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명현 Jun 18. 2020

웹소설.피투성이 소나타

16화

시현은 바리스타로 일해본 적은 없었다. 우연히 군대 도서관에서 커피 기본 이론서를 읽게 된 것이 시작이었다. 커피의 기본을 책으로 독학하고, 제대 후 에스프레소 머신의 기능미에 흥미가 생겨 개인 용도로는 제일 고가의 물건을 구입했다. 빵일을 하면서부터 시작했던 라테 아트 연습은 취미의 일환이었다.

"어쩜, 선이 이렇게 예쁘게 나오네."

"이걸 아까와서 어떻게 먹나."

할머니들이 시현의 손끝에서 그려지는 라테 아트를 보고 감탄했다. 시현은 제빵 수업을 끝내고 스무명 남짓한 할머니들께 여흥으로 카페 라테를 대접하고 있었다. 복지관 에스프레소 머신 정비가 잘 되어 있어 두껍고 풍성하게 추출되는 크레마가 아주 훌륭했다. 시현은 할머니들이 모두 보실 수 있는 각도에서 능숙하게 스팀 밀크를 잔에 붓는다. 라테 아트의 기본인 하트와 로제타. 원을 정확하게 구현하는 시현.기본이 갖춰지면 그 활용도는 무궁무진하다. 에칭 송곳으로 그리는 그림은 심플했지만 무척이나 귀여웠고 선은 간결하면서 아름다웠다. 모든 카페 라테의 그림이 전부 달라 흡사 동화 속 주인공들을 연상시킨다. 마지막 한 분의 라테까지 완성한 후, 시현은 천천히 드시다 가라는 인사를 끝으로 교실을 나섰다.

옷을 갈아입고 나왔을 때 복지관 현관문 옆에 서 있는 친구 예성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오늘은 주말 무술 수련 동아리가 쉰다고 했던가. 시현은 가벼이 예성과 손을 맞부딪혔다. 예성의 키는 187, 시현은 178. 얇은 티셔츠 너머로 탄탄한 근육이 비치는 예성이어서인지 시현의 왜소한 체격과 대비되는 것 같다. 백팩에 작업 가운을 넣은 시현은 트레이닝 복 바지에 나시 티 차림이었다. 두 친구는 시장 옆 공원까지 5km 거리를 함께 달렸다. 장거리를 뛰는 것을 감안하면 굉장히 빠른 속도. 그렇게 뛰면서도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엔 여유가 묻어났다. 한 달에 한번 100km를 쉬지 않고 달려야 했던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 감안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공원에 도착한 시현과 예성은 그늘 밑에 선 채로 스트레칭을 했다. 외발로 서서 반대쪽 발을 찢어 머리 위로 올리는 고난이도 동작을 너무나 가벼이 해내는 두 사람. 그저 마른 걸로만 보였던 시현의 팔 위엔 핏줄이 화려한 문신처럼 좍좍 돋아나 있었다. 근육의 결 하나하나가 약동하는 건 아름다움의 영역. 거구의 예성이었지만 치밀하게 연마된 시현의 육체를 보는 것만으로 피부에 소름이 돋는다. 시현은 형의권의 자세를 취하며 조용히 숨을 가다듬었다. 예성은 유서 깊은 그리스 무술 판크라티온의 자세를 잡는다. 둘 다 훈련된 무술가 답게 상대의 어깨와 발끝의 미세한 움직임을 가늠하며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예성의 무릎 공격이 대련의 시작을 알렸다. 묵직하면서 힘이 실린 움직임. 시현은 손을 뻗어 공격을 흘려 보내면서 상체를 기울여 예성의 몸통을 가격했다. 예성도 단순한 거한만은 아니었다. 약간 뒤로 밀려나는 사이 위협적인 앞차기를 구사하는 건 뛰어난 균형감각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옛 전쟁터에서 방패를 격파했다고 전해지는 공격. 시현은 허벅지에 맞으면 뼈를 박살내버릴 그 무서운 위력에 위축되지 않았다. 오히려 진각을 밟으며 힘을 모아 아래쪽에 두었던 주먹을 내뻗는다. 체격 차이를 넘어서는 중국무술의 정교한 원리를 통달한 시현의 공격에 예성은 약 4미터 뒤쪽으로 밀려났다.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빠른 발경 타법. 충격이 살 속으로 파고들어 뼈를 흔드는 것만 같다. 그럼에도 흐트러지지 않고 바로 자세를 바꾸는 예성은 과연 무술의 고수였다. 건장한 팔다리가 현란한 원을 그리기 시작한다. 브라질 노예들이 만든 무술인 카포에라.

십대 비보이들의 화려한 춤사위를 닮아 있으면서도 체중이 실린 동작은 과연 위협적이었다. 한 손으로 물구나무를 서면서 다리를 찢고, 앞 뒤로 재주를 넘는 동작이 너무나 자유롭고 매끄럽다. 시현은 십일자로 서면서 양 주먹을 허리춤에 대었다. 간결하고 힘이 깃든 공수도의 자세를 취하는 시현의 눈빛은 짐승과 같은 긴장으로 번뜩이고 있었다.

예성은 지면에 손을 대며 회전이 실린 몸통 돌려차기를 날렸다. 시현은 왼손 중단 막기로 바람 소리가 이는 발기술을 차단했다. 극한까지 단련된 골격이 맞부딪히며 나는 소리는 잔인할 정도. 예성이 맞은편 다리까지 회전 시키려 하는 순간, 시현의 앞차기가 예성의 허리에 정확하게 꽂혔다.

"크으.."

예성은 인상을 찌푸리며 그대로 대자로 누웠다. 멧돼지를 일격에 즉사시키는 시현의 발차기를 정통으로 맞고도 예성은 유머러스한 표정을 짓는다. 시현 역시 피식 웃으며 주저 앉았다. 예성의 발공격을 그대로 방어한 팔에는 검붉은 피멍이 맺혀 있었다. 일반인이라면 일어서기는 커녕 당장 응급실에 실려갔겠지만 시현과 예성은 실없는 장난을 치며 서로를 칭찬하는 것이었다. 하늘은 높고, 시원한 바람에 기분 좋아지는 순간. 예성은 길게 한숨을 쉬더니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옛날엔 훨씬 더 재미있었는데."

"그래? 난 지금이 좋은 걸. 먼저 간다."

시현은 피멍이 든 팔로 휘적휘적 인사한 후 등을 보인 채 걸어갔다. '언제부턴가 감정을 많이 드러내게 되었는걸.' 예성은 그렇게 생각하며 발로 차인 허리를 우둑우둑 비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욱씬거리는 통증에 맞춰 노래 부르듯 휘파람 소리를 내면서.

평일 오후 네시. 오늘 팔 빵들을 전부 준비하고 레시피 북을 읽고 있을 때였다. 의기소침한 얼굴을 한 은지가 눈치를 보듯하며 가게 안으로 들어선다. 평소보다 가라앉은 분위기. 심경에 어두움이 있음을 파악한 시현은 상냥하게 입을 열었다.

"라테 한잔 마실래?"

"저기요..부탁할 게 있는데요.."

"부탁? 무슨 일이야?"

"지난 번에 봤던 남자애..초연이 이 가게에 온 적 있나요...?"

소년의 이름이 초연이였군. 시현은 사실대로 이야기했다.

"지난주 네가 자전거에서 넘어진 그날 이후로 한번도 못 봤어."

은지는 아이답지 않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시현은 샷 반에 바닐라 시럽을 넣은 라테를 하나 건낸다. "감사합니다.."은지는 한 모금 마시는가 싶더니 이내 잔에서 입을 떼었다. 잠시 후, 두 손으로 받쳐든 잔이 떨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은지의 눈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작은 어깨를 떨며 그동안 아무한테도 말하지 못한 마음을 끄집어내는 모습은 애처로울 정도였다.

"초연이네 식구들..이사 갔어요..우리 아빠가 소리 질러서 미안했다고..고마웠다고 말하고 싶었는데..아주 멀리 갔대요. 이제 다시는 볼 수 없어요.."

시현은 섣불리 위로하지 않았다. 첫사랑의 결말이라 생각하면 무난한 이별이었지만 당사자에겐 너무나도 민감한 문제니까.

"오래 알고 지낸 것도 아니예요..어른들처럼 연애를 한 것도 아니구요..그냥 조금 같이 놀고 이야기 나눈 게 전부인데..이사갔다는 말 듣고 이틀 동안 아무 것도 못 먹었어요. 학교에서 말도 한 마디 안했어요. 정말..정말 보고 싶어요.."

친구들에게도 하지 않은 말이었다. 본인 역시 스스로도 알지 못했던 감정이었고. 시현은 은지와 초연이 함께 하는 동안 사랑이 싹텄음을 유추할 수 있었다. 함께 자전거를 연습하던 때 서로를 향해 보였던 눈빛. 풋내나는 첫사랑의 끝이 누구에게나 깊은 상처로 남는 것은 어째서일까. 소리없이 흐느끼던 은지는 겨우 마음을 추스리고 집으로 돌아갔다. 쓸쓸하고 슬픔에 찬 뒷모습. 시현은 소녀가 털어놓은 아픈 고백에 마음이 아리는 걸 느꼈다. 시간만이 해결해 줄 수 있는 문제겠지. 전염될 것만 같은 감정을 묶어둔 채, 눈 앞에 놓인 일거리에 관심을 돌리는 시현이었다.

가게를 청소하며 문 닫을 준비를 하던 중이었다. 아르바이트 두 개를 하는 지호 아주머니의 딸 현수가 천원 짜리 몇장과 동전을 들고 찾아왔다. 가게를 둘러 보더니 시현을 올려다 보면서 묻는다.

"야채 식빵 남았어요?"

다행히 빵은 남아 있었다. "전자 레인지에 조금 데워줄까?" 시현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며 오천원을 내는 현수였다. 딱 먹기 좋도록 적당히 빵을 데운 시현은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차갑게 탄 코코아를 건냈다. 현수는 시현이 커피를 서비스할 걸 예상한 모양이었다. 등에 지고 있던 책가방에서 스케치북에서 뜯어낸 듯한 종이 한장을 꺼냈다. 아주 멋지게 만들어진 색종이 꽃들이었다. 접기와 자르기 작업만으로 피어낸 갖가지 꽃의 모습은 매력적일 정도였다. 예쁜 문장을 골라 연결시킨 시도 적혀 있었는데 종이 꽃의 아름다운 색채와 더없이 어울렸다. 현수는 수줍은 듯 웃음지으며 종이를 두 손으로 잡아 시현에게 건냈다.

"맛있는 코코아 타주셔서 아저씨한테 드리는 거예요. 미술 선생님이 제일 잘했다고 칭찬해 주셨거든요. 받아 주세요."

"고마워."

시현은 정중히 종이를 받아들었다. 현수는 시현에게 마음을 연 듯했다. 조금 고민하면서 조심스럽게 물어보는 모습은 무척이나 귀여웠다.

"아저씨, 저 지금 이 빵 가지고 엄마 일하는데 갈건데..같이 가주실 수 있으세요..?"

"좋아. 이제 문 닫을 거니까 조금만 기다리렴."

시현이 가게 문을 닫을 동안 현수는 테라스에 앉아서 기다렸다. 용무가 끝난 후 공원에서 운동할 생각에 가벼운 트레이닝복을 입고 나온 시현. 커피와 코코아를 받아들고 남은 손으로 현수의 손을 잡고 함께 걷는다. 열대야가 있어선지 밖에 꽤 사람이 많았다. 한참 불을 켜고 바쁘게 손님을 상대하는 분식집 중에서 보름 전 오픈한 왕만두 집이 눈에 띄었다.

"현수야. 저녁 먹었어? 왕만두 하나 먹을래?"

"으응. 괜찮아요. 엄마랑 이 야채식빵 먹을래요."

현수는 야채식빵이 담긴 비닐을 잘 여며 들었다. 시장 마트를 지나갈 때였다. 온가족이 저녁 산책을 나온 모양이었다. 현수 또래의 아이들이 엄마의 손을 잡아끌고 아빠의 등에 올라타며 신나게 웃는 모습. 시현은 현수의 표정이 부러움으로 가라앉는 것을 보았다. 잠깐 생각하는 듯 했던 시현은 현수의 허리를 양 손으로 잡았다.

"꺅! 아저씨...!"

시현은 그대로 현수를 들어 목마를 태워 주었다. 현수는 어쩔 줄 몰라했고, 시현은 안정된 걸음걸이로 걸음을 내딛는다. 현수의 얼굴을 볼 순 없었지만 어깨에 전해지는 분위기로 순간적인 긴장이 순응으로 변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어른이 목마를 태워주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이혼 후 한번도 본 적 없는 현수의 아빠는 자상한 성격이 아니였고, 늘 술을 마시고 화내는 모습으로만 기억될 뿐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환히 웃으며 높다란 시선에서 늘 오가는 시장을 새로운 마음을 바라본다.

"아저씨. 있잖아요..아저씨네 아빠랑 엄마는 같이 많이 있어 주셨나요?"

"아버지한텐 칭찬 많이 들었어. 어머니하고는 얘기해 본 기억이 거의 없고."

"나랑 반대네요. 엄마가 일나가면서 잘 못 보지만..우리 엄마는 늘 저에게 잘 해주세요. 조금..바쁠 때도 있지만요."

"무슨 일이 있었니?"

"지난번에..학부모 참관 수업이 있었거든요. 친구들 엄마들은 다 오셨는데..우리 엄마만 못 왔어요. 울지 않으려고 했는데 선생님이 안아 주셔서 그만 많이 울었어요. 친구들 앞에서 창피해요."

"슬픔을 표현하는 건 부끄러운 게 아니야. 그런 생각 안해도 돼."

"그래요..? 사실 아까 드린 색종이 공예를 그 시간에 만든 거예요. 저 그런 거 잘하거든요. 애들이 다 부러워 했어요. 나는 엄마 아빠가 이혼하지 않은 친구들이 훨씬 부러운데..어, 다 왔어요. 내려 주세요."

국수집에 다다른 시현은 현수를 내려 주었다. 현수는 창문 너머에서 엄마가 일하는 모습을 몰래 바라보았다. 지호 아주머니는 바쁘게 그릇을 서빙하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더워서인지 쫄면과 냉면. 비빔 국수를 찾는 손님이 아주 많았다. 비록 힘들어 보이지만 활기차게 오가는 엄마의 모습에 수현은 안심이 되는 눈치. "엄마가 이제 퇴근할 시간 다 되어가요." 잠시 후 지호 아주머니는 옷을 갈아입고 국수집을 나왔다. 현수와 시현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보자 놀라는가 했지만 곧 상황을 파악했다. 시현은 음료가 담긴 캐리어를 건냈고, 얼음이 조금 녹았지만 맛이 유지된 아이스 아메리카노에 피로가 싹 가시는 듯 했다. 현수 역시 아까부터 마시고 싶었던 아이스 코코아를 입에 대었다. 온기가 남은 야채 식빵을 손으로 찢어 먹으며 모녀는 서로에게 웃음짓는다.

"그럼, 저는 이만.."

행복한 시간을 함께 해도 괜찮겠지만 시현은 인사한 후 바로 공원으로 향했다. 현수가 동행을 부탁했을 때부터 평소만큼 수련하지 못하겠다는 생각은 했지만 남은 시간만이라도 스스로를 위해 쓰고 싶었다. 고마워 하는 지호 아주머니의 눈빛과 현수가 준 종이꽃을 생각하며, 멋진 거래였어. 자신을 향해 중얼거리는 시현이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 웹소설. 피투성이 소나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