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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명현 Jun 21. 2020

웹소설.피투성이 소나타

17화

 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방 안에 피워 놓은 향의 내음이 고고한 분위기에 품격을 더해준다. 조직의 당주 시현은 아버지와 어머니 앞에 서 있었다. 문 옆에서 대기하고 있는 은아는 무릎을 꿇고 있었고, 시현 부모님의 사용인들 역시 공손히 몸을 숙인 상태였다.

"이번 달 들어온 수익과 새로이 소속된 조직원들은.."


열 일곱 소년의 입에서 나올 말이었을까. 천문학적 액수의 돈, 사람이 아닌 도구로 취급되는 조직원들에 대해 보고하는 시현의 태도는 침착했다. 고개를 약간 숙인 채 였는데 깊은 고뇌와 상념으로 적셔진 얼굴엔 우수가 묻어난다. 아직 홍조도 채 가시지 않은 소년의 풋풋한 아름다움과 높은 수준의 지성이 어우러져 십대라 믿을 수 없는 위엄이 드리워져 있었다. 은아는 몸종으로서 가슴이 떨릴 만큼의 긍지를 숨긴다. 당주가 된지 3년. 연합의 보스들을 언급할 의미가 없을 만큼 한 사람의 보스로 인정받고 있는 시현이었다.  아버지는 대범한 웃음을 지으며 연신 고개를 끄덕이고, 어머니는 찻잔에 입을 맞출 뿐이었다. 보고가 끝나자 아버지는 가벼이 손가락을 튕겼고 하인들이 가져온 시가에 불을 붙였다. 연기를 폐까지 들이마시지 않고 온전히 향을 즐기며 유쾌하게 말했다.  


"연합에서 조직의 재평가가 있기 까지 2년이 남았구나. 최대 조직이 되긴 힘들겠지만 3위 안에 드는 정도는 기대해도 되겠느냐?" 


"제가 할 수 있는 내에서 최대의 결과를 이끌어 내겠습니다."


하하하, 시가의 묵직한 향과 어우러진 웃음소리가 하인들의 긴장을 제지하듯 뭉근하게 피어오른다. 어머니는 찻잔을 비운 상태에서 아무런 미동도 없이 시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실오라기 만큼의 감정도 허용하지 않는 차가운 눈빛으로.


"그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평온하십시오. 아버지. 어머니."


은아와 함께 방문을 나설 때였다. 문이 닫히고, 시현은 바로 걸음을 내딛진 못했다. 하얀 손수건을 꺼내 소리없이 흘러내리는 시현의 눈물을 닦아주는 은아. 그녀는 조직에서 유일하게 시현의 감정을 알고 있었다. 시현이 다시금 침착함을 되찾았을 때, 고개를 깊이 숙이며 위로의 말을 전할 뿐.  


"어머님께서도 당주 님의 마음을 알고 계실 겁니다. 심려치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시현은 자신도 모르게 짧게 도리질을 했다. 뇌수를 휘감은 옛 생각에 지배당하지 않고자 에스프레소를 내린다. 곱고 윤기나는 스팀 밀크를 만드는데 집중하며 자신답지 않은 상념을 떨쳐 낸다. 그래 내가 지금 있는 곳은 이 곳, '빛나는 나무'야. 몇년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그 당시 은아의 목소리가 귀에 생생했다. 오직 시현만을 위해 살아가던 그 헌신과 순종. 이제 그런 감정은 필요 없어. 완벽한 좌우 대칭의 더블 리프 라테 아트를 완성하며 회상을 정리하는 시현. 잠깐 스쳐가던 여우비가 지나가고 다시 쨍하게 드러난 태양을 반기듯, 시현은 앞치마의 매듭을 묶으며 캐셔를 볼 준비를 했다.


"여기 빵 발효종으로 만드는 거야?"


처음 보는 남자 손님이 가게를 둘러 보더니 대뜸 물었다. 나이는 사십대 중반 정도. 약간 째진 눈이 사나운 인상이었는데 낯빛을 본 시현은 꽤나 무거운 병이 있다는 걸 직감했다. 딱히 겁먹거나 싫은 내색없이 평소처럼 조용히 답한다.


"그렇습니다."


"식빵밖에 없는데 무슨 발효종 빵이야? 그냥 이스트 쓰면서 거짓말 하는 거 아냐?"


"전부 제가 담근 발효종으로 만든 빵입니다."


"내가 빵은 좀 알아. 발효종 빵은 거칠거칠하고 시큼한 맛이 돈다고."


"캄파뉴는 안 만듭니다."


"카파누가 뭐야?"


"손님이 말씀하신 전형적인 유럽식 발효종 빵입니다."


"거 사람 되게 틱틱거리네. 불만있어?"


"아닙니다."


시현은 전혀 기분이 상하거나 하지 않았다. 단지 평소대로 진실을 이야기 했을 뿐. 손님은 입술을 비죽 내민 채 가게를 둘러보며 "뭐가 이렇게 좁아?" "식빵만 만들고 완전히 거저 먹는 구만."시비를 걸었다. 기분 나쁠 법도 했지만 시현에겐 귀엽게 보일 뿐이었다. 짜증을 내는 것이 몸에 배어 열이 과한 것 같다. 만델링 원두를 갈아 에스프레소를 내리는 시현. 시원한 아메리카노를 건낼 참이었는데 손님은 휙 가버렸다. 시현은 주인 잃어버린 아메리카노를 자기가 마시면서 이번 주 수업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시현을 짝사랑하는 수연의 언니 소연이 다니는 병원은 시장에서 버스로 약 이십 분 거리였다. 평일엔 아주 가끔. 토요일은 거의 항상 자매가 '빛나는 나무'로 찾아와 빵을 사가곤 했다. 시현의 서비스 커피를 마시기도 했지만 비치되어 있는 음료도 심심치 않게 사먹는다. 이번 주 토요일에도 오후 두시쯤 찾아와 밤식빵을 찢어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때때로 시현에게 말을 걸기도 하고, 무뚝뚝한 단답에 토라지기도 하는 한가로운 시간이었다.


이전의 시비거는 아저씨 손님이 온 건 그때였다. 대뜸 가게 안으로 들어온 손님은 입술을 씰룩이며 불만스럽게 내뱉었다.


"야채 식빵 하나 줘봐."


시현은 바로 매대에서 야채 식빵을 집어 봉투에 담았다. 오천원 가격에 비해 양도 많은 편이고 들어간 야채도 많아 인기 만점인 제품. 손님은 한 손으로 빵을 받아들며 흘낏거리는 눈빛을 비추었다.


"우리 집사람이 맛있다고 해서 사가는 건데 말이야...당연히 미원 들어갔지?"


"화학 조미료는 쓰지 않습니다."


"거짓말 하지 마. 내가 맛을 아는 사람이야. 뭐가 들어갔으니 사람 입맛에 맞는 거라는 게 뻔한데."


"야채 스톡을 써서 감칠맛이 밴 겁니다."


"스..톡? 뭐가 들어가도 들어갔구만. 그러면 그렇지."


"재료의 맛을 우려낸 육수를 스톡이라 부릅니다. 저희 가게 빵은 물이 아니라 각각 종류에 맞는 스톡으로 만듭니다."


"흥..말만 번지르르 하네."


손님은 종알종알 싫은 소리만 내뱉더니 인사도 없이 휭하니 가버렸다. 커피를 안 갈길 잘했군. 아저씨 손님이 왔을 때부터 왠지 말이 없던 소연이 일어나 시연에게로 다가왔다. 조심스럽게 목소리를 낮추면서. 


"저 아저씨..여기 자주 오세요?"


"몇일 전에 한번 오셨고 오늘이 두 번째야."


"맨날 오늘 처럼 시비 걸었죠?"


"아는 사람이니?"


"우리 병원에서 진상으로 유명해요. 입원이랑 퇴원을 반복하는데 병원에 올 때마다 담당 간호사들 낯빛이 바뀌어요. 주사 바늘 찌를 때마다 생난리를 피워서. 온갖 싫은 소리란 싫은 소리는 골라서 하구요."


"병세가 꽤 심각한 것 같은데 두려워서 그러는 걸거야."


소연은 전혀 화를 내지 않는 시현의 태도가 의아한 듯한 눈치였다. 오히려 시현의 눈빛에 동정심이 깃들어 있는 것 같아서. 원래 감정 표현을 잘 하지 않는 사람이지만 못된 소리를 하고 간 손님을 염려하는 기색을 비추니 이해가 가지 않는다. 양 볼에 바람을 넣으며 얼굴을 찌푸린 수연의 모습이 더 납득이 가는 것이었다.


"뭐예요, 저 사람?! 재수 없어!"


"그런 말 하는 거 아니야."


"아저씨는 자존심도 없어요? 대놓고 무시하는데!"


"저런 사람들은 심적으로 연약한 사람이야."


"그게 무슨..!"


"수연아. 그만 가자. 사장님 일 하시는데 너무 오래 있는 것 같아."


소연이 팔을 잡아 끌자 화를 폭발시키려던 수연은 겨우 마음을 가라 앉혔다. 톡 건드리면 눈물이 흘러나올 것 같은 얼굴로 시현을 바라보더니 몸을 돌려 앞장서 가버린다. '쟤가 날 진짜 좋아하는 구나.' 시현은 씁쓸히 웃음이 섞인 한숨을 내뱉은 후 주문받은 3개의 케이크를 완성할 준비를 했다. 과일이나 초콜릿 같은 부재료없이 크림으로만 데코하는 작업. 아이 생일 케이크 2개. 어른 선물용 1개. 같은 종류의 크림으로 전혀 다른 이미지를 구현하는 모습은 마술이 연상될 정도였다. 눈속임이라 칭하기엔 너무나 잘 갈고 닦은 기술. '앞으로 알려지면 주문이 들어오겠지.'이마에 두건을 두른 채 섬세히 짜주머니를 다루는 시현에겐 일본의 초밥 장인이 연상되는 진지함이 깃들어 있었다. 어설픈 도발에는 흐트러 지지 않는 깊은 감정의 흐름과 함께.


케이크를 다 만들고 저녁에 팔 빵까지 모두 준비를 해 논 참이었다. 내일 수업 계획을 다시 한번 점검하는 사이 예성이 과일 봉투를 덜레덜레 흔들며 찾아왔다. 워낙 거구여선지 제법 큼직한 봉투였지만 작은 과자 봉지처럼 보일 정도. 바나나와 자두. 복숭아에 참외까지 모두 아름다울 만큼 잘 익은 것들이었다. 예성은 복숭아를 가벼이 던졌고 시현의 손은 잔상이 보일 듯한 속도로 낚아챘다. 시현이 복숭아를 베어물자 예성은 종이 쪽지 하나를 건냈다.


"이게 초연이가 이사간 집 주소야."


"과일 가게에 은지가 없었어? 직접 줬을면 될 것을..."


"난 네가 하라니까 찾아본 것 뿐이야. 남의 집 사정은 관심없어."


"고마워."


"정보료는 순살 파닭 한 마리야."


"좋은 거래군."


예성이 과일을 사온건 병원 간호사들이 시현의 빵을 아주 좋아하기 때문이었다. 특히 서비스 커피는 어지간한 전문점에 비해도 부족함 없는 풍미. 과일 산 돈이 간호사들이 모은 거라는 말을 하면서 생색을 낸다. 잘 익은 과일의 달콤함을 천천히 음미하던 시현은 예성의 말을 듣자 무표정한 얼굴에 살짝 기쁨이 감돌았다.


"앞으로도 평일에 한가하면 빵 사러 와. 원두 좋은 거 구해놓을게."


"우리 치과 아가씨들한테 고맙다고 하는 건 어떨까?"


"과일이 아주 맛있다고 전해 줘."


"좋아."


담배와 소주. 보글거리는 어묵탕을 마주 할 듯한 한참 나이의 청년 둘은 과일을 우물거리며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조금씩 손님이 오는 빵집 앞에서. 이 시장 부근에서 평판이 좋은 두 사람이었다. 차이 점이 있다면 스스로의 과거에 대해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는 것 정도.

 

몇 시간 후 가게를 정리한 시현은 예성이 준 쪽지를 들고 과일 가게를 찾아갔다. 사장님은 한참 손님들을 부르느라 지쳤는지 잠깐 쉬고 있는 눈치였다. 시현이 다가오자 어쩐 일이냐는 듯 말을 건다.


"아까 치과 선생님이 과일 사가지고 간다고 했는데?"


"아주 맛있었습니다. 은지 있나요?"


"방에 있을 거야. 무슨 일이야?"


"전해주고 싶은 게 있어서요. 부를 수 없다면 대신 전해주세요."


"뭔데 그래?"


"이사간 초연이 집 주소요."


사장님의 안색이 약간 어두워 졌다. 이전 은지가 자전거에서 넘어졌을 때 화를 과하게 낸 부끄러운 기억이 되살아난 것 처럼. 뒷통수를 긁적이더니 소심하게 웅얼거리듯 입을 연다.


"우리 은지가 초연이를 좋아한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그날 자전거를 안 잡아준 게 순간적으로 화가 나서.."


"이미 일어난 일의 책임을 따져도 남는 건 없습니다."


"그래도.."


"굳지 반대하자면 은지가 혼자 넘어진 거나 다름 없죠."


"그래..그렇지. 내가 성질이 못 되서 화를 낸게..거참, 미안한 일이야."


과일 가게 사장님은 덩치는 조금 작은 편이었지만 화를 내면 꽤 무서운 인상이 되는 얼굴이었다. 그럼에도 지금 시현 앞에선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부끄러워 하는 어린 아이 같은 모습. 시현은 쪽지를 건내면서 부드러이 말했다.


"은지가 저희 가게에 안 온지도 꽤 됐습니다. 학교에서 올 때마다 고개를 숙이고 있고요. 편지 정도는 보낼 수 있게 허락해 주세요."


"그래..그래야지. 시현 씨도 참 은근히 오지랖이 넓다니까."


"은근히가 아니라 무척 넓은 편이죠. 자두 만원 어치만 주세요."


"아까 과일도 받았을 텐데. 누구 주려고?"


"내일 제빵 수업에 가져갈까 해서요.


시현이 건낸 쪽지를 받아든 사장님은 만 오천원 어치는 될 듯한 자두를 담아 주었다. 시현은 사양하지 않고 공손히 고개 숙여 감사를 표했다. 사장님은 문득 시현이 아주 어린 소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지 않은 나이였지만 무척이나 순수하고 깨끗한 인상은 사춘기 이전의 마음 착한 남자아이를 생각나게한다. 조금 냉정해 보이지만 언행에 항상 기품이 있다는 것도. 며칠째 밥도 잘 안 먹고 말도 거의 안하는 은지가 좋아할 거라 생각하며 초연이의 집주소를 주머니에 잘 넣었다. 과일 가게를 뒤로 하는 시현에게 감사함을 느끼면서.


다음 날 제빵 교실은 고등 학생 아이들을 대상으로 이루어 졌다. 손이 아주 많이 가는 크루아상이었는데 곰 같은 덩치를 한 학생들에게도 수월하지 않은 모습이었다. 시현은 요령을 알려주면서 몇번이고 능숙한 시범을 보였다.


"크루아상은 헝가리의 유서 깊은 빵이 마리 앙투아네트에 의해 전해진.."


역사 이야기에 학생들이 흥미를 보임을 느낀다. 시현은 교과서 밖의 역사에 대해 조금씩 이야기하며 수업을 이끌었다. 어렵지 않게 머리 굵은 고등학생들을 리드하는 모습이 자연스럽다. 이어서 겹겹이 층이 갈라진 빵이 완성되고, 직접 만든 빵을 맛있게 먹는 학생들을 보며 시현은 말없이 빵만 보내던 때는 느끼지 못했던 즐거움이 다가옴을 느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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