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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해보 Apr 04. 2022

“문화기획자의 길”

T자형 행정가, 王자형 정책가, 主자형 문화기획자

(다움아카데미 10주년 기념 출간 책자 기고글 _ 2008)


1999년 봄

죽산 용설저수지 위에 퍼지는 햇살은 너무 곤하고 평온해서 오히려 불안했다.

2년 전 용인 묵리 산골 산모롱이에서처럼, 대학을 얼렁뚱땅 졸업하고도 못 떨친 젊은 몽상으로 다시 들어앉은 곳이 “안성(安城)”이라. 숫자 한자리가 바뀐 후의 모습을 예측하지 못해 호들갑을 떠는 밀레니엄 신드롬에 비해 너무 변화 없는 나날에 이제 더 이상 어리지도 않은 젊은치에게는 불안하고 갑갑증이 날 때였다.      

극단 대표께 못 주시는 월급인 셈 치고 다닐 수 있게 해달라고 한 나의 부탁이 다움아카데미에(아마 강준혁 선생님께) 수강료 면제 청탁이 되었고, 죽산터미널에서 아현동까지의 먼 나들이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Specialized Generalist, Generalized Specialist ?

면접인 셈으로 당시 기획실장이었던 박 선생님께 자기 소개서를 들고 갔다. 나 이외에는 팀원도 없는 극단 기획팀의 팀장이라고 내밀었던 명함이 아직도 부끄러운 기억을 불러일으킨다. 그때 소개서에 뭐라고 쓸지 무척이나 고심했고, 그래서 만들어낸 말이 “Specialized Generalist”였다. 지금도 별 다를 바 없듯이, 잔심부름부터 국제교류 업무까지 다 하는 극단 기획담당을 가장 그럴싸하게 표현하려니 “Generalist”라는 말이 떠올랐고, 그래도 나름 전문가라는 자존심이 있어서 “Specialized”라는 말을 붙였던 것이다.     

강준혁 선생님이 “기획자의 길”에서 “남이 할 일을 자기가 하려 하지 마라”고 하신 것은 아마 그런 자존심으로 어느 정도 잔뼈가 굵었을 때 범할 수 있는 오류를 미리 일러 주시는 경구라고 생각된다. 나누어서 일할 “남”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혼자 어렵사리 꾸려나온 살림을 다른 사람이 옹색하다고 입대거나 손대는 것이 싫어질 때, 결국 극단이나 그 단체가 그 헌신적인 멤버의 수준으로 밖에 발전하지 못하는 틀에 갇힌 경우를 주위에서 어렵잖게 볼 수 있다.     

예전에는 배우가 못되어서 극단 기획 담당자가 되었다고 하지만, 문화기획자의 일은 분명 이렇게 자기의 성 안에 서서히 갇히게 할 만큼 자극적인 도취감을 준다. 당시 다움아카데미 교재에서 기획자의 역할 범주를 정의해 놓은 것처럼, 없던 일을 만들어 내고 계획하고 마지막으로 그 성과와 의의까지 강평해야 하는 기획자의 일은 스스로 일 도모하기를 좋아하고, 그로 말미암아 무엇인가를 바꾸는 일에 의지가 있는 사람에게는 매우 끌리는 일이다.      

세상 인간사 모든 것이 문화라고 하니 “문화기획자”란 결국 세상을 바꾸려고 도모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기획함으로 이름을 빛내려 하지 마라”라는 경구 또한 “기획자의 길”에 넣어 두신 것으로 생각했다. 서가에서 당시 교재를 꺼내 열어보니 나의 악필로 “쓰임새가 없는 것을 괜히 만들지 마라”고 따로 받아 적어 놓은 것도 있었다.      

산골에서, 저수지 옆에서 젊은치가 느낀 막막한 불안감은 분명 “Specialized"라고 자평했지만 어느 한 분야 전문가랍시고 이력서나 자격증 하나 내 놓을 것 없는 사회 초년병의 무력감이었다. 그런데 대체로 문화 분야에서 일 했다고 말할 수 있는 근 10년이 지난 지금도 느끼는 막연함은 내가 더 널리 밟고 돌아다녀야 할, 즉“통섭(通涉)”해야 할 영역이 넓고 그 갈 길이 명확하지 않다는 것을 짐작하면서 느끼는, 밀린 숙제를 앞둔 초등학생의 마음과 같은 것이다. (나는 통섭을 統攝으로 적는 것이 그 본질에 맞지 않다고 생각한다.) 진정한 Generalist 문화기획자의 내공의 깊이를 이제 얼핏 짐작하고 느끼는 무게감인 것이다.    

   

문화행정가문화정책가문화기획자

공대생의 부족했던 교양을 보충하듯, 젊은 몽상가의 이상을 기획서로 발표하고는 그해 아현동에서의 다움아카데미 3기 과정을 수료했다. (안타깝게도 출석 일수가 모자라 졸업은 못했다.) 그 후 사물놀이 한울림에서 그나마 잠시 기획담당으로 일 한 후, 지금까지 정부 산하 공공재단들에서 일하면서 나는 점점 내가 문화기획자라기 보다는 문화행정가가 되어 간다는 자괴감을 느끼게 된다. 항상 “갑”의 위치에 있는 “공무원”이 싫은데 남들이 나를 “半공무원”이라고 하는 것은 죽어라고 싫어서 “문화행정가” 보다는 그나마 “문화정책가”가 되기로 맘을 먹었다. 그래서 이런 저런 연구보고서 나부랭이들을 섭렵하고, 그래봤자 어차피 공허한 행정 “보고서”를 “전략보고서”로 만들어내는 일에 매달리게 된다.      

내가 생각하는 둘의 차이는, “문화행정가”는 결정된 공공정책을 집행하는 공무원이라면, 문화정책가는 그 정책을 만들어내는 공무원이다. 일의 선후의 차이나 그 주체성의 차이 때문에라도 나는 “행정가” 보다는 “정책가”가 만에 든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요즘은 “정책”이라는 것을 현장에서 일하는 공무원들 보다는 유식한 분들이 만드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공공정책이란 분명 이를 수립하고 집행하도록 민주적인 절차로 위임받은 자가 담당해야 할 일이다. 나는 그런 공공정책의 올바른 방향을 일러 줄 민간 부문의 정책 전문가 또는 기획자가 있다면 그를 “문화기획자”라고 부르겠다. 그래서 기껏해야 半공무원일 수밖에 없는 내가 지향할 바는 바로 “문화기획자”인 것이다. 문화정책의 방향은 문화 담론으로도 제시할 수 있지만 축제나 문화행사 또는 작은 문화상품 아이템에 대한 시민들의 반응으로도 제시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기획하는 문화 사업의 크기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공공의 민의를 가장 적절히 수렴하여 그것을 숫자(예산)로 표현하는 공무원(정책가)이나, 그 숫자(예산)들을 또 다른 숫자로(계량화된 실적) 변환해 내는 공무원(행정가)과 문화기획자가 다른 점은 무엇인가?      

우문에 우답 같지만 가장 큰 차이는 바로 그 “숫자”에 목을 매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공공예산을 안 쓴다는 말도 되고, 숫자로 표현되는 실적을 좇지 않는다는 말도 된다. 공무원들의 간섭을 가장 덜 받고, 그래서 가장 창의적으로 일할 수 있는 경우는 바로 “비 예산 사업”으로 일 할 때이거나, 협찬 또는 기부로 없던 사업을 새롭게 만들어서 할 때이다.      

서울문화재단의“문화가 있는 놀이터”사업의 성공사례에 자극받은 서울시가 이를 전면적으로 추진하여 성과를 확대하겠다고 나서면서 재단은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된다. 물론 재단에서 시행될 때도 원래 “문화가 있는 놀이터”는 “풀뿌리 문화네트워크 구축을 통한 문화 마을가꾸기”중의 하나의 프로그램이었으나, 그 성과가 숫자로 표현되기 지나치게 어려운 후자의 사업은 아직 언제쯤에나 시행될 수 있을지 요원하다.     

경영담당 부서에서 최근 서울시 공무원과 그들의 “을”들을 불행하게 만들고 있는 성과주의 경영혁신 담당자로 시달리던 나는 급기야(?) 나를, 아니 우리 재단을 좀 더 문화적으로 일하게 할 수 있는 새로운 “숫자”, 즉 문화의 가치를 나타낼 수 있는 새로운 혁신과 평가체계를 제안하는 오류(!)를 범했다. 그 새로운 숫자는 공공예산 투입의 성과로 손으로 꼽을 수 있는 “문화가 있는 놀이터” 만들기에서 더 나아가 “문화로 사람들 사이가 엮어지는 마을”만들기 사업을 추진하기 위해서 필요한 숫자인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공무원 또는 공무원처럼 일해야 할 조직에서 용인할 수 없는 이상일 뿐이기에 그런 일은 자기 부정의 오류인 것이다. 그나마 그 오류로 만들어진 글인 내부보고서가 아니었고, 외부(한국문화관광연구원 문화정책논총 19집)에 기고된 논문이었기에 다행히 그것 때문에 크게 핍박받을 일은 없었다.(^^;)    

 

스티브 잡스와 문화기획자

결정된 사항을 집행하는 행정가와 달리 한발 앞서 그 도모할 일의 방향을 일러준다는 점에서 서로 공통점이 있지만, 문화정책가와 문화기획자가 근본적으로 다를 수 밖에 없다. 이를 설명할 좋은 단서를 마침 최근 재단 전 직원 교육에서 한 경영학 교수님의 강의에서 (졸지 않고) 찾아냈다. 스티브 잡스의 이야기였다.      

스티브 잡스가 애플컴퓨터의 성공신화 이후 NeXT라는 신 모델 PC를 출시했을 때 그 특출한 기능과 디자인에도 불구하고 호환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어이없는 실수를 한 대목에 대한 설명이었다. 그는 자서전에서 시장 조사를 하지 않았다고 적고 있다고 한다. 그저 잘나가는 기업 CEO, 특출한 프로그래머라기 보다 수많은 애플매니아들이 밤새 줄서서 기다리는 새로운 문화코드를 만들어 내는 천재로 추앙되는 그는 시장의 요구를 분석하여 반영하기 보다는 자신의 혁신을 시장이 따르도록 한 것이다. 물론 그런 천재적인 문화기획의 태도는 실패와 성공을 모두 가져왔지만, 이것이 바로 문화정책가와 문화기획자의 근본적인 차이인 것이다.      

자신의 직관에 따라 일을 도모할 수 있는 민간부문의 “문화기획자”와는 달리 “문화정책가”는 공공의 의사를 수렴하여 가장 최적의 이해 절충안을 만들어 낼 수밖에 없다. 정책을 “품질관리” 하겠다는 신 공공정책 관리 이론에서는 면밀한 고객요구조사가 무엇보다 중요시 된다. 정책가에게 천재적인 직관을 요구하지는 않더라도 분석을 통해 미래를 예측하는 역할을 요구하기도 한다. 그러나 다음 선거를 생각해야 하는 지방자치단체장이 제갈공명 같은 선지자적인 정책가가 아닌 이상 불확실한 미래예측 보고서에 따라 급진적인 정책을 쓸 수는 없다.       

그래서 항상 공공부문보다 한 발 앞서 가는 민간부문, 즉 시장에서 (또는 그들이 목표로 내세우는 선진국의) 이미 지나간 트렌드를 붙잡고 “민간부문의 효율 벤치마킹”, “시장원리를 도입한 경쟁 지향의 공공혁신”이라는 이름을 붙여 시행하기 십상이다.  이제는 거의 모든 지방자치단체와 정부가 지향하는 창조도시, 창조경제, 컬처노믹스 등 문화예술을 통해 돈벌이를 하자는 것도 시장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이루어지고 있는 현상들을 소위 “새로운 패러다임의 정책”이라는 이름으로 공공부문이 시장으로부터 지켜야할 가치조차 내 팽개치고 따라가고 있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그 방향과 걸음새가 다른데 아무리 한들 따라 잡을 수도 없다.      

반면 그런 “안전빵”정책에서는 조금 더 나아가 변화를 제시하는 정책들 중에도 그 정책의 정당성을 강변하기 위해 특정 방향으로 과장된 현실을 바탕으로 조작된 결과보고를 내 놓거나 결국 자기부정의 덫에 빠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특정 분야에 예산을 더 투입하려면 해당 분야의 현실이 그토록 (또는 우리가 따라잡아야 할 선진국에 비해) 열악하다는 분석결과를 평소 제대로 관리하지도 못한 통계를 근거로 제시해야 하고, 이를 개선할 목적으로 매년 예산이 투입된다. 그 성과로는 매년 당연히(!) 수 % 증가, 또는 향상된 수치가 보고되고 다시 다음 해의 예산 편성의 근거가 된다. 그러다가 더 이상 증가할 수 없는 숫자의 덫에서 헤어 나와야 할 시점이 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열악하다”는 자기(또는 전 정권의 타인) 부정의 논리를 펼쳐야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방금 본 영화의 좋고 나쁨에 대해서는 바로바로 이야기하지만, 자신의 행동을 암암리에 규정짓고 있는 공공정책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문화정책가는 자기부정을 통해서도 계속 새로운 정책을 만들어 낼 수 있지만, 문화기획자에게는 시장과 고객이 그 기획에 따른 성공과 실패의 댓가를 좀 더 냉엄하게 묻는다. 스티브 잡스도 고객들에게서 외면 받은 적이 있고, 그에 비하면 새발에 피인 나도 극단에서 쫓겨났었다.    

 

T자형 행정가자형 정책가자형 문화기획자

공공부문과 민간부문의 경계가 차츰 허물어지고 있는 지금 그 가운데 있는 소위 “半공무원”인 내가 “어차피 될 수 없는” 문화정책가가 아니고 “원래부터 그랬어야” 할 문화기획자로 살아남는 방법은 무엇인가?      

절대 앞서서 변화하지 않는 “안전빵 정책”의 태도를 비난할 수도 있지만, 문화행정가 또는 문화정책가가 공공성을 잃어버리는 것은 그에 못지않게 매우 심각한 문제이다. 공공성이 지나친 무사안일은 세상의 변화를 읽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읽지 못하는 능력부족에서 오는 경우도 많다. 이를 경계해서 행정가들의 전문역량을 높이는 조직혁신 조치들이 또 다른 정책가들에 의해 제안되기도 한다. 한 분야의 전문성을 깊이 천착한 실무자 경력 이후 여러 업무를 순환하는 관리자가 되어야 한다는 “T자형 경력관리”가 바로 그 중 하나이다.     

공대생으로서 못다 한 교양공부를 매우는 듯 한 자괴감을 가지고 들은 다움아카데미  수업의 대부분은 바로 이러한 T형 경로에 앞서 그 밑바탕을 까는 작업, 즉 工자형 경력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었다. 공교롭게도 “교양”은 영어로 “Culture” 번역된다. 청소년들이 사회에 나오기 전에 주체적인 인생경로 설정이나 교양을 쌓을 수 있는 여건이 못 되는 우리나라에서는 최소한 문화행정가가 되기 위해서는 T자형 경력에 앞서 폭넓은 문화적 소양을 쌓는 工자형 경력관리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공허한 이론에 뿌리를 둔 정책가 보다는 그나마 현장 행정경험에 근거한 정책가가 낫다. 따라서 행정가가 정책가로 바뀌기 위해서는 工자위에 또 하나의 T자를 쌓아서 王자형 경력을 쌓을 필요가 있다. 이제는 세상이 복잡다기하기도 하고 각 분야가 서로 중첩, 연관되어 감으로써 한 분야의 경험만으로는 최적의 정책을 만들어 낼 수 없는 것이다. 문화와는 전혀 상관없는 이공계 대학 졸업장과 친구들이 만날 때 마다 “또 바뀌었어!” 하는 수많은 명함들이 나를 훌륭한 문화정책가로 만드는 거름이 될거라고 자위하고 있다.     

그런데 문화정책가와 문화기획자가 근본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은 도모하고 강평하는 일의 목표와 그를 수행할 재원의 출처가 다르기 때문이다. 공공의 재원을 효율적으로 편성하는 정책가는 아무리 높은 책임감을 가져도 스스로 주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기획자는 자기가 책임지는 일의 범위 안에서는 철저히 주인이 되어야 한다. 그 일의 범위가 클 때는 그 책임의 크기도 크기 마련이다. 그런 책임을 전제로 정책가가 공공성 보다 자신의 창의적 직관을 내세워 기획자가 되기 위해서는 王자 위에 또 하나의 점(’)이 필요한 것이다. 나는 그것이 문화기획자를 문화정책가 또는 문화행정가와 차별되게 하는 본인만의 철학이자 창의성이라고 생각한다.      

그 점은 그를 다르게(창의적으로) 보이게도 하고, 궁극적으로 주인(主)으로 보이게 하는 것이다. 고객, 또는 시장은 스티브 잡스에게 그랬던 것처럼 그 점(’)의 주인에 대해 냉정한 평가를 내릴 것이다. 또한 그 점이 세상을 바꾸기도 한다. 좋게도 나쁘게도 말이다. (내가 아는 한) 정책으로 세상을 완전히 바꾸는데 성공한 통치자는 없어도 창의성으로 세상을 바꾼 천재, 기획자는 많다.  따라서 “기획함에 있어 사회와 나라, 그리고 세계에 이익이 되게 하라”는 “기획자의 길”의 문구가 바로 나와 같이 공공부문에 가까운 영역에서 일하면서 진정한 문화기획자를 지향하는 사람이 새겨야 할 또 하나의 경구로 생각한다. 문화기획자는 바로 문화를 바꾸는, 세상을 바꾸는 일의 주인이어야 하므로...          


<문화기획자의 길>

by 강준혁, 1988.3     

. 예술을 사랑하라, 그리고 그 예술가를 존중하고 아껴라.     

· 자신의 기획이 예술을 훼손시키고 예술가를 소모시키는 일이 되지 않게 하라.     

· 기획하고자 하는 일을 완벽히 이해하고 가치를 인식하라. 

  모든 손실은 분명하지 않은 의도에서 비롯된다.


· 기획함에 있어 사회와 나라, 그리고 세계에 이익이 되게 하라. 

  이를 버릴 때부터 길은 삐뚤어지게 마련이다.     

· 기획함으로 이름을 빛내려 하지 마라. 진정한 명예란 결코 쫓는 사람에게 붙들리지 않는다.     

· 자신의 발전을 항상 꾀하라. 그러나 지식에 빠지지는 마라, 

  지식이 부족하면 보충하되 과잉하거든 신중하라.     

· 앞서가는 예술가를 가까이 하라, 그러나 무모한 예술가는 멀리하라. 

  앞서감과 무모함이 백지 한 장 차이임을 항시 기억하라.     

· 대중과 목마름을 같이하라. 

  대중의 취향을 탓함은 대체로 질적인 면에서의 결함이나 홍보의 실패를 감추려는 짓이다.     

· 과정을 완벽하게 하라. 실제가 완벽해 질 수 없기 때문이다.     

· 남이 할일을 자기가 하려 하지 마라.     

· 매스미디어를 매수하려 하지 마라. 그보다 항상 매스컴을 돕는 마음을 가져라.     

· 비평가에게 아부하거나 또는 그들을 매수하려 하지 마라. 

  이에 넘어가는 비평가의 글은 결코 참되지 않기 때문이다.  

         

<문화재단에 있는 문화기획자의 마음>

(2014.8.4, 김해보가 후배에게)     

받을 공을 생각해서 너무 빨리 말하지도 말고

맡을 일을 걱정해서 너무 늦게 말하지도 말고     

남이 먼저 말 한 것도 내가 생각했던 것이라면 성공하게 지원하고

남이 벌인 일도 내가 맡은 것이라면 끝까지 책임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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