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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명현 Jun 24. 2020

웹소설.피투성이 소나타

18화

 아침 일곱시 반. 무난하게 새벽 빵을 만들고 가게 문을 여는 참이었다. 조금 바람이 차게 느껴지는 것 같아 하늘을 올려다 본다. 여느 때보다 높으면서 퀘청한 내음. '벌써 여름도 얼마 안 남았구나.'늘 작업장을 적정 온도로 유지하는 시현이었지만 오늘따라 발효종 상태를 체크하는 눈빛이 신중했다. 음료 쇼케이스를 밖에 내다놓고 간이 테이블 위에 낀 먼지를 닦으며 아침 손님들을 맞이하기 시작한다. 공기에 살짝 젖어든 한기를 느끼면서.

오후에 팔 빵 반죽을 만들어 발효실에 넣을 무렵. 멀리서 주저하듯 소극적으로 걸어오는 사람이 있었다. 복지관에서 시현에게 먼저 말을 걸었던 미혼모 경인. 시현은 그녀가 출산한지 보름 정도 되었다는 걸 들은 바 있었다. 일요일 수업 끝나고 몇번 마주 앉아 대화한 적이 있다. 시현이 캄보디아 원두로 에스프레소를 추출해 우유를 듬뿍 넣어 바닐라 라테를 만들 즈음 경인은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안녕..하세요. 제가 가게에 온건 처음이네요.."


"어서 와요."


시현은 부드럽게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경인은 식빵 향기로 가득 한 '빛나는 나무'의 내부를 둘러 보았다. 야외 테이블 말고는 앉아서 먹을 곳도 없는 작은 가게였지만 경인에겐 마치 꿈에 나올 듯 따뜻한 분위기가 맴도는 곳이었다. 경인은 자신도 모르게 혼잣말하듯 웅얼 거린다.


"사장님은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내셨을 것 같아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시현의 얼굴에 슬픈 미소가 지어졌다. 잠깐 사이 무표정하게 가라앉긴 했지만, 시현이 방금 보인 감정은 은아나 스승 정모란 여사도 몇번 본 적 없는 모습이었다. 커피를 더블로 추출해 에스프레소 한잔이 남아있다. 부담없는 고소한 맛의 커피를 두 모금에 나눠 마신 후 시현은 평온한 목소리로 물었다.


"밖에 앉아서 이야기 할까요? 나도 잠깐 숨 돌릴 시간이어서."


"예..밤식빵 하나 살게요. 여기서 먹고 갈 거예요."


"그래요."


따뜻히 데운 밤식빵을 테이블 위에 놓고 마주 않은 시현과 경인. 사실 경인은 시간을 잘 맞춰 온 편이었다. 십분만 빠르거나 늦게 왔으면 시현과 이야기를 나눌 수 없었을 테니까. 커피가 든 머그 잔을 양 손으로 움켜쥔 경인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겁에 질린 듯 미세하게 손을 떨고 있어 애초롭게 보인다. 시현은 경인을 괴롭힐 생각은 없었기에, 쉽지 않은 질문이지만 경인이 말하고 싶은 민감한 현실을 꺼내었다.


"꼬물이는 건강히 태어났나요?"


꼬물이는 경인이 배 속의 아이에게 붙인 태명이었다. 태동이 너무 없어 조금이라도 꼬물거리란 뜻으로, 불행한 경인의 현실 중 그나마 인간적인 면모가 엿보이는 단어였다.


"꼬물이는 건강해요. 2.5킬로라 인큐베이터에 넣어야 할지 모른다 했지만..괜찮데요. 오늘은 잠깐..복지관 선생님들 한테 맡기고 나왔어요..시현 사장님한테 인사하고 온다고.."


"다행이군요."


경인의 눈이 축축하게 젖어들고 있었다. 그녀는 아이를 입양보내지 않고 자신이 키우기로 마음을 굳혔다. 완전히 갈라선 부모에게선 아무 지원도 기대할 수 없었고 복지관의 도움만이 그나마 한 조각 위안이 된 신세. 시현은 하고 싶은 것도, 배우고 싶은 것도 많은 나이에 한 아이의 어머니가 된 경인의 현실을. 그 모든 것을 감당하기에 눈 앞의 여인이 아직 너무나 어리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필사적으로 흐느낌을 억누르던 경인은 조심스레 시현을 올려다 봤다. 아주 온화한 시선이 경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단순한 동정이나 측은한 눈빛이 아니었다. 경인이 제대로 받아 보지 못했던 부모의 사랑을 떠올리게 하는 그런 깊은 감정.


"하고 싶었던 것은 있나요?"


"그런건..이제 저에게 해당없는 말이예요. 끝났어요. 다..전부 다.."


"경인 씨는 바둑에 대해 아시나요?"


경인은 의문으로 눈을 깜박였다. 시현의 부드러움은 풀어지지 않았지만 투명한 눈동장엔 약간 엄격한 기색이 엿보였다.


"한 바둑 기사는 제한 시간 8시간 중 5시간을 수 읽기에 쓴 예가 있어요. 그는 마음 속으로 수백번의 승리와 패배를 연상하며 수를 놓았어요. 그리고 그 승부에서 승리헀죠. 무엇을 시작하는데 이르거나 느린 건 없어요. 백년을 살면서 단 하루를 수행했다 해도 다음 생애엔 그 하루 만큼 수행이 되어있는 법. 누구에게나 시간은 영원해요."


경인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 나왔다. 괜찮은 척 해야한다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 살면서 애정을 가지고 따끔한 말을 해 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까. 복지관 선생님들의 친절함으로도 무마할 수 없었던, 관심에 대한 갈구가 처음 채워지자 경인은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울기만 해서 죄송해요..빵은 포장 해 주세요.."


슬슬 시현이 일할 시간이 되자 경인은 겨우 마음을 정리했다. 시현은 빵을 포장해주는 것만 아니라 복지관 선생님들이 아메리카노를 해먹을 수 있도록 에스프레소 원액을 적당량 담아주었다. 경인은 문을 나서기 전 희망이 비치는 눈빛으로 시현에게 말했다.


"저..검정고시를 보고 싶어요. 그리고 기술을 배워서 직업을 가질래요."


"꼭 할 수 있어요."


경인의 얼굴에 미소가 깃들었다. 시현은 웃지도 않았고 찡그린 얼굴도 아니었다. 언제나와 같은 무표정으로 대답했을 뿐. 경인이 떠난 후에도 시현에겐 별 표정이 없었다.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부드러움이 감돌고 있었지만 그것도 잠시. 눈앞에 놓여있는 바쁜 일거리에 집중하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교복 차림의 수연이 찾아온 건 오후 네시쯤이었다. 일전에 화를 내고 간 것이 신경쓰였는지 약간 우물쭈물하며 시현에게 말을 걸지 못하는 눈치였다. 앞치마를 두르고 캐셔를 보고 있던 시현은 일이 바빠 서비스 커피를 내려주지 못했고, 이미 먼저 온 사람이 테이블을 차지하고 앉아있어 수연은 마냥 서서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손님들이 어느 정도 빠져나간 후에야 가게에 들어선다.


"커피 안주셔도 되요."


수연이 처음 꺼낸 말은 꽤나 단호했다. 주먹을 꼭 쥐고 얼굴이 굳어있는게 단단히 결심을 하고 온 것 같다. 시현은 타인의 감정을 파악하는데 굉장히 능숙했지만 그걸 오락으로 삼지는 않았다. 수연은 상체가 약간 앞으로 기울어지며 인상을 찡그린다.


"아저씨! 저는!"


"안녕하세요.."


수연은 갑작스런 난입에 숨이 턱 막힌 듯했다. 겨우 용기를 내어 목소리를 토해내려던 차 기세가 끊기고 얼굴이 소심하게 가라앉는다. 뭐야..? 하는 눈빛으로 난입자를 바라보는 순간 헉! 하는 표정으로 뒤돌아선다. 이전 시현에게 싫은 소리를 했던 아저씨. 수연이 학교에서부터 시현에게 미안하다고 말해야지 하고 다짐하게 그 원인 제공자였다. '이 아저씨가 또 나쁜 말하면 내가 대신 화내야지.'수연은 그렇게 다짐하고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새침하게 섰다.


"야채 식빵 두개 줘요."


아저씨 손님은 기가 죽은 듯, 정확히 말하면 의지가 없어져 힘이 떠나간 모습이었다. 시현은 산미가 강한 커피 원두를 갈고 에스프레소를 추출하는 사이 빵을 포장했다. 모든 동작에 군더더기가 없어 문외한이 보아도 무척 아름다운 몸놀림. 그 모습을 바라보던 아저씨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씁쓸했던 과거가 의식 사이로 젖어들기라도 하는 것처럼. 시현이 건내는 커피를 받아들면서 머뭇머뭇 자기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었다.


"제가 폐암 말기인데..이제 가망이 없다네요."


"안 됐습니다."


시현은 놀라지 않았다. 사람 낯빛으로 병을 유추하는 건 시현에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기에. 굳이 의학적인 지식을 거론하지 않아도 아저씨의 말투와 행동으로 초조함과 절망의 기색을 파악한 바 있었다. 서늘한 온고의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마신 아저씨는 자연스러운 신맛에 기운이 났는지 진심으로 미안한 감정을 표시했다.


"내가 아는 척 했잖아요. 사실 나..주방일에 대해선 아무 것도 몰라요. 병세가 심해 질수록 짜증이 치밀어 올라서..간호사들 한테도 싫은 소리 많이 했어요."


"이해 합니다."


"그동안 심심치 않게 와서 못된 소리만 해서..그동안 미안했어요."


"괜찮습니다."


시현의 태도는 상냥했다. 빵을 받아든 아저씨는 그런 시현의 태도에 가벼운 웃음을 짓더니 천천히 밖으로 걸어 갔다. 화낼 준비를 하고 있던 수연은 멋적게 머리를 긁적거린다. 두 손을 아래로 모아쥔 채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는 모습이 복잡한 심경을 드러내고 있었다. 시현은 수연이 너무 깊은 고민에 빠지지 않도록 먼저 말을 걸었다.


"사람들에겐 여러 사정이 있는 법이야."


"피이..사장님한테 미안하다고 할 생각이었는데 취소예요. 아까 그 아저씨가 사과했으니까...자꾸 미안하다는 말 들으면 좋은 기분도 망치게 된다는 건 알아요.."


수연은 어른이 약한 모습을 보이는 걸 보자 부모님 생각이 난 모양이었다. 교통 사고로 작별인사조차 허락받지 못한 아픈 과거가. 헌신적인 언니의 노력 덕에 악몽같았던 후유증을 이겨낼 수 있었다. 시현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새로 살아갈 용기를 낼 수 있던 건 아직 비밀이었다. 언니와 시현은 이미 눈치채고 있었지만. 저녁 손님들이 들어오고 내일 반죽을 준비할 시간이 되어가고 있었다. 시현이 말하기 전에 수연은 눈치빠르게 자리를 떠났다. 며칠 동안 수업 시간까지 찾아왔던 미안한 마음이 많이 걷혀진 것을 느끼면서.


어느새 이발할 때가 되어 시현은 가게를 정리하고 초원 아주머니의 미용실로 찾아갔다. 미용실 한편에서 딸 요원은 학교 숙제를 하고 초원 아주머니는 티브이를 보고 있었다. 시현이 들어가도 아주머니의 시선은 움직이지 않았다. 티브이에 몰입하고 있는 게 아님을 알아챈 시현은 티브이 덮개가 새로 생겼음을 느꼈다. 기성품이 아닌 자수 작업으로 한땀 한땀 만들어진 수공예품.


"어, 빵 아저씨 왔다."


요원이 노트에서 시선을 떼고 말하자 그제야 초원 아주머니는 시현의 방문을 알아 차렸다.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자리에 앉으라 권하는 모습에서 뭔가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음이 보인다. 시현은 일단 자리에 앉아 "짧게 다듬어 주세요."언제나처럼 부탁했다. 능숙한 가위질 소리는 언제나와 같이 경쾌하다. 시현은 많은 노력이 들어간 덮개의 모습이 기억에 남아 스치듯 말했다.


"티브이 덮개 못 보던 거네요."


"아..그래. 그렇지."


"굉장히 정성이 많이 들어간 것 같은데. 직접 만드신 건가요?"


"우리 할아버지가 만들어 주신 거예요."


요원은 눈치가 빠른 아이였다. 자신이 대신 설명해서 엄마의 부담을 덜어주고 싶었다. 대부분의 이웃들이 그렇듯 요원은 시현에 대해 신뢰감을 가지고 있었다. 집안 일이지만 두려움이나 불안함 없이 조곤조곤 이야기를 풀어 놓는다.


"저희 할아버지 취미가 자수셨거든요. 증조 할머니가 가르쳐 주신 건데 증조 할머니가 일찍 돌아가신 다음부터 바느질을 자주 하셨대요."


시현은 늘 짧은 머리를 하기 때문에 커트는 금방 끝났다. 머리를 감아 주는 동안 초원 아주머니는 스스로의 감정을 다스리려는 듯 천천히 요원 대신 이야기를 계속했다.


"남편이 어렸을 땐 원망하기도 했대요. 같이 안 놀아주고 맨날 바늘만 잡고 있는다고..시아버님께는 할머니와 남은 유일한 추억이라는 걸 깨닫고는 몇번 뭘 만들어 달라 부탁하기도 했죠. 갓 시집 온 저를 위해 예쁜 자수를 놓아주신 적도 있어요."


어느덧 초원 아주머니의 눈가는 젖어들어 있었다. 큰 소리 한번 내지 않고 늘 상냥했던 시아버지. 지난 주 세상을 떠나셨지만 아직도 그 부드러운 모습이 의식에 남아 있었다. 시현은 이전과는 다른 마음으로 미용실을 둘러 보았다. 여러 생필품 중 덮개와 자수가 유난히 눈에 띈다.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추억과 더불어 아름다움을 남겨 놓고 가셨구나. 시현은 더 이상 초원 아주머니의 상실감을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 머리가 다 마르자 돈을 지불하고 짧은 목례로 인사한다.


"감사합니다. 수고하세요." 


가게로 돌아가는 길. 시현은 할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렸다. 수많은 무술가들 사이 살아있는 전설이라 불렸던 할아버지. 어둠의 조직에 몸 담고 있으면서 빛의 세계에서도 인정받은 막강함. 시현은 점차 한기가 부서질 준비를 하고 있는 밤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처음 할아버지에게 서기와 주먹 쥐기를 배운 날. 타인의 감정을 자극한 대가를 받는 것일까. 할아버지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아려온다. 시현은 자신의 슬픔을 감추지 않고 천천히 걸었다. 자신이 행했던 행동을 단 한번도 후회한 적 없다. 그런 다짐만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마음을 잘 여민 채 조용한 걸음걸이를 계속하는 시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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