소한 일들을 귀 기울여 들어주고 괜히 묻지 않아도 챙겨주는 마음이 느껴질 때. 바쁜 하루에도 나를 떠올리고 잠깐 행복해하는 모습이 보일 때. 나의 아픔을 대단한 일이 아니라고 치부하지 않고 다가와 천천히 살펴줄 때. 내가 사소하게 흘린 말을 오래 기억하고 있다고 어느 날 불쑥 꺼낼 때. 내일의 모습을 그릴때 자연스럽게 한 그림에서 웃고 있는 우리가 보일 때. 불확실한 미래에 대해 생각할 때 이제는 불안보다 기대가 미묘하게 더 커지는 걸 느낄 때. 수많은 선택지 사이에서 서로를 매번 다시 제일 먼저 선택하는 순간이 당연해질 때. 사랑은 조금씩 소복히 쌓여간다.
연인이 되면서부터 좋아하는 마음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순간들이 늘어났다. 마냥 웃고 싶지 않은 날이 있었고 괜히 우울한 시간도 있었다.그때마다 상대를 향한 마음이 변한 건 아니었는데 그걸 말로 풀어내기엔 마음의 그릇도 내 몸안의 에너지도 부족했다.
그 때 배웠다. 사랑은 언제나 같은 얼굴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걸. 오늘의 나는 어제보다 조금 무겁고, 내일의 너는 오늘보다 조용할 수도 있다는 걸. 관계는 그 차이를 없애는 쪽으로 자라지 않았다. 서로의 상태를 있는 그대로 두는 방향으로 이어졌다. 괜히 이유를 캐묻지 않고 지금은 어떤 기분인지 먼저 헤아리는 쪽으로.
좋아한다는 말보다 지금은 무엇이 불편한지 묻는게 더 중요해질 때가 있다. 중요한 것은 괜찮다는 대답이 나오지 않아도 그 자리를 도망치지 않는 것이었다. 혼자는 잘 지냈지만 함께 하기위해 두려워져도, 설령 불안을 나누다가 둘 다 겁쟁이가 되어버린다고 해도 용기를 내어 상대의 감정을 이해하고자 하는 담대한 태도였다.
노력을 입힌 시간이 쌓이면서 깨달음이 찾아왔다. 순간의 기분이나 하루 이틀간의 감정은 쉽게 바뀌지만 그 시간들을 지나며 결심하고 행동했던 태도는 반복되며 몸과 마음에 남는다는 걸 알게 됐다. 우리가 슬픔에, 어려움에 직면했던 용기는 살면서 모든 것이 변한다고 해도 기억에 남아 우리의 양분이 되어줄 것이었다. 그 반복된 노력이 꾸준함과 의연함으로 남아 우리의 관계를 설명하고, 믿음을 증명할 것이다. 결국 연인이 된다는 건 설레는 마음을 지키는 일이 아니라 서로를 대하는 방식을 계속 상대방에게 더 행복한 방식으로 새로고침하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