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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명현 Jun 14. 2020

웹소설. 피투성이 소나타

15화

이번 일요일에도 시현은 빵을 보내는 중이었다. 짐을 다 실은 후, 운전수 광수 아저씨가 명함 두 개를 내민다. 빵 수업을 제의했던 선생님들보다 높은 직급이었다. 외출을 하기 위해 블랙 진 바지에 흰 셔츠 차림을 한 시현은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더니 말했다.


"지금 같이 가서 만나 뵙죠. 주중엔 일하느라 시간이 없으니까요."


고아원과 양로원에 빵을 전달하고 광수 아저씨와 함께 복지관으로 향한다. 복지관 마당에선 자선 바자회가 한창이었다. 간이 무대에서 인디 밴드의 연주가 들려 오는 가운데 한쪽에선 잔치국수와 냉면. 순대와 떡볶이 같은 분식 냄새에 군침을 흐를 것 같았다. 주로 기증받은 옷이 팔리는 편이었지만 장난감과 간단한 수공예품도 제법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떠들썩한 분위기에도 침착함을 잃지 않는 시현. 광수 아저씨 소개로 명함을 받은 선생님들과 대면할 때 가벼운 목례로 인사했다.


"시현 선생님이시죠?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마침 바쁘지 않을 때라 다행이군요. 괜찮다면 앉아서..식사 하셨나요?"


"먹을 것에 대해선 신경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에게 하실 말씀이 있으신지요."


선생님은 간단하게 차려진 야외 카페로 시현을 인도했다. "저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로 하겠습니다."시현은 복지관에서 직업 교육에 쓰는 에스프레소 머신에 시선을 두며 공손히 말했다. 커피를 두고 마주앉은 선생님은 이전 고아원 아이들과의 제빵 수업에서 찍은 사진을 보여 주었다. 무언가를 만드는 것에 푹 빠진 아이들의 눈빛과 수업을 이끌어가는 시현의 상냥함이 꾸밈없이 드러나 있다. 시현은 사진을 찍히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막상 눈으로 보니 약간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살짝 웃는 인상이 된 시현을 바라보며 선생님은 말을 이었다.


"아이들이 아주 좋아했어요. 지금껏 보내주신 빵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할 일이지만 급하게 준비한 수업이 아이들에게 이렇게까지 좋은 인상을 심어줄 줄은 몰랐습니다. 저희 복지관에선 일요일날 할머니들의 문화 생활도 지원하고 있어요. 매주 일요일마다 제과제빵 수업을 담당해주실 수 있는지 여쭙고 싶습니다. 일요일날 빵을 만들어 주시는 시간을 대신한다고 생각하시면 어떨까요? 기본 준비료로 용돈으로 쓰실 정도의 보수는 지급해 드릴 수 있어요."  


"일요일 오전에 수업을 한다면 가능합니다. 보수는 필요 없습니다. 평일에 가게에 오셔서 빵이나 좀 사가 주시면 됩니다."


"그럴 순 없어요. 복지관 관할로 하는 일인걸요."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받겠습니다. 다음 주부터 시작하죠. 일일 수업은 4시간 정도로 하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재료비 일체는 복지관에서 준비할 테니 금요일까지 구입 목록을 전해주시면 됩니다."


시현은 선생님의 눈빛이 떨리는 걸 보았다. 쉽지 않은 제의를 선선히 받아준 사실에 감동한 것처럼. 시현은 바자회를 뒤로 하고 버스를 타고 시내의 큰 서점으로 향했다. 제과제빵 코너에 들어가 한참이나 책을 뒤적거린다. 많은 레시피 북 중 홈베이킹 메뉴가 주가 되는 서적 몇권을 구입하는 손길엔 즐거움이 배어 있었다. 이전 수업에서 아이들에게 선생님이라 불렸던 기억이 새삼 떠오른다. 문파를 지배했던 시절의 잿빛 과거와는 다른 색채로 남아있는 시현의 현재. 버스에 탄 짧은 시간 동안 구입한 책들을 펼쳐볼 만큼, 이 순간의 시현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지 못했다. 비록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평소와 같이 침착할지라도.


수요일 저녁 여섯시. 시현은 테라스 테이블에 앉아 노트와 계산기를 붙잡고 씨름하고 있었다. 이번 주 첫 수업은 할머니 스무 명을 대상으로 한다 통보 받았다. 연세 있으신 분들이니 조금 단 빵이 좋을 것 같다고 판단했고, 옛날 제과점에서도 팔았던 맘모스 빵을 떠올렸다. 부재료는 딸기 잼이면 되겠지. 유기농 딸기 잼을 주문하고자 성당계열 재료상에 전화하려다가 잠시 멈칫한다. 공산품에 비해 가격이 있는 편이니 복지관에 연락해 봐야겠네. 촘촘히 재료 값을 계산하고 연락할 사항을 적던 중이었다. 사십분 거리의 먼 곳에서 언니와 함께 살고 있는 여중생 수연이 까치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시현의 감각으론 진작에 접근을 파악했지만.


"왁!"


수연이 두 팔을 들어 올리며 놀래켰을 때, 시현은 폰을 열어 복지관에 전화를 걸었다. 놀라기는 커녕 신경도 안 쓰는 눈치. 나름 신중히 한 장난인데 대꾸조차 없자 수연은 입을 비죽 내밀었다.


"아, 네..가능하다구요. 그럼 제가 주문을 넣겠습니다. 영수증 드릴 테니 잘 정산해 주세요..예..그럼 일요일날 뵙겠습니다."


시현이 전화를 끄고 난 후. 시선을 옮겼을 때 테이블 맞은 편에 앉은 수연이 보였다. 두 손으로 턱을 받친 채 시현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뭐가 그리 좋은지 웃는 얼굴이었다. 방금 전 장난이 통하지 않은 것은 없었던 일이라 말하는 것처럼. 시현은 가게로 들어가 커피를 갈았고 수연은 기다렸다는 듯 목소리를 높인다.


"오늘은 캬라멜 마키아토 아이스요!"


"이빨 상한다. 오기 전에도 단 거 먹은 것 같은데."


"뭐예요. 아줌마 같이. 저 차고 단 거 먹고 싶단 말예요."


"집에 가서 이 잘 닦아."


"걱정마시라구요. 밤식빵 하나 포장해 주세요. 집에 가서 언니랑 먹게."


시현은 향만 느껴질 만큼 적은 소스를 넣어 아이스 캬라멜 마키아토를 만들어 주었다. 싱겁다고 뭐라 하려나. 시현의 예상과는 달리 수연은 곧잘 마셨다. 학교 끝나고 바로 이곳 시장까지 온 낌새. 간호사로 일하는 언니를 집에서 혼자 기다리기 싫다고 핑계를 대는 것이었다. 입술에 정성들여 바른 틴트와 비비 크림을 알아본 시현은 씁쓸한 웃음을 짓는다. 중학생의 짝사랑이 되기에는 내 나이가 좀 과한데. 숫자와 재료 이름이 끄적여진 노트를 접고 가게 안으로 들어가던 때였다. 자전거에 탄 은지가 까불거리며 과일 가게를 향해 가고 있었다.


"아빠! 나 이제 자전거 잘 탄다!"


핸들을 잡고 있던 손을 들어 마구 흔들며 자전거를 타는 모습이 불안해 보인다. 저러다 다치겠는데. 빠르게 밤식빵을 포장해 수연에 들려주던 중, 은지 뒤에서 친구인 소년이 잡아주고자 서둘러 뒤따라 오는 것이 보였다. 과일 가게로 가는 길은 약간 오르막길. 빵 사가라고 말해서 불러 세워야겠다. 바로 말하려던 차, 중심을 잃어버린 은지가 자전거에서 넘어져 버렸다.


차가 다니지 않는 길이지만 사람들이 오가는 시간이었다. 소년이 빠르게 달려가 일으켜 세우는 걸 보고 나서지 않는 시현. 은지는 무릎이 살짝 까진 것 외에는 다치지 않은 눈치였다. 걱정스럽게 은지를 살피는 소년의 모습에 그냥 넘기려는 참이었는데, 과일 가게 사장님이 큰 소리로 소년에게 호통을 쳤다. 왜 잡아주지 않았느냐면서. 우물쭈물하는 소년에게서 은지를 떼어내곤 은지에게도 조심하지 않았다고 다그치는 것이었다. 은지가 아버지 손에 끌려갈 때, 소년은 겁을 먹었는지 고개를 푹 숙이고 발걸음을 뒤로 했다. 시현과 함께 그 모습을 지켜보던 수연은 혀를 차며 말했다.


"완전 어이 없어..저 여자애가 까불다가 넘어진 건데 왜 엄한 남자애를.."


"사장님도 놀라셔서 그런 것 같구나. 크게 다치진 않은 것 같아 다행이네."


시현은 힘없이 걷는 소년을 불러 세웠다. 중학교 1학년인 소년은 경계할 기력도 없는지 소심하게 시현 앞에 섰다. 시현은 상냥히 웃으며 물었다.


"초콜렛 들어간 커피, 좋아하니?"


"괘,괜찮아요..돈 없어요..."


"돈 받는 거 아니야. 우리 집 빵 사러 온적 없지? 커피 마셔보고 맛있으면 나중에 와서 하나 사가렴."


"괜찮은데.."


"장삿속으로 주는 거니 걱정 마."


시현은 아이스 카페 모카를 테이크 아웃 잔에 담아 소년에게 주었다. "감사합니다..."쭈뼛쭈뼛 받아드는 소년. 시현은 어른스런 투로 말을 잇는다.


"과일 가게 아저씨를 미워하거나 무서워하지 마. 많이 놀라셔서 그랬을 거야. 너는 뒤에서 잡아주려고 했잖아? 은지도 별로 다치지 않았고. 괜찮을 거야."


소년은 그제서야 겁먹은 표정 사이 한가닥 안도감을 내비쳤다. 시현에게 고개 숙여 인사한 후 집으로 향한다.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수연은 웃거나 다행이라는 표정을 짓지 않았다. 복잡한 감정이 겹쳐진 어두운 얼굴.


"좋겠다..아빠도 있고..괜찮다고 말해줄 사람도 있고.."


차 사고로 부모님을 잃은 수연. 그동안 잘 여며 두었던 슬픔의 옷자락이 한 자락 흘러 내린걸까. 언니 밖에는 의지할 데가 없는 자신의 처지를 현실로 느낀 것 같았다. 섣부른 위로는 접어 둔 시현. 수연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한다.


"그만 가렴. 집에 가면 언니 올 때 다 될꺼야."


"..알았어요."


"수연아."


"네."


"집에 가서 이 깨끗이 닦는 거야?"


시현은 참견쟁이 할머니가 연상되는 말투로 일렀고. 수연은 풋, 하고 웃었다. "알아 모시겠습니다!" 한결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버스 정류장을 향해 가는 수연의 뒷모습을 보며, 시현은 이제까지 손을 대지 않고 놓아 두었던 에스프레소를 한번에 쭉 들이켰다.


여덟시에 가게를 정리한 시현은 보온병에 에스프레소를 담고, 야채 식빵과 밤 식빵. 옥수수 식빵을 하나 씩 챙겼다. 약간의 심리적 긴장감을 가지고 도착한 곳은 은아의 학원 '꽃밭'이었다. 수요일엔 장애아 아이들이 돌아가고 난 뒤 한 시간 정도 할머니들의 한글 공부가 있다고 들은 바 있다. 복지관에서 지원하는 수업이라 이번 주 제빵 교실에 오실 할머니들도 많을 거라 생각했고, 얼굴을 비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시현은 내키지 않은 걸음을 디딘 것이었다.


은아는 원장실에서 서류 작업에 한참이었다. 안경을 쓰고 가벼운 손놀림으로 타이핑하는 모습이 아름다운 용모와 어우러져 성적 매력으로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기척 없이 서 있는 시현을 금방 알아보고 자리에서 일어날 때, 시현은 수줍은 소년처럼 보온병과 빵 봉투를 들어 보였다.


"지금 수업 중이신 할머니들이 이번 주 내가 맡은 제빵 교실에도 오실 것 같아서.."


"수업에 들어가 보시겠어요?"


"아니, 문 밖에서 수업의 내용만 듣고 싶어."


"그렇게 하세요."


은아는 시현에게 한 발짝 다가섰다. 가벼운 손짓으로 시현의 뺨을 감싸쥐고, 바람처럼 은밀한 동작으로 입을 맞춘다. 혀를 섞지는 않았지만 키스는 조금 오래 계속되었다. 수줍음이라기보단 체념에 가까운 시현의 표정. 은아는 잠깐 시현의 가슴을 만졌다가 손을 떼었다. 농도짙은 스킨쉽이었지만 색정이 느껴지지 않는 공손한 태도였다.


"오늘은 이 정도로만 할게요. 거부하지 않아 줘서 고마워요."


시현은 말없이 목례한 뒤 원장실을 나섰다. 은아의 눈에서 한 방울 눈물이 떨어지는 것을 알면서도 외면하면서.


수업이 진행되고 있는 교실 문 옆에 자리하는 시현. 수업내용은 물론이고 할머니들의 말소리 하나하나 전부 다 들을 수 있었다. 칠판에 적어진 사랑 시를 받아적으며 할머니들 각각 옛날 일을 이야기 하는 중이었다. 소녀 시절의 두근거리는 추억이 하나하나 엮어지던 중, 한 할머니의 이야기가 시작되자 교실에 머무는 공기는 점차 다른 색채의 매듭을 지었다.


스물 한살 나이로 시집 와 시어머니와 시누이들의 구박을 받고, 분가한 후엔 몸서리 쳐지는 가난에 떨었던 기억이 한올 한올 흘러 나왔다. 배고픈 아이를 달래며 겨우 죽 한 냄비 끓였던 날이었다. 일을 마치고 돌아온 남편은 식사 했느냐는 물음도 없이 죽을 전부 먹고 코를 골았다. 그 모습에 기가 막혀 밖으로 나와 젖 달라고 우는 아이를 업고 쓰린 눈물을 쏟았던 시절. 그 때 허락받지 못했던 아름다운 시의 한구절을 인생의 황혼에 와서 듣자 한 맺힌 젊은 시절이 아프게 다가오는 듯했다.


할머니는 흐느낌으로 이야기를 끝맺었고, 다른 할머니들의 위로와 더불어 선생님은 수업을 마무리했다. 시현은 조용히 학원을 빠져 나왔다. 일요일의 수업을 위해 도움이 될까 싶어 온 거였는데 생각보다 더 큰 걸 얻어간 기분.


이번 일요일, 잘 해보자. 스스로에게 다짐하며 밤거리를 걸어 가게로 돌아가는 시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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