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해, 그 날

단상 I, II

by 우너

단상 I : 그 해


많은 일이 있었지만, 달라진 것은 하나 뿐이다.

겨울이 다시 찾아와서야 비로소 소중했던 지난 겨울의 달콤한 안락함을 깨닫는다. 모두 어딘가에 불안함을 간직하고 두려워하고 있었음이 분명했지만, 전부 모여서 따뜻하게 술 한잔하고 나면 모든 미래의 대한 걱정들이 현재의 따스한 행복 앞에 너무나 쉽게 중화되었다. 만약 그것을 그때 알았더라면 나머지 계절들을 견디기 조금 더 쉬웠을 것이다. 그것이 모든 것의 마지막이었다는 것을.


난 그 시기에 새로운 것들을 접하고 또 그것들과 친숙해지고 있었다. 처음으로 다가온 것은 정체성없는 감정이었다. 누군가를 다시 믿고 의지하고 바라보게 되고, 때문에 나란 사람과 정체성조차 삽시간에 흐트러졌다. 그리고 찾아온 것은 열등감과 그로 인한 야망이었다. 아무런 욕심도 야망도 없던 나에게, 떳떳하고 당당한 사람이 되어야 할 이유가 생겼고, 그에 걸맞는 목표가 필요했다. 허나, 열정과 노력이 뒤따라 오기도 전에 봄이 먼저 찾아왔고, 모든 것은 하얗게 쌓였던 눈과 함께 녹아버렸다. 마치 애초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 처럼.


마음이 아프다는 신호는 몸에서 가장 먼저 왔다. 태어나 처음으로 입원을 하고, 링거도 맞아보고, 약화된 면역력 때문에 없던 알러지도 생기고, 몸과 마음의 고통에 며칠을 잠 한 숨, 물 한 모금 없이 시달리기도 했다. 그러나 상실감은 다른 어떠한 질병보다 무서운 병마였고, 잃는 것에 지친 나는 결국 나 자신을 잃었다. 누군가를 만나고 헤어지는 것을 통해서 상처를 받고, 그래서 그 누구도 함부로 믿지 못하게 되버렸다. 나에게 있어서 가장 큰 장애물은 그 누구도 아닌 내가 되었고, 진심이라던지, 마음, 그 모든 것들을 언젠가는 변해버릴 사치 혹은 순간의 감정에 휘둘려 뱉어내는 유통기한 짧은 말 따위로 치부하게 되었다. 분명 괜찮아 질거라는 믿음은 사라졌고, 세상 괴롭기는 하지만 분명 그만큼 행복한 순간도 꼭 온다는 해피앤딩의 동화적 신념 역시 소멸되었다. 동시에 나 자신이 주인공이었던 동화조차도 비극으로 내 손으로 마무리 지었다.


가을이 와서야 나는 나 자신을 되찾았다. 그러나 내 안의 가장 솔직하고 담백했던 부분은 내가 알던 완벽했던 세상과 함께 종말했다. 많은 사람들을 상처주고 그에 비례하는 상처를 받았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울리고 나 역시 그에 마땅한 슬픔을 토했다. 나의 모든 것을 잃은 댓가로 나는 그 어떠한 것에도 흔들리지 않을, 다시 찾아온 이 겨울만큼 차가운 냉정함을 얻었다. 더 이상 그 어떠한 말이나 감정에도 나는 동요되지 않을 것만 같다. 이것이 나의 유일한 위안이고 만족이다. 달라진 것은 바로 나 자신이다.


2012.05.13. 04:27




단상 II : 그 날


순간 어깨 위에 너무나도 무거운 짐이 얹혀진 것 인지, 아니면 내 등에 일주일이라는 시간 동안 달려 있던 새하얀 날개가 꺾인 것인지, 몸과 마음이 움직이기 힘들정도로 무겁고 갑갑했다. 눈을 비비고 다시 봐도 내가 서 있는 곳은 도착하던 날과 같은 이 도시, 이 장소였다. 오늘은 왜 이 곳이 이렇게 미워 보였을까. 나는 떠날 준비가 안 되어 있는데, 이 시간과 공간은 날 보낼 준비가 너무나도 완벽히 되어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그를 앞으로 못 볼 날들이 두렵거나 슬퍼서가 아니었다. 나는 현실 속에 있을 법한 느낌이나 감정이라기에 지나치게 비현실적으로 행복했던, 심장 그 깊숙한 어딘가에서부터 절실히 행복을 의식하며 미소 짓던 이번 일주일의 일상이 "지금"에서 "기억"으로 변하는 시점에 서 있는 것이 끔찍히도 싫었던 것이다. 괴로웠다. 앞으로의 날들은 이번 주를 기억할 날들 뿐이지, 더이상 이번 주를 상상하며 기대할수 있는 날들이 아니란 것이 나에겐 너무나도 잔인했다. 간절한 시간의 흐름 끝에서 다시 만날 거란 건 알지만, 이번주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뿐이 아니고 지금 우리를 둘러싼 이 공기, 내음, 소리, 심지어는 일주일동안 시계바늘이 지나간 경로조차 평생 소유하고 싶었다. 이렇게 무심코 기억에게 넘기기엔 너무나도 완벽했던 "지금"들의 연속이였다. 나는 이번 주를 기억하기보단, 이번 주를 상상하고 싶었다.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행복을 실감하기보단, 이번 주를 평생 실감하고 싶었다. 그냥 이대로. 그대로. 영원히.


2011.01.29. 23: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