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순수함에 이르기 위한 세가지 접근법

물리적/생체적/사회적 존재로서 접근법 : 빼기/더하기/나누기

by 김해보

순수함에 이르기 위한 물리적/생체적/사회적 존재로서 접근법 : 빼기/더하기/나누기

(순수-기초예술 정책의 적절한 용어선택 전략 도출을 위한 기초 논의)

(김해보, 문화+정책 이슈페이퍼 2025-2월호 세부 내용, 2025.2.12)

Approach as a physical/biological/social being to reach purity: subtraction/addition/sharing (by Hae-Bo KIM)

순수함을 느끼는 데 필요한 요소들

“순수하다”는 말은 인식되는 존재의 상태에 붙이는 것이 아니라 인식하는 존재가 느끼는 상태를 이르는 말이다. 느껴진 순수함이란 인식되는 존재 상태의 순수함뿐만 아니라, 인식하는 자의 순수함에 대한 기대치, 그 수준까지 감각하고 구별해 낼 수 있는 능력, 그에 기반한 감각 결과에 대한 반응, 그 반응에 대한 언어적 표현이 뒤섞인 것이다. 인식되는 존재의 상태가 아무리 순수해도 인식하는 측이 그것을 순수하다고 느끼지 않거나 못하거나 표현하지 않으면 순수하지 않은 것이다. 놀이나 과학 수업으로 운동장 흙을 체로 쳐서 돌과 고운 모래를 분리해 본 사람이라면, 얻어진 모래의 “순수함”은 애초에 기대했던 순수함의 수준에 따라 선택된 체의 눈 크기로 결정된다는 것을 알 것이다. 모래와 돌과 같이 생명이 없는 물질은 체의 기계적인 움직임에 의해 숨김없이 분류되어 그 순수함의 정도를 나타내지만, 인간 행동의 순수함은 말을 통해 서로 공유된 정보에 대비하여 일어난 현실이 그에 부합해야 확정된다. 즉 사회적 존재들이 느끼는 순수함이란 배신감 없는 의사소통 결과의 후련함까지 포함하는 것이다.

표.JPG

증류와 필터링: 물질의 순수함을 위해 빼기

생명없는 혼합물에서 ”물질의 순도“를 높이는 방법은 특정 요소를 제거하고 정제하는 것이다. 수용자가 제거하고 싶어 하는 요소를 필터로 걸러내거나 에너지를 추가해서 날려버린다. 정수기 필터로 물을 정화하거나 알코올 증류를 통해 물을 떼어내고 술의 도수를 높이는 것이 이에 해당한다. 대표적인 빼기식 접근법이다. 순수예술 정의에 적용하면, 상업적 요소, 정치적 목적, 기능적 역할 등, 뭔가 수용자 입장에서 불순하다고 생각하는 요소를 배제함으로써 예술의 순수한 미적 요소만을 남기려는 시도이다. 그러나 정수기가 몸에 유익한 미네랄까지 걸러내버리는 것처럼, 이런 빼기식 접근은 때로 순수한 가치를 강화하기보다 다양성 축소 등 본질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위축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발효와 활성화: 더하기로 산출물의 순도 높이기

순수함에 이르는 또 다른 방법은 원하는 성분의 순도를 높이기 위해 그 주체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증진시키는 방식이다. 초산균(Acetobacter)이 발효를 통해 알코올을 초산으로 변환하여 얻어지는 식초의 순도를 높이려면 불순물을 제거하는 대신, 초산균이 활발하게 활동할 수 있도록 탄수화물 같은 에너지원(기질)을 추가 공급해야 한다. 이런 더하기 식 순도 높이기가 필요한 것은 초산균이 생명체이며 삶의 의지를 가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생명체가 자연에서 외계 환경과 물질을 교환하며 번성과 번식이라는 목표를 향해 삶을 영위하는 과정 자체가 바로 자신과 외계의 경계를 허무는, ”순수함을 따질 수 없는 혼존의 상태로 되어가는 과정“이다. 생명체가 외계와 단절되어 ”순수하게 존재한다“는 것은 곧 죽음을 뜻한다. 사실 생명체 개체로서 죽음 이후 후에도 자연은 그 사체를 외부환경과 섞어서 ”비순수“하게 만들어 다시 더 넓은 의미의 삶을 이어가도록 한다. 이때 따져야 할 순수성은 그 생명체의 삶의 결과로 만들어지는, 우리가 희망하는 어떤 산물의 순도여야지, 그의 삶 과정 자체가 순도 높기를 따지는 것은 부적절하다. 그것은 생명체 보고 죽지 않을 정도로만 살아서 순수한 무언가를 만들어 내라는 것과 같다. 그래서 그의 삶의 산출물의 순도를 높이는 방법은 무언가를 제거하는 방식이 아니라 유기적인 생명 활동을 촉진할 수 있는 조건을 더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예술 또한 그것을 창작하는 예술가의 삶이 생물학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완전히 순수할 수 없다. 그의 활동으로 만들어지는 창작 성과물의 순수성은 받아들이는 자의 가치와 취향에 맞춰 선택되는, 제한적으로 순수한 것일 뿐이다. 예술가와 예술이 만나서 더 왕성한 활동을 통해 순도를 높이도록 하는, 소위 더하기식 접근에 필요한 것은 자원을 제공할 넓은 시장과 다양성, 그리고 주체의 활동성을 높일 자율성이다. 예술과 상업이 서로 넘나들게 하고, 대중문화와 순수예술의 교류를 통해 종 다양성을 높이고, 사회 참여를 포함한 예술가의 다양한 삶을 창작과정에 녹여내는 것이 오히려 예술의 순도를 높이는 방법이다. 넓은 시장은 자본의 증가로만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술 수용자와 그들의 예술적 선택을 도와주는 전문가(비평가, 기획자, 예술경영인)이 많아져야 한다. 다양성은 기존의 제도화된 예술계 안으로 새로운 혁신이 들어올 수 있도록 하는 제도적 탈권위와, 현재 예술시장에서 인기를 얻지 못하는 것도 사멸되지는 않을 정도로 명맥을 유지할 수 있는 기본적인 생존기반을 제공하는 것으로 확보될 수 있다. 자율성은 시장과 국가, 시민공동체와 개인 중 어느 한 쪽도 다른 쪽을 완전히 무시할 정도의 힘을 갖지 못하도록 서로 견제함으로써 얻어질 수 있다.

명백하고 후련한 커뮤니케이션 : 사회적 존재들의 나누기 식 순수 추구법

단순히 분류하고 골라내는 것을 잘 해서 얻을 수 있는 순수함은 물리적인 순수함에 한정된다. 인간이 상대방의 사회적 행위에 대해서 느끼는 순수함은 커뮤니케이션 결과의 명백함, 또는 후련함과 관계된다. 사회적 행위의 결과는 단순히 물리적 해프닝이 아니라 의도에 근거해서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눈 앞에 벌어진 현상의 이면에 사전에 서로 공유한 것 외에 숨겨진 의도가 없었다는 진실을 확보할 때 순수함을 느낀다. 정수기의 우수한 정수 기능이 알고 보니 몸에 좋은 미네랄까지 걸러내버린다는 숨겨진 진실을 들으면 아무리 정수된 물이 순수해도 소비자는 분개한다. 애당초 그 정수기가 100% 순수한 물을 만들지 못하고 약 80%까지 밖에 정화하지 못한다고 알고 구입했고 그 수준으로 작동했다고 해서 그렇게 분개하지는 않는다. 제품 사용자는 공급자가 의도적으로 숨긴 하자가 없다면 값을 지불한 만큼의 순수성에 만족한다. 사회적 존재로서 의사소통 후 순수함을 경험하려면 서로 대화에 사용하는 용어의 개념을 공유해야 하고, 의도적으로 숨긴 사실이 없어야 한다.


예술에 기대하는 순수함의 요소

그렇다면 사람들이 기대하는 예술의 순수함은 무엇이며 어떻게 달성될 수 있나? 불순물을 제거하여 정제하는 과정인가, 아니면 특정한 요소를 강화하여 본질을 부각하는 과정인가? 이 질문이 단순히 예술가의 용맹정진으로 다다를 수 있는 순수한 아름다움에 대한 미학적 논쟁을 넘어서는 이유는, 그 자체로 사회적 행위인 창작과 발표 과정에서 무엇을 강제로 뺄 것인가를 선택하는 것은 정치적인 논쟁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예술작품의 발표와 감상은 사회적 커뮤니케이션의 과정이므로, 작품 아래에 숨겨진, 또는 미처 공유하지 못했던 의도가 나중에 밝혀진다면 그것은 불순한 것으로, 배신감에 치를 떠는 비난에 직면할 것이다. 우리는 예술이라고 감상한 예술의 이면에 본인이 기대했고 서로 말로 공유했다고 생각하는 것 이외에 것, 즉 예술적 사기에 해당하는 작품 수준, 작가의 명예욕과 금전욕, 또는 나를 지배하겠다는 정치적 욕망이 숨겨져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때 그 불순함을 더 강하게 비판한다. 그런데 이런 배신감은 사실 예술 행위자의 행위 자체가 불순해서 생긴 것이라기 보다는 수용자의 감정이 만든 것이 대부분이다. 애당초 앤디 워홀이 작품을 팔아서 돈 벌겠다고 나섰는데 그를 순수하지 않다고 비판하는 사람의 “순수성”이란 애초에 앤디 워홀이 생각하는 순수성과 다른 것이므로 그에게 비난으로 작용하지도 못한다. 미적 순수성 차원에서 보더라도, 아마추어 수준의 그림 그리기 행위를 합의했고 그 수준의 그림 결과를 받아 들었다면 그 그림의 수준이 낮다고 굳이 “순수하지 않다”고 비난까지 퍼붓지는 않는다. 그런데 진정으로 예술적 가치만을 추구했다는 사람이 느끼는 예술적 배신감이란 애당초 그 예술의 미적 수준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비평가 또는 경매 주선인)에게 의지했다가 그의 판단이 의도적인 거짓이거나 보편적이지 못한 평가였다는 것을 알 때 느끼는 것이다. 이 또한 그 작품이나 예술가를 순수하지 못하다고 비판하는 사람이 옹색하게 느껴야할 상황이다. 아마도 그는 자신이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는 예술적 가치는 남에게 의탁하고 그 밑에 작품의 소장으로 얻어질 경제적 가치나 명성 가치를 추구했던 자신의 “순수하지 못한” 의도가 드러나서 자신을 괴롭히는 것이다.

커뮤니케이션의 불순함이 주는 배신감의 원인이 되는 사실을 서로 말로 주고받지 않았다면, 아마도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상식이 서로 달라서 생겼을 가능성도 크다. 대표적으로 예술가도 먹고 살아야 하고 세상 속에서 창작하는 “생물학적이며 사회적인 존재”라는 상식에 대한 입장이 서로 다를 경우가 많다. 그게 합의된 상식이라면 예술가가 생계를 위해 돈이 필요하고 사회 구성원들에게 사랑받고 세상에 더 큰 영향을 미치고 싶어 하는 것도 굳이 말하지 않아도 당연해야 하는데, 이에 대한 시각의 차이와 일부 동의하더라도 기대수준의 차이가 있다. 직업적 예술가라면 먹고 사는데 필요한 돈을 예술로 벌어야 하고, 공공정책의 지원 조건 중에도 소위 “자생력”이라는 명목으로 경제적 가치 창출이 당연히 요구된다. 예술가 스스로 선택한 사회참여적 예술이나 공공정책이 기획한 공공예술을 통해 사회변화에 영향을 주려고 하는 예술가의 의도를 “정치적”이어서 “순수하지 못하다”고 비판한다면 지금 전 세계 거의 대부분 도시의 문화정책들이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뜻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술을 사랑하게 만든다는 것이 예술창작을 지원하는 공공정책의 목표인데,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산업적 프로세스로 예술이 전파되는 것 자체를 “순수하지 못하다”고 비난 할 수는 없다. 그 과정에서 애당초 그렇게 하고 싶었던 이유가 달성되지 못하는 것을 파악하고 막지 못한 전략적 실패를 비판하는 것은 적절하다. 그리고 지나치게 영리를 추구하거나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고 사회를 바꾸는 권력으로 치달아 주객이 전도될 때 그것을 순수하지 못하다고 비판할 여지가 생긴다. 결국 정도의 문제이지 애당초 그런 지향점이 완전히 소거된 순수예술지상주의자가 만족할 수 있는 순수한 예술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순수한 예술정책에 기대하는 순수함

최근 새삼 순수예술 지원이니 기초예술 지원의 필요성이 거론되는 정황을 둘러보면, 정말 예술의 순수성이 훼손된 상황이라기 보다는 예술을 지원하던 정책의 순수성이 의심 받는 상황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지금 어느 때 보다 소위 우리나라 순수예술가들의 해외 콩쿨 입상 소식이 많이 들려오고 있으니 순수예술의 수준이 순수성을 잃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순수예술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오롯이 예술을 지원하는 “순수한 예술정책”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그럼 예술계가 예술정책에 바라는 순수성은 무엇인가? 위의 논의에 비춰본다면 정책의 말이 숨김이 없고 명확해야 하는 것이다. 순수예술을 지원한다고 하면서 그 명분은 세계에 우리나라 문화의 우수성을 자랑할 소위 “K-아트”를 키우겠다는 것이라면 순수하다고 느끼기 어려울 것이다. 예술계에 신선한 충격을 줄 독창적이고 새로운 예술을 창작하라고 지원해놓고는 티켓 판매가 부진하다며 숨겨놓았던 의도를 얘기하는 것은 순수하다고 받아들여지기 어렵다. 순수하게 예술이 잘 되기를 바라는 정책이 순수한 예술정책일 것이다. 그런데 순수하게 예술을 위하는 정책은 무엇을 살리려고 애써야 하는가? 예술인가, 예술가인가, 예술계인가? 앞서 살펴본 예술지상주의 관점에서의 순수예술 지원정책이라면 그것을 위해 예술가 조차도 수단으로 치부될 수 있다. 실제로 지극한 예술의 가치 달성을 위해 예술가 본인이나 고용한 장인의 생명까지도 바쳐야 한다는 예술지상주의자들의 이야기는 역사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이처럼 예술정책에서 예술가도 빼내야 정치적으로 불순한 의도를 빼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진영도 있다. 그래서 예술인 복지정책을 정치적으로 해석하는 진영도 있다. 그런데 정말 예술가를 살리는 예술은 불순한가? 그것은 시간 축의 크기를 어디까지 놓느냐의 문제이다. 길게 보면 예술가가 사는 게 예술계 사는 것이고, 예술계의 다양성이 확보되는 게 예술이 진보하는 길이다. 순수와 기초라는 정책용어를 집어든 측에서 대중, 상업, 실용 등을 그 대척점으로 주변화시키려는 것이, 위계 없음이 특징인 네트워크 시대에 기존의 틀을 깨고 전복시킬 만한 혁신을 제시해야 할 예술계가 선택할 길은 아닌 듯 하다.

애초에 공공정책에게 순수함이라는 것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적절한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공공정책은 본질적으로 투입된 공공자원 만큼의 가치를 뽑아내야 하는데, 그것이 예술 자체가 아니라면 예술 입장에서는 절대 순수할 수가 없다. 예술정책은 크고 길게 보아서 예술을 널리 보급하여 예술가가 사회 안에서 먹고 살고 예술계를 이루도록 하는 것이 공공적 가치를 가진다는 합의 위에서 공적인 일을 한다. 그런 전제 위에서 순수하게 예술을 위한다면, <예술가가 먹고 살고 / 명성을 얻고 / 사회적으로 연결되어 살아가도록> <예술이 팔리고 / 인기리에 소비되고 / 공공영역에서 활용될 수 있게> <예술경영적으로 기획되고 / 산업화 되고 / 공공정책과 손잡게> 해야 한다. 이를 통해 예술가는 생업을 유지하고 예술계는 지속되는 효과 외에 문화산업으로 GDP가 조금 올라가고 국민들이 문화생활을 좀 더 쉽게 하는 공적인 효과를 얻는 게 큰 문제가 될까? 후자의 성공으로 인해 전자가 더 진흥되면 더할 나위 없는데, 보통은 후자로 인해 전자가 위축된다는 논리를 들어 아예 둘을 분리하자는 주장들이 제기된다. 연결하자는 것은 복잡하고 모호해보이지만, 분리하자는 것은 (말 만큼은) 선명하게 들린다. 그런데 앞서 살펴본 것처럼 예술가가 생태적 존재이면서 사회적 존재인 이상 절대 선명하게 구분되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그래서, 대중예술이 기초예술을 잠식하는 위기라는 순수예술가의 주장(강선애, 2021)은 20년이 지나도 똑같이 반복지만, “장르 중심 예술의 제도적 질서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기초예술의 다양한 사회적 경로 확대가 필요하다”(박신의, 2004)는 문화정책가의 오래된 주장을 다시 곱씹을 필요가 있다. 그리고 “배고파야 우수한 작품이 나온다는 해괴한 논리를 단호히 거부하고, 예술작품의 정당한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도록 합리적이고 원활한 유통구조를 만드는 예술산업”(오세곤, 2004)이 필요하다는, 연극 현장의 목소리도 산업화를 배척하는 주장의 순수성에 묻히지 않게 해야 한다.

정책 언어가 주는 박탈감 또는 배신감

그럼 새로 시작할 “순수예술정책”이 할 일은 무엇인가? 기존의 예술지원 정책의 집행 결과에서 느낀 배제감과 배신감을 치유하는 것이 아닐까? 그것은 예술가 입장에서 느끼는 정책의 “불순함”을 “순수함”으로 정화하는 과정일 것이다. 정책은 그것이 사용하는 언어에서의 정의 조항 때문에 배제감과 박탈감을 만들고, 서술의 모호함 때문에 배신감을 주기도 한다. 법률이나 정책용어에서 정의는 학술적인 개념의 정의가 아니라 공공행정이 일 할 영역과 그 범위를 표방하는 것이다. 그래서 정책이 챙기겠다고 선언한 개념의 바깥에 있는 것들에게 배제감과 박탈감을 준다. 정책행위의 대상을 “OO예술”이라는 방식으로 정의하는 방식은 그 적절한 대상을 골라내는 과정에서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고 더 큰 논쟁을 유발한다. 순수예술, 기초예술, 공공예술, K-예술이라는 말들이 그런 예들이다.

“OO예술 지원”이라는 말로 공공 자원의 분배에서 배제되었을 때 박탈감을 느끼게 된다. 그런데 배제감이나 박탈감을 주는 공공 자원이 꼭 정부가 분배하는 돈 만은 아니다. 문화의 산업화가 소위 순수예술 창작의 진흥에 더 많은 기회를 주는지 반대로 그 기회를 박탈하는지는 단순히 관련 정부 예산이 어떻게 쏠려 왔는지로 판단할 수 없는 일이다. 한류의 성공, 문화산업 시장의 성공에 소위 순수예술계가 어떤 이득을 얻었는지 따져보는 것은 지역에서 축제 개최를 통해 얻어진 경제적 이득을 모든 승수효과를 따져서 계산하는 것 만큼의 수학이 필요할 것이다. 그런데 정책은 사실 확인만이 아니라 마음을 달래줄 필요도 있다. 공공정책이 할당하는 공적 자원은 꼭 예산만이 아니다. 관심과 지지도 중요한 공적 자원이다. 문체부의 정책의지를 표현하는 말과 정책가의 행보는 관심과 지지라는 공적 자원을 전달하는 것이다. 그것이 순수예술을 지향하는 사람들에게 덜 쏠리니 불만이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정책이 주는 배신감은 “OO예술 지원”이라는 말로 시행한 정책이 사실은 궁극적 목적이 표방된 것이 아닐 때 느끼는 것이다. “순수예술지원” 정책은 순수하게 예술 창작활동을 더 왕성하게 하는 것이 목적인 줄 알았는데, 그것을 통해 지역경제 활성화나 시민 교육, 또는 국위 선양 등의 다른 가치를 만들어 내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을 때 배신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때 정책의 순수함이 비난받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순수예술 지원을 표방하는 정책이 순수함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우선 말의 뜻이 명확해야 한다. 그 명확한 말로 표현된 정책의 목표가 순수예술 진흥 이면에 경제적 성취, 시민 문화향유, 국위 선양 등 여러 공공적 가치를 포함하고 있다면 이를 사전에 명확하게 밝힐 필요가 있다. 그리고 정책 실행 과정에서 배분되는 공적 자원으로서 예산과 함께 관심과 지지를 표방하는 말의 자원도 적절히 배분할 필요가 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예술의 에너지를 사회적 일로 바꾸는 정책의 언어 선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